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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찰소개, 연혁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 소재의 조계종 사찰이다. 조계종 제5교구 본사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창건연대는 신라 진평왕 9년인 557년에 월형산 월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막상 덕주사에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어 '속설에 이르길 덕주부인이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을 따라 10세기 중반에 창건했다고 보는 듯.
현재 남아 있는 절은 원래 하덕주사로 불리던 절로 대동지지 등의 서적엔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다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당시 상,하덕주사는 군인들에 의해 소각되었고 지금은 하덕주사만이 1963년에 중창되어 덕주사로 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후 몇번의 중창과 중건을 거쳐 1985년의 중창 당시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덕주사로 옮겨 봉안했다.[1] 이후 1998년에 새로 대웅보전을 지었고 2007년부터 주지를 맡은 주지스님이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예전 전각등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
이 마애불과 덕주사엔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위에서 말한 덕주부인이 바로 경순왕의 큰딸이자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를 뜻하는 것이다. 전해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병력을 양성하러 떠날때 잠시 월악산에 머물렀는데 꿈에 관세음보살에게 '마애불을 만들면 억조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남매가 함께 계곡 물에 목욕재개하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월악산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덕주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후 공주는 계속 덕주사에 머물길 원하여 그곳에서 출가하여 여생을 보냈지만 마의태자는 끝내 금강산으로 갔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마의태자가 미륵불을 만들고 나서 금강산에 들어갔고, 덕주공주는 마애불을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에 의해 마의태자가 미륵사에, 공주가 덕주사에 감금되어 서로를 그리면서 불상을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공주가 마애불이 되었고 태자가 미륵사지 입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마애불이 덕주공주의 얼굴, 미륵불이 마의태자의 얼굴을 따서 새겨진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3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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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절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보물 406호 덕주사 마애여래입상이 있으며 얼굴은 길고 풍만하며, 기다란 눈과 큼직한 코, 늘어진 턱의 모습을 보인다. 이 석불은 산 아래 미륵사지 석불입상과 마주보고 있다.
절 입구에 세개의 남근석이 있는데, 월악산의 형상이 여자와 비슷하고 예로부터 여산신령이 다스리는 땅이라 음기가 강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아낙네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고 하며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가 있고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기의 조선시대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전설로는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고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부도에는 환적당(幻寂堂)·부유당(浮遊堂)·용곡당(龍谷堂)·홍파당(洪波堂)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덕주사 전방 약 2㎞ 지점에 있는 빈신사 터에는 보물 제94호로 지정된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이 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장인의 것이 아닌 신심이 돈독한 불자가 원력으로 소박하게 만든것이다. 아픈사람이 기도하고 자기 아픈 부위와 같은 부처의 몸을 긁어다 그 가루를 먹고 나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긁은 자국이 남아 있다.
이외에 대불정릉엄신주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비문의 첫줄은 대불정주라 음각된 한자로 시작하고 105자로 추정되는 범문(梵文)이 기록 되었다. 고려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있는 엄주(楞嚴呪)를 새긴 것으로 범문으로 된 비문이 현존하는것으로 유일하며 국보급이다.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덕주사 바로 옆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 덕주산성이 있는데 덕주공주가 피난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쌓은 처음 쌓은 성이라고 전해오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증축되어 온 흔적이 있어 한국의 전통 성곽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성은 석축과 토축의 혼합 형식으로,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이 남아 있다.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로서 월악산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곽과는 달리 계곡을 성으로 쌓고 그밖에는 험준한 산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성벽은 2m 정도의 높이로 쌓았다. 계곡 주변 계곡의 풍경이 아름답다.
전해오는 얘기론 몽골의 침입 당시인 1256년 4월에 몽고군이 충주를 침략하여 충주성을 제압하고 충주산성을 공격하여 관리와 주민들은 두려워서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덕주산성으로 피난하였는데 몽고군이 추격하며 공격을 가하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과 번개, 벼락이 함께 들이쳐 왔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조선 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암투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 이때 희종 2년인 1206년에 조성된 고려시대의 금구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