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영어: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영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이름 그대로 런던을 본거지로 하고 있다. 홈페이지

1 연혁

1932년에 지휘자였던 토머스 비첨이 창단한 사설 관현악단으로 출발했는데, 비첨 가문은 대대로 제약 사업으로 거액의 부를 모은 대부호였다. 비첨은 비록 경영 승계는 받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유산을 자신의 음악 활동에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음악 단체 중 21세기까지 살아남아 있는 단체는 이 악단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두 단체 정도다.

비첨은 창단 직후 초대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고, 세계 대공황으로 빌빌대고 있던 영국 음악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쇼미더머니를 시전해 구조조정으로 퇴단해야 했던 많은 실력파 연주가들을 거꾸로 영입하면서 악단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녹음 활동도 시작해 비첨 자신의 전속 음반사였던 컬럼비아나 EMI 등지에 여러 장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첨은 무슨 이유인지 1939년에 악단 운영권과 수석 지휘자 직책을 모두 포기해 버렸다. 공황기에도 별 탈 없었던 악단의 재정 상태는 갑자기 망했어요 상태로 급추락했고, 악단원들이 직접 운영에도 책임을 지는 자주 운영 제도를 채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로 뒤이은 2차대전 때문에 상황은 훨씬 심각해졌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치열했던 1941년 5월에는 상주 공연장으로 쓰던 퀸즈 홀이 폭격으로 개발살나면서 악단 소유의 악기와 악보 상당수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 때 심각하게 해체가 고려되기도 했지만, 애호가들의 지원과 BBC의 방송 출연 주선 등에 힘입어 간신히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종전 후 창립자였던 비첨이 잠시 일선에 복귀해 악단 재건을 시도했는데, 1년 반 정도 객원 지휘만 했고 이후 로열 필의 창단과 육성에 주력하는 바람에 큰 성과는 없었다. 결국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강행군에 가까운 수많은 공연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고, 자국 출신이던 동맹국이던 과거 추축국이건 수많은 네임드 지휘자들을 초빙해 닥치는 대로 공연을 했다.

이렇게 혹사당하던 중 1947년에 네덜란드 출신 지휘자인 에두아르트 판 베이눔이 제2대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하지만 베이눔은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활동이 그리 활발하지는 못했고, 악단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후임으로 영입된 아드리언 볼트의 활동 시기부터였다. 볼트는 1957년에 물러날 때까지 유임하면서 악단 체제를 재정비하는 등 많은 공헌을 했고, 1956년에는 영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전후 최초로 소련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비록 재정 상태는 여전히 막장이었지만, 볼트의 후임으로 임명된 윌리엄 스타인버그존 프리처드 등을 거치면서 합주력이나 재정 기반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프리처드는 자신이 예술 감독을 맡고 있던 음악제인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런던 필이 기존의 로열 필을 대신해 전속 관현악단이 되는 데 기여했다.

1967년 제6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한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도 역대 수석 지휘자들 중 12년이라는 최장기 재임 기간을 기록할 정도로 악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냉전 시기에 서방에서는 민감하게 다루어졌던 쇼스타코비치교향곡들을 적극적으로 공연하고 녹음해 화제가 되었다. 하이팅크의 후임이었던 헝가리 출신의 게오르그 솔티 재임기에는 악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성대한 축하 공연을 열기도 했다.

솔티의 후임으로 동독 출신의 지휘자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서방에서 이름이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텐슈테트를 영입한 것은 당시에는 다소 도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텐슈테트의 재임 기간은 런던 필의 전성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임인 하이팅크나 솔티도 네임드 지휘자들이지만 이들은 본진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런던 필과의 음반 녹음 활동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텐슈테트는 런던 필을 메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런던 필과 많은 녹음을 남겼고 연주 여행도 활발히 다녔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집 녹음은 크게 호평을 받았다. 텐슈테트와의 활발한 음반 녹음 출시는 런던 필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더욱 높여줬으며, 악단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텐슈테트의 지병이었던 성대암이 악화되면서 활동에도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고 1987년에는 결국 건강 악화로 사임하고 말았다. 텐슈테트의 사임 후에는 후임을 찾지 못해 수석 지휘자 직책이 3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텐슈테트는 암에서 회복하고 나서 다시 런던 필 지휘대에 올랐지만 여전히 건강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1990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신예였던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젊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지휘자였던 벨저뫼스트는 EMI 등과 음반 작업을 통해 불안정한 악단 재정을 충당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취임 직후에 내놓은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은 카라얀의 유명한 마지막 녹음과 비슷한 시기에 출시되었지만 나름 호평을 받았고 벨저뫼스트를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런던의 신랄한 비평가들에 의해 공연이나 음반 출반 때마다 평단에서 신나게 까였다. 런던 비평가들의 까임에도 불구하고 벨저뫼스트는 런던 필 사임 후 취리히를 거쳐 미국의 본좌급 오케스트라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취임한다. 1995년에는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와 함께 한국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벨저뫼스트가 사임한 후에는 또 악단 재정이 영 좋지 않은 상태 속에서 4년 동안 객원 지휘에만 의존해야 했다. 이 시기에는 로열 필과의 합병이 거론되기도 했다.

