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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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住寺

1 개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구 사내리 209)에 있는 속리산사찰. 사실상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으로 유명한 절이다.[1] 이 외에도 커다란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절이다.

2 역사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신대사가 창건한 이다. 의신이 돌아오면서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41년)에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세웠다.

조선 고종 9년(1872년)에는 경복궁에 쓰일 못과 화폐를 주조하는 데 쓸 목적으로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 내의 커다란 금동미륵불상과 철 당간이 징발되기도 했다. 현재는 오랜 노력 끝에 금동미륵불상과 철 당간지주 모두 복구를 해 놓았다.

3 가람

사실상 가람배치에 있어서 규칙적인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경내에는 커다란 중층 건물인 대웅보전, 특이한 양식의 원통보전, 쌍사자 석등(국보 5호), 철 당간지주(幢竿支柱), 부도들 등 상당히 귀중한 문화재가 많지만, 팔상전과 높이 27m거대한 불상 때문에 아웃 오브 안중으로 묻히는 분위기. 안습..(그중 최고는 나름 국보인데 가장 지명도 빠지는 석연지)

3.1 팔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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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보은 법주사 팔상전
한자報恩 法住寺 捌相殿
영어Palsangjeon
분류번호국보 55호
소재지대한민국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분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설1동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신라시대, 553년
조선시대, 1624년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2] 이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근대 이전에 지어졌던 유일한 5층 목탑이다. 임진왜란때 한 번 불탔으나 인조 2년(1624)에 승려 벽암에 의해 다시 건축되었다.

목탑의 전성기였던 삼국시대고려시대 이후의 목탑이라 그런지 전형적인 목탑과는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한 연속구조를 하고 있으며, 내부는 통층으로 통하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22.7m, 평면은 5칸의 정방형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팔상전은 1층의 평면 역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보다 날렵한 일반적인 목탑의 형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건되면서 1층 면적이 늘어나 지금의 모습이 된 것. 이에 대해서 목탑 구조가 발전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기술이 퇴보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지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벽면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서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3.2 대웅보전

다른 사찰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중층 사찰 건물이다. 이정도 크기를 가진 사찰 건물은 화엄사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정도가 있을 뿐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당히 거대하다. 그러나 인지도 면에서 좀 안습한 취급을 받고 있다.

3.3 용화보전

법주사는 원래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용화보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이 용화보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전해지며 법주사의 중심 전각이었다. 하지만 불탄이후(정확히 언제 불탔는지는 [추가바람])-정유재란 때 불탄걸 복구하고 미륵장륙상을 모심. 그 후 흥선대원군이 미륵장륙상을 털어감...- 그 자리에 아래에 금동미륵입상을 세웠다.

4 원통보전

정사각형에 사모지붕을 얹은 특이한 형태의 건물.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으로 남아있는 건물이란 점에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4.1 금동미륵입상

거대한 미륵상은 청동불상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높이였다고 한다. 높이 33m[3], 무게 160톤. 이 기록은 1993년홍콩의 포린 사원에 세워진 34m 짜리 천단대불 좌상에 의해 깨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원군이 해체한 불상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데, 당초 1939년에 복원하려던 계획은 재정문제와 태평양 전쟁 말기의 금속 공출 등의 문제 때문에 시멘트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조차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조각가 김복진과 시주자가 사망해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관심에 힘입어 1964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후 안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핑계로 해체하고는 1990년에 5년의 작업을 거쳐 청동으로 다시 주조했고 이후 2002년에 약 80kg을 들여 전체를 개금해서 금동미륵입상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하지만 청동시절이 더 근엄해보여서 나았다는 의견도 있다. 판단은 직접 해보길.

과거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일 때에는 '크기는 큰데 시멘트 미륵'이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워낙 '커다란 시멘트 미륵'으로 오랜 기간 유명했었기 때문에 아직도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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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미륵대불 시절.

5 유물

법주사 소장 유물로는 무려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유형 문화재 22점이 있다. ㅎㄷㄷ 여기에는 위에 설명된 팔상전(국보 55호), 대웅전(보물 915호), 원통보전(보물 916호) 등 가람 이외의 유물들을 정리한 것이다.[4]

5.1 쌍사자 석등

대한민국의 국보
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驪州 高達寺址 僧塔)
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한자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영어Ssangsajaseokdeung
twin lion stone lantern of Beopjusa
분류번호국보 5호
소재지대한민국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분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시설1기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통일신라시대, 553년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진 쌍사자 석등이다. 여느 석등과 마찮가지로 상부와 하단은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기둥 부분이 암수한쌍의 사자로 조각되어 있다. 두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을 위로 치켜세운 형태로 서있어서 측면에서 보면 X자 형의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쌍사자가 기둥 역활을 하는 석등은 통일신라 시기에 만들어 졌고, 법주사 외[5]에도 몇 군데 더 남아 있으나 법주사의 것이 균형미가 뛰어나고, 조각이 더욱 섬세하게 잘 보존 되어 있다. 부처님의 진리를 상징하는 석등을 사자가 높이 치켜들어 올림으로써 불법을 수호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5.2 석련지

석련지(石蓮池)는 말 그대로 돌로 만든 연꽃 연못이다. 기단부는 팔각형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잘록한 부분은 구름모양의 돌이 올라가 있으며, 그 위에 커다란 석련지가 그릇 모양으로 만들어져 올려져 있다. 옆에서 보면 와인잔과도 흡사하게 생겼다. 조성 시기는 8세기로 추정되며 안타깝게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어져 있으며 쇠를 이용해 깨진 부분을 연결해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6 기타

팔상전은 이소룡사망유희에서 나온 사망탑의 본래 모델로, 팔상전 안에서 촬영이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법주사의 불상이 당대 동양 최대였다.), 이소룡이 사망한 뒤에 재촬영-재편집되며 계획이 무산되었다. 실제로 촬영되었다면 이소룡 팬들의 성지가 되었을지도?

  1. 쌍봉사 대웅전도 있지만, 이것은 불에 타서 복원한 것이다.
  2. 捌은 '여덟 팔(八)'의 갖은자다.
  3. 27m라는 자료도 있는데, 뒤의 광배까지 더해서 계산한 높이가 33m인 것으로 추정된다.
  4. 우선은 국보 2점만 정리합니다. 추후에 추가바람.
  5. 중흥산성과 영암사지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