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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김일(金鎰)이며, 마의태자라는 말은 별칭으로 마로 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최후의 임금인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신검이 즉위하고 건국왕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고려에 귀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사실상 후삼국시대를 통일할 대세가 고려로 정해지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마의태자는 여기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왕의 뜻을 막지 못하고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고 만다. 마의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가지 않고 누이인 덕주공주와 함께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머물다가 개골산(=금강산)에서 삼베(마)로 만든 옷을 입고 초근목피하다 생을 마감했으며, 그 때문에 마의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인제로 간 마의태자가 다른 인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참고로 마의태자가 활약했다는 인제 지역은 바로 육군과학화훈련장이 있는 곳이다. 마을은 예전에 없어졌으나 마을이름은 남아있는데, 김부리, 갑둔리가 있고, 김부대왕각이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부대왕이 과연 누구이냐? 라는 것인데 경순왕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의태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는 과학화훈련장이 되어 김부대왕각도 사라지고 주민들이 올리던 굿잔치도 소멸한 상태이다. 또한 접근이 쉽지 않은 상태이나 전방지역 군복무를 하게되면 한번 쯤 가볼 수 있다. 실제로 가보면 성벽터 같은 것도 있고 위치나 지형이 중소규모의 군대를 모아 훈련시키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방어도 가능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여단급 훈련장이 될 정도로 꽤나 군사주둔지로서 가치가 있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마의태자가 열심히 신라부흥을 위해 군사주둔을 했던 곳이 다시 천년뒤 대규모 군사주둔지 겸 훈련장이 되었다는 것이 꽤나 아이러니한 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자 하자 이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볼때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의태자가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이유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마의태자는 효종랑의 손자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효종랑이 화랑을 이끌던 낭주였기 때문에 마의태자는 화랑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 때문에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자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던게 아닐까 하는 가설. 사실 다음 왕은 태자인 자기 차례인데 항복한다고 하니 결사반대한 것일지도? 물론 믿으면 곤란하다. 근데 묘하게 현실성 있다.
사실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의태자가 혼자 금강산에 들어가서 생을 마쳤다기보단 고려에 맞서서 신라부흥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이긴 한다. 실제로 마의태자처럼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고려에 저항하다가 노비나 천민으로 전락한 호족들도 많이 있었고 당장에 고구려와 백제, 발해도 멸망 후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고안승과 고연무, 부여풍, 대연림 등이 과거 고구려와 백제, 발해의 왕족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마의태자도 이들과 비슷하게 고려에 맞서 신라부흥운동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이견도 있다. 당장에 고구려와 백제, 발해는 점령당하거나 항복하지 않은 여러 성과 지배층이 건재하였는데다 군사력도 있어서 멸망 이후에 각각 부흥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후삼국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력이 대폭 축소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성 대부분들과 지배층, 권력층들이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이탈하여 호족, 군벌화되고 후삼국 시대 후기에 대부분 고려에 투항하여 영토라곤 서라벌 인근 밖에 남지 않아 부흥 운동을 일으킬 군사력이나 인재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신라는 멸망 과정이 외부의 침입이 아닌 고려에 대한 평화적인 투항, 흡수로 막을 내리는 바람에 고구려나 백제, 발해처럼 멸망 후 부흥 운동을 일으킬 명분조차 없었다.
2 마의태자가 신라 왕이 되었다면?
'마의태자가 왕이 되었으면 신라가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있다.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 경순왕에 맞서 대체적으로 무너져가는 신라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신라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이미 고려와의 국력 차가 벌어진 이상 군사력으로는 고려와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못 해도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대신 고려에게 사대주의로 굴종하여 신라를 고려 초기때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누렸던 탐라국처럼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얻어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사실상 한반도 정통왕조의 지위를 가진 신라를 과연 고려가 흡수합병 안하고 탐라국처럼 속국으로 두었을지는 의문이다.[1] 고려 태조 왕건 입장에선 신라는 후삼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패자가 되려는 이상, 반드시 멸망,병합시켜서라도 없애야 할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2] 설사 왕건이 신라를 없애지 않고 신라가 어찌어찌해서 탐라처럼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고 해도 왕건 이후 혜종이나 정종, 광종 임금 시기에 고려가 신라를 병합했을 가능성도 높다.왕건 사후가 더 문제
하지만 만에 하나 실제로 마의태자가 신라의 왕이 됐다 하더라도 고려에게 친고려 사대주의 외교로 굴종하여 신라를 보존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만은 없다. 군사력으로 결사항전을 하기에는 당시 고려와 신라의 국력 차가 너무 컸기 때문
3 이모저모
- 마의태자는 또 다른 떡밥을 남겼으니, 바로 금태조 완안아골타와 관련된 떡밥이다. 고려사나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행, 혹은 김준이 여진족으로 들어가서 대를 이은 결과 나온 게 금태조 아골타라는 것이 떡밥의 핵심. 하지만 고려사를 엄밀하게 살펴볼 때 김행이나 김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순암 안정복은 마의태자의 세 아들 중 김준이 여진족에게 망명했고,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았다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역사에 남은 것만 세 명이니 결론적으로는 네 명이 된다.