2000년이 되어서야 독일쿠르트 마주어를 후임으로 맞아들였다. 뉴욕 필에서 지쳐있던 마주어는 절친했던 텐슈테트의 오케스트라였던 런던 필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을 돕고자 뉴욕 필보다 훨씬 낮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런던 필의 포스트에 취임했다.

마주어는 2007년까지 재임했고, 후임으로는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자리를 이어받아 2010년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2008/09년 시즌 부터는 프랑스캐나다 지휘자 야닉 네즈세갱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2 역대 수석 지휘자

  • 토머스 비첨 (Thomas Beecham, 재임 기간 1932-1939)
  • 에뒤아르트 판 베이뉨 (Eduard van Beinum, 재임 기간 1947-1950)
  • 에이드리언 볼트 (Adrian Boult, 재임 기간 1950-1957)
  • 윌리엄 스타인버그 (William Steinberg, 재임 기간 1958-1960)
  •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재임 기간 1962-1966)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재임 기간 1967-1979)
  •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재임 기간 1979-1983)
  • 클라우스 텐슈테트 (Klaus Tennstedt, 재임 기간 1983-1987)
  • 프란츠 벨저뫼스트 (Franz Welser-Möst, 재임 기간 1990-1996)
  •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재임 기간 2000-2007)
  •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Владимир Юровский, Vladimir Jurowski, 재임 기간 2007-)

3 특징

네임 밸류에 있어서 같은 런던에 소재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밀리며, 실제 악단 수준도 언급한 두 오케스트라보다 아래라고 여겨지고 있다. 연혁 항목에 숱하게 언급될 정도로, 재정 형편이 좋았던 시절이 별로 없는 안습의 세월을 보낸 악단이었다. 어느 정도 클래식을 듣기 전까지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악단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역대 상임지휘자들의 면면을 보면 의외로 나름 쟁쟁한 네임드[1]들이 많다. 특히 같은 '런던'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런던 심포니와 비교할 때, 런던 필의 역대 상임지휘자들이 음악적으로 더 수준 높은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클래식 음반도 나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런던 심포니가 악단 기량 자체는 세계 수위급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상임지휘자들의 음악적 내공이 이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아 의외로 명반이 없다는 점과 대비된다. 2000년대 들어 녹음 시장이 활기를 점차 잃어가게 되자, 2005년에 다른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자체 음반사인 'LPO' 레이블을 출범시켜 음반이나 인터넷 유료 다운로드 음원들을 제작하고 있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를 통한 홍보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완전 다른 조직이긴 하지만, 비첨이 창단한 악단이라는 점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미묘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거의 모든 악단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던 1990년대 중반에는 두 악단의 통합 문제도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지만,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마찰이 심했는지 아니면 따로 뭔가 해결책을 내놓았는지 결국 취소되었다.

자주 운영 악단으로서 늘 마주치게 되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핸 방책인지, 굳이 클래식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배경의 음악인들과 협연하면서 지명도와 재정 모두를 붙들어 잡는 데 꽤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영화음악 OST 작업에서부터 나이트위시오아시스 같은 메탈/ 밴드, 칙 코리아 같은 네임드 재즈 피아니스트와 협연하고 음반 작업까지 하는 등 거의 마당발 수준으로 활동 중이다.

동양권에서도 이 악단의 이름을 음반 등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수구꼴통 작곡가 스기야마 코이치가 자작의 게임 OST인 드래곤 퀘스트 1~7편을 교향조곡(교향 모음곡)으로 개작한 CD들이 출반되어 있다. 이외에도 파이널 판타지제노사가 등의 게임 OST에도 참여했고, 양방언이나 유희열 같은 뮤지션들도 이 악단과 세션을 한 바 있다.

xjapan의 곡들을 조지 마틴이 클래식버전으로 편곡해서 eternal melody라는 앨범을 1993년에 발매한적이 있다. 이때 앨범곡들을 연주했던 악단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이 붙는 작품의 연주 때는 1947년 창단된 악단 부속 합창단인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London Philharmonic Choir)이 줄곧 협연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로열 페스티벌 홀로 되어 있었는데, 2000년에 이 홀과 주변 문화 공간들인 퀸 엘리자베스 홀, 헤이워드 갤러리가 대규모 개보수 작업을 거쳐 통합되면서 복합 문화 공간인 사우스뱅크 센터가 탄생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악단 홈페이지에도 상주 공연장이 로열 페스티벌 홀이 아닌 사우스뱅크 센터로 변경되어 있다. 다만 악단 단독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 신포니에타, 시대연주 단체인 계몽주의 시대 관현악단 세 단체가 같이 세들어 있다. 밥그릇 싸움이 걱정되지만 아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고 있는 듯.

  1. 역대 상임지휘자들의 네임밸류는 런던 심포니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본진이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고, 투잡으로 런던 필에서 일한 경우가 많았다. 로얄 콘서트헤보의 하이팅크, 시카고 심포니의 솔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벨져-뫼스트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