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영어: Philharmonia Orchestra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 중 하나. 통칭 런던 Big 4[1]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런던을 본거지로 하고 있으며, 음반이나 공연에 따라 'The Philharmonia(혹은 관사 the 생략)' 나 'New Philharmonia Orchestra' 라고도 호칭된다. 홈페이지

1 연혁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이전에는 유래가 없던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되었다.
창단자는 당시 HMV(현 EMI)의 수석 녹음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였다. 레그는 미래의 음반 산업을 예측하면서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본인이 직접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한 것이 이 악단이었다. 레그는 평소에 눈여겨 보았던 영국의 유능한 음악가들을 포섭했고, 종전 후 전역한 많은 영국 군악대 소속의 젊은 연주자들을 영입하는 식으로 단원을 확충했다. 영국 음악계의 원로였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이 레그에게 자문을 하면서 이 오케스트라 창단에 관여했다.

1945년 10월 비첨의 지휘로 창단 연주회를 가졌다. 레그가 비첨에게 처음 수석 지휘자를 제안했으나 비첨이 거절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황상 비첨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날로 먹으려고 했지만 레그가 이를 거절했다는 설이 더 타당해 보인다[2]. 아무튼 비첨은 곧 오케스트라에서 떠나게 되었고[3], 초기에는 수석이나 상임 지휘자 없이 객원 체제로만 운영되었는데, 레그의 음반사를 배경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영국을 찾은 수많은 해외 유명 지휘자들을 섭외해 공연과 녹음을 병행했다.

1948년 향후 십년간 이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처음으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레그는 예전부터 카라얀이 장차 크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1946년 카라얀에게 접촉해서 EMI와 계약을 성사시켰다. 전쟁 중에 전재산을 털려 빈털털이가 되었던 카라얀은 레그에 의해 EMI에 영입되면서 금전적인 어려움에서 크게 해결될 수 있었다. 상임지휘자와 같은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 1952년 유럽 순회 공연이나 1955년 미국 순회 공연처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공연을 이끌었다. 1948년부터 56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때까지 베토벤교향곡 전집을 비롯하여 카라얀의 대부분의 녹음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되었다.

애초에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공개 연주회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단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고민했던 레그와 카라얀은 연주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또 유럽 순회 공연(1952년), 미국 순회 공연(1955년)을 가기도 했다.

레그는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EMI 소속의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도 이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주선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레그와 계속 티격태격하는 관계였지만, 이 악단을 지휘해 몇몇 명반을 남겼다. 푸르트벵글러는 악단의 우수한 기량에 크게 감탄하여 베를린 필, 빈 필 수준에 필적하는 악단이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또 레그는 토스카니니에게 접촉했는데(1952년) 오케스트라의 테입을 듣고 감탄한 토스카니니는 몇개월 후에 있은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유럽 순회 공연에 직접 참관했고, 직접 런던으로 날아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가지고 녹음을 남겼다. 토스카니니가 만년에 NBC 교향악단과 밀라노 스칼라좌 이외에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유일한 사례였다. 참고로 토스카니니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는 카라얀과 레그는 리허설 이전에 오케스트라를 미리 연습 시켜, 토스카니니가 리허설 중에 크게 화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4] 이 공연은 오로지 브람스의 곡으로 진행되었는데, 브람스를 싫어한 레그는 이 공연 계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연 전체를 녹음하여, LP로 발매될 계획을 세웠으나 발매 취소로 인해 LP로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반세기가 지나 테스타먼트에서 공연 전체를 CD로 발매하였다.

1954년에 푸르트벵글러가 죽은 뒤 카라얀이 그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일찍부터 카라얀이 언젠가 베를린 필로 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레그는 때마침 새로 EMI에 영입된 노장 오토 클렘페러과 많은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클렘페러도 초기의 카라얀이나 후기의 푸르트벵글러와 마찬가지로 EMI 전속이었고, 후기의 녹음은 대부분 여기서 만들었다.

클렘페러는 1959년에 수석 지휘자 겸 종신 음악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EMI와 맺은 녹음 계약도 계속 갱신하며 활동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럭저럭 잘나가고 있던 1964년에 창단자였던 레그가 자금난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악단 해체를 발표해 충공깽을 선사했다. EMI 내에서 적이 많았던 레그가 마침내 회사에서 실권을 잃고 물러나게 되자 더 이상 오케스트라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원들은 레그의 해단 발표를 씹어버리고 클렘페러를 악단 명예 회장으로 옹립한 뒤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라는 이름의 자주 운영 악단으로 새롭게 출발했다[5].

하지만 레그가 손 뗀 이후 재정적으로 예전보다 어려움을 겪었다. 또 당시에 탄탄한 자금력을 가졌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이 높은 연봉을 미끼로 실력있는 단원들을 빼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전까지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로 평가받았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밀려난 것도 이 시기였다.

동시에 그 동안 거의 EMI에 얽매이다시피 했던 녹음 계약도 다른 음반사들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경쟁사였던 데카네덜란드의 필립스 등에서도 음반을 제작했다. 클렘페러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1971년에 은퇴한 뒤에는 로린 마젤이 잠시 객원으로 자주 출연하며 공백을 메꾸었고, 클렘페러가 1973년 타계한 뒤에는 32세에 불과한 리카르도 무티가 제2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무티는 클렘페러가 닦아놓은 합주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표현력과 음색의 숙달에 힘썼고, 동시에 악단 명칭을 창단 때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 돌려받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결국 1976년에 명칭이 창단 때의 그것으로 공식 개칭되었고, 무티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음악 감독 호칭을 추가로 부여받았다.