- 마의태자의 묘는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에서 비로봉까지 공개될 예정이어서 마의태자의 묘도 실물이 공개되나 했지만, 남북 관계 경색과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보류된 상황.
- 석굴암의 보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 스토리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는 마의 태자가 2명이며 경순왕의 8왕자 중 2명이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1명은 정설대로 금강산,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용문사로 들어간 왕자가 보석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을 떠날 때 같이 매장했다고 한다.
4 시조 논란
마의태자는 어느 집안 조상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마의태자 김일은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2009년 9월 경주 김씨 대장군공파가 대종회 명칭을 태자파로 바꾸고, 2010년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1세로 삼은 대동보를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며 논란이 증폭됐다.
태자파는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중시조인 고려의 김순웅 장군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월성가승원대세계에는 ‘순웅과 경순왕 사이에 세계(世系)의 기록을 잃었다’ ‘그러나 (순웅과 경순왕 사이의) 연대가 매우 가깝다’ 등의 문구가 나오며, 삼성연원보에는 마의태자의 두 아들이 선웅과 순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여타 김씨 문중들은 반발한다. 이 주장은 마의태자의 장남 김기로의 후손인 부안 김씨와 차남 김교의 후손인 통천 김씨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 측은 태자파가 마의태자를 1세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신라삼성연원보가 엉터리 족보, 이른바 위보라는 것을 들어 이를 반박했다. 신라 김알지 후손들의 연합체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도 같은 주장이다. 193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김경대라는 사람이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곳곳에 사실과 다른 기술이 많고 같은 책 안에서도 내용이 모순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족보라는 것. 삼성연원보에 따르면 태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김일이 마의태자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하며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 가계와 관련된 기록들을 반박의 중요한 근거로 들었다.
결국 논란은 소송으로 이어져 경주 김씨 계림군파에서 “신라계 김씨 일가의 족보에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등의 이유로 태자파의 대동보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법원의 판결 이유는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사극 드라마인 태조 왕건에서는 경순왕이 즉위한 뒤에 등장하며, 작중에서 나라를 고려에게 바치려는 아버지 경순왕과 대립을 하며 고려와 후백제를 적대하며 무너져가는 신라를 존속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일국의 태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경순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를 방문한 왕건이 고려로 귀국 돌아갈 때 경순왕은 물론 신라의 모든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검을 들고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신료들이여, 속지 말지어다! 저기 가는 고려 왕은 도적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하고, 경순왕이 고창, 운주 전투에서 대세가 고려에 기울자 고려와의 병합을 논의하는 회의를 할 때도 적어도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통일을 이룬 국가였소이다! 누가 승자란 말이오, 폐하 아직 신라는 일어설수 있사옵니다. 고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노려 다시 일어설수 있사옵니다!, 저들이 어찌 도적이 아니고서야 어찌 천년사직의 우리 신라국을 내놓으라고 한단 말입니까! 있을수 없사옵니다! 라고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비치자 "차라리 전 신료들에게 자결을 명해 주시오소서!"라고 부르짖지만 결국 실패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마의를 입고 개경으로 떠나는 아버지 경순왕과 전 신료들의 모습을 보며 통곡하며 산 속으로 들어간다. 배우는 이병욱.[3]
- ↑ 게다가 탐라국이 고려 초에 고려의 속국이 될 당시 신라는 경순왕의 항복으로 고려에 흡수되어 소멸된 상황이었다.(탐라국의 고려 복속- 938년, 신라 멸망-935년) 즉 탐라국이 고려의 속국이 될 시기에 신라가 고려 초기에 탐라국이 하듯이 고려의 속국으로 복속하는 것은 당시 시기,연대적으로도 일치하지 않는 소리라는 것.
- ↑ 당장에 후삼국시대 말기때 신라처럼 정통성을 가진 국가가 아니었음에도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와 백제에게 사대하며 속국으로 버티던 마한과 옥저, 동예 같은 한국 고대사의 소국들도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 멸망,흡수당했음을 생각해보자.
- ↑ 이후 이병욱은 명성황후에서는 김옥균 역을, 무인시대에서 최충헌의 생질 박진재, 대왕세종에서는 김종서, 근초고왕에서는 근초고왕(부여구)의 형 부여휘 등을 맡았다. 주로 총명하고 공명심이 강한 인물들을 열연해 왔다. 결국 정도전에서 윤소종을 맡았는데, 윤소종은 최영의 처형에 깊이 관여하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최영 역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태조 왕건에서 견훤역을 맡았던 서인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