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2001 - 노요리 료지 윌리엄 놀스 배리 샤플리스 | → | 존 B. 펜 쿠르트 뷔트리히 다나카 고이치 | → | 2003 - 피터 에이그리 로더릭 매키넌 |
1 개요
- 한자 표기: 田中耕一
열심히 밭을 갈았더니(한우물을 팠더니) 성과를 이뤘다
1959년 8월 3일 출생. 도야마 현이 고향이며, 도호쿠대학 전기공학 학사로 1983년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한 후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사상 두번째로 학계와 관련이 없는 민간 연구원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사례이며 유일한 학사 출신 수상이다.
약간 복잡한 가정환경의 소유자인데, 부모님이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삼촌 집에 입양되었다. 본인은 삼촌 부부를 친부모로, 사촌 누나와 형들을 친형제로 알고 자랐으며 성인이 된 해에 사실을 알고 약간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고.
그의 업적인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Soft Laser Desorption/SLD)은 단백질과 같은 거대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분석기법이다. 질량분석법은 대개 레이저로 분자를 이온화시킨 뒤 자기장 하에서의 비행 궤적을 통해 질량을 계산하는 방식인데, 단백질과 같은 거대분자는 레이저를 쬐일 때 결합구조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어 분자 개개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에 다나카는 코발트 나노입자와 글리세롤의 혼합물 상에서는 레이저를 쪼아도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이온화되는 현상을 발견해 종래의 방법으로 질량분석이 가능케 했다.
SLD보다는 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Ionization(MALDI)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MALDI 기법으로 이온화시킨 단백질을 자기장 하에서 비행시켜 (Time of Flight(TOF)) 최종적으로 질량을 얻어내는 일련의 분석법을 MALDI/TOF 라고 한다.
생물학 관련 학과에서는 학부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만큼 현대 생명공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도구라는 얘기. 또한 화학공학 및 고분자공학과에서도 다루는데 고분자의 분자량 측정법을 배우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기법이다. 덤으로 이 때 이걸로 노벨상 받았으니 너희도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수의 훈시도 들을 수 있다.[1]
MALDI 기법 자체는 85년도에 이미 개발되었다는 점 때문에 다나카의 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백질이 이온화되는 사례는 엄연히 다나카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므로 큰 문제는 아니다.
사실 연구 결과 자체는 에디슨처럼 matrix 후보로 아무 거나 때려박다 보니까 우연히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다나카가 코발트 + 글리세롤 조합을 얻기까지 시도한 횟수는 200여 회가 넘는다. 본인도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승진하지 않고 연구원 주임으로 남았을 만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2].
2 뜻밖의 수상
2002년 10월 9일 수요일 오후에 다나카 고이치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테니 받아 주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조금 뒤 외국에서 영어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통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 그런데 노벨하고 이름이 비슷한 상도 있었나?' 속으로는 동료들의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상상도 했다. 이건 좀 심했다. 박사 출신이 아니라지만, 이공계 전공자가 노벨상을 몰랐다니
그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회사 전화기 50여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는 '다나카 고이치'라는 동명이인이 3명이나 있었다.
회사에서도 문의전화에 '잘못 아신 게 아니냐'라고 되물을 정도였고, 일본에서도 도대체 '다나카 고이치가 누구냐'며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갸우뚱했을 정도[3].
본인임이 확인된 이후에는 말 그대로 눈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쏟아지는 강연 요청, 인터뷰 요청에 일을 못하고, 양복이 달랑 두 벌뿐이라 새 걸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질 않나,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직장도 덩달아 엄청 유명해지고 주가까지 수직상승해서 사장에게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회사에서 마련한 수상자 인터뷰 장면으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본인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정장을 미처 못 챙겼다고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 본인 성격도 무척 소탈하고 연구를 좋아하는 공부벌레 착한 사람.
노벨상 시상식에서의 모습. 이때는 물론 예복을 차려입었다.
실제로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으로, 대학 시절에도 그다지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간 승리의 미덕에 어울리는 사람. 자세한 것은 '멋지다 다나카' 라는 자서전격 책과 '일의 즐거움' 이라는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수상이 알려진 이후 한국 과학계는 어마어마한 열폭(...)이 불었으며[4], 인간승리의 신화로 한동안 떠들썩했다.
지금도 같은 회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소개 페이지- ↑ 다나카가 발견한 최초의 방식은 요즘에는 쓰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노벨상은 중대한 과학적인 개념 또는 탐구 방법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요샌 아무도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앙리 무아상이 하던 방법대로 플루오르를 정제하지 않으며, 1911년 수상자인 마리 퀴리 여사가 하던 방법대로 라듐을 분리하지 않는다!
- ↑ 사실 승진대상에는 늘 올라 있었으나 본인이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 ↑ 가족들은 동명이인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 ↑ 그도 그럴 것이 명문대학의 교수나 저명한 과학자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사람이 수상자였다는 사실과 더구나 연구에 몰두하고 싶다며 승진까지 마다했다는 점 때문에 출세지향적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5년 투유유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으로 또 한 번 확인사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