1982년에 무티가 사임한 뒤에는 동향인인 주세페 시노폴리가 1984년에 직책을 이어받았고, 1994년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사임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재직하였다. 시노폴리의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전속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활발한 녹음 활동을 진행했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집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노폴리 사임 후에는 약 세 시즌 가량 공백기를 둔 뒤 독일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제4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도흐나니는 2008년까지 재직했다. 도흐나니는 이미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동시에 이 악단을 이끌었는데, 악단의 네임 밸류가 좀 더 높은 클리블랜드에서 대부분의 녹음활동을 진행했다.

도흐나니는 사임 후 악단으로부터 종신 명예 지휘자 직함을 수여받았고, 후임으로는 핀란드 지휘자인 에사-페카 살로넨이 부임해 2010년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살로넨은 부임 당시 3년 계약으로 들어왔지만, 이후 계약 갱신을 하면서 2014년까지 활동 기간이 연장되었다.

2 역대 수석 지휘자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 실제 수석 지휘자는 아니었으나 지휘자 본인과 악단, 많은 책들이 수석 지휘자인 것으로 서술.
  • 오토 클렘페러 (Otto Klemperer, 재임 기간 1959-1973)
  • 리카르도 무티 (Riccardo Muti, 재임 기간 1973-1982)
  • 주세페 시노폴리 (Giuseppe Sinopoli, 재임 기간 1984-1994)
  •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Christoph von Dohnányi, 재임 기간 1997-2008. 퇴임 후 종신 명예 지휘자 칭호 수여)
  • 에사-페카 살로넨 (Esa-Pekka Salonen, 재임 기간 2008-)

창단 초기 10년간은 카라얀이 실질적으로 상임지휘자 또는 수석지휘자나 마찬가지였지만 정식으로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6]. 이외에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계관 지휘자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특징

창단초기인 19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리즈시절에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평가받았다. 푸르트벵글러는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후 베를린 필과 빈 필에 필적하는 기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라고 격찬했고, 토스카니니 또한 이 오케스트라의 기량에 감탄해 1952년 이례적으로 런던까지 날아와 이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고 레코딩을 남길 정도였다.

녹음 프로듀서가 창단한 악단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콘서트 보다는 녹음 활동에 보다 큰 비중이 주어져 있었다. 특히 종전 후 EMI가 경쟁사인 데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준상임 격이었던 카라얀이나 이후 수석으로 취임한 클렘페러 외에도 수많은 지휘자들이 이 악단과 녹음 세션을 가졌다.

하지만 1964년에 레그가 손놓은 뒤에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콘서트 무대에 서는 횟수를 늘려야 했고, 이후 여타 런던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공연장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악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연혁 란에 쓴 것처럼 1964년부터 1976년까지는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나온 음반들에도 이 명칭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고, 본질적으로는 같은 단체이므로 주의.

물론 해단 문제 때문에 EMI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고, 이름 바꾼 뒤에도 클렘페러를 비롯한 지휘자들과 여러 녹음을 남겼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데카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최신 녹음 기술인 4채널 방식을 도입한 녹음들을 많이 취입했고, 이 레코드들은 오디오 매니아들에게도 화제가 되었다. 시노폴리는 말러의 교향곡 전집을 비롯한 음반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남기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클래식 음반 시장의 전반적인 불황 때문에 기존 음반사들의 녹음 계획도 긴축되면서, 악단 측에서도 인터넷 시장의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악단 홈페이지에서는 마이너 레이블인 시그넘에서 나온 CD들 외에도 다운로드 전용 음원을 직접 판매하고 있으며, 현대음악 공연이나 여타 교육 프로그램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사우스뱅크 센터의 로열 페스티벌 홀을 사용하고 있는데, 1990년대부터는 베드퍼드의 콘 익스체인지, 레스터의 드 몽포르 홀 같은 지방 공연장들과도 전속 계약을 맺고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합창 붙는 작품의 경우 1957년에 레그에 의해 창단된 필하모니아 합창단(Philharmonia Chorus)과 자주 협연하고 있다. 이 합창단도 1964년 악단과 함께 해산 위기를 맞았다가 자주 운영 체제로 전환하고 뉴 필하모니아 합창단으로 개칭해 활동했으며, 1977년에 창단 당시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다만 합창단 별도의 홈페이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예 독립해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2년에는 Carl Davis의 지휘로 제임스 본드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이때 진행자는 골드핑거에서 본드걸로 나왔던 역대 최고령 본드걸인 아너 블랙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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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헤르베르트 하프너의 말에 따르면 비첨과 레그가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창단에 관한 모종의 이야기가 있었고, 이후 그 내용과 관계 없이 레그가 필하모니아를 창단했는데 비첨이 이에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레그가 처음에는 수석 지휘자를 제안했으나 비첨이 아예 날로 먹으려고 해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3.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차지하는데 실패한 비첨은 아버지의 유산을 활용하여 다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4. 실제로 리허설 중에 토스카니니가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한다.
  5. 창단 기념 공연이 남아있다. 바로 EMI에서 촬영한 베토벤 교향곡 9번 실황 영상.
  6. 카라얀이 실제 수석 지휘자가 아닌 것은 틀림 없으나 실질적으로 상임 지휘자로서 일했고 실제로 워너에서 나온 음반에 'Chief Conductor'로 서술했고 대다수의 해설서들이 카라얀이 수석 지휘자였다고 서술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