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대분열

본문서는 지중해 세계의 정직함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schism.gif
[1]

The Great Schism
동서 교회의 대분열

1 정의

동서 대분열은 1054년에 동방 교회(훗날의 정교회)와 서방 교회(훗날의 가톨릭)의 상호 파문으로 동서 교회가 분열되어 오늘날의 가톨릭정교로 갈라선 사건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악의 병크로 손꼽히는 중대한 사건이다. 다만, 20세기 교회일치운동의 확산 덕에 현재 동서 교회는 일단 명목상 화해한 상태이다.

이 분열은 정교회가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가톨릭이 정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서로 대등한 두 교회가 서로 갈라선 것이다.

2 배경

그 근원을 따진다면, 서로마 제국이 야만민족의 지속적 침공을 받다 결국 공중분해 되어버려 서방세계에 헬게이트가 열린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2] 여하튼 서방 세계가 개박살 난 와중에도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가며 어떻게든 생존한 서로마의 교회들은 게르만계 민족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동서 교회는 서로마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벌여진 헬게이트를 수습하는 동안에는 멀쩡히 하나의 통합된 지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서방 교회가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개종시킨 끝에 이 난장판이 수습되자 이미 로마의 동서 분리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수위권 떡밥이 또 튀어나오게 된다. 또, 이미 교리 분쟁이 일어나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등 이미 꽤나 오래전 부터 교회의 통일성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가던 상황이었다.[3][4]

또, 동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국력이 갈려나가고 있었고, 간신히 제국 붕괴의 위기를 넘기고 한숨을 돌리려던 참에, 갑자기 아랍 반도에서 이슬람이 튀어나왔다. 기나긴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에게 있어 아랍의 공격은 완전히 빈집털이와 다를게 없었다. 페르시아는 멸망하고, 동로마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아프리카, 이집트 총독부를 싸그리 영구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위기까지 겪었으나, 간신히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제국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지만. (...)

그러나, 의심쟁이 지중해판 선조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회복 노력의 결과로 이탈리아의 절반 가량을 수복하고 라벤나 총독부가 설립되어 로마를 동로마 제국이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로마 교회의 지역 성직자들이 선출하고, 라벤나 총독부에 선출을 보고해왔으며, 또한 수많은 외부 침공에서 로마가 의심병 말기에 도달한 유스티니아누스 때문에 애매하긴 했지만 동로마의 가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 간의 분열은 선을 넘지는 않고 있었다.

3 분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분열은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5세기 아카키우스 분열이나 단의론 논쟁 등을 통해 계속 쌓여왔다. 7세기 말, 레오 3세 시대의 성상파괴 운동[5] 등으로 인해 문화적인 이질감도 커져갔다.

하필 이런 좋지 않은 타이밍에 안 그래도 이탈리아를 위협하고 있던 롱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개발살 낸다. 페르시아-이슬람-총독령 대거상실 트리플 콤보로 국력이 아작난 동로마는 안 그래도 라벤나 총독부 살려놓기도 힘든 판이었는데, 성상파괴주의로 제국 내부가 분열되어버렸으니 롱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롱고바르드족들은 기어코 라벤나 총독부의 절반을 날려버렸으며, 로마까지 진군한다. 이 초유의 사태를 로마 교회는 간신히 민병대를 조직해 기적적으로 버텨낸다. 당연하지만 로마 교회는 버틸 수 없는 피꺼솟에 동방 교회에 참을 수 없는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 와중에, 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을 제패하면서 롱고바르드족도 덤으로 깔끔하게 개발살[6].

마침 카롤루스는 서로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교회들의 정보망을 이용해 지방 행정기구로 활용하였던 참이라 로마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주었는데, 로마 교회는 카롤루스를 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 지목하였고, 엉터리로 짝퉁 서로마 제위를 하나 만들어 (동로마 입장에서는) 무단 수여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바실레오스 호칭을 인정받긴 했다. 그리고 당시 동로마의 여제였던 이레네와 결혼하여 여성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및 게르만족 문화에 따라 "로마의 여제와 결혼해 로마 제위를 넘겨받는다!"는 생각으로 (동로마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정략 결혼을 시도했고 이레네도 여기에 동의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 이레네가 폐위되면서 이 시도는 무산된다.

8세기 로마-콘스탄티노플 양대 교회의 주요 분열 사건으로 포티우스 분열이 있다.

하지만, 아직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밥 먹듯이 상호파문을 하긴 했지. 비록 라벤나 총독부가 박살이 나긴했어도, 11세기 중반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대 그리스)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로마에 이리저리 간섭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될 만한 환경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풍 소빙하기 크리를 맞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남하한 바이킹들이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며 노르만인이 되었는데,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해버리고 동서 교회의 사실상 무의미해진 연결고리조차 완전히 끊어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고 만다.

결국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와 로마의 사절단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두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결정적 계기에는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던 것이 배경으로 있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카일 7세는 로마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 3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임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로마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회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내내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양자간 합의는 없었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세명의 추기경들은 어느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로마 교황의 이름을 제단에서 지워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간의 파문 사건들은 위에 말했듯 무척이나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꽤나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 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이미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4 이후

결과적으로 동서 대분열은 가톨릭이 비 가톨릭계열 기독교에게 신나게 욕을 퍼먹는 원인이 된다. 결과적으론,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 특히 오리엔탈 정교회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을 빚을 졌다. 동방 교회들, 특히 오리엔탈 정교회들은 엄청난 탄압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고 버텨내었으며, 이들의 뼈아픈 고난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존속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상하게 정직한 지중해 세계다. 뿌린 대로 거뒀다.

그런데, 가톨릭이 영구 까임권을 받게 만든 십자군 원정은 사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가 사주한 것이다. (...) 결국 저것은 알렉시오스의 낚시(...)였고, 동로마가 서방 세계의 신뢰를 영원히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콤네노스 조 내내 반복된 잘못된 외교 전략과 군사 전략[7]으로 제 2의 중흥기로 위장한 제국의[8] 황혼이 찾아온다.

물론, 십자군 원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원정이었고, 나중엔 베네치아등 돈에 눈이 먼 세력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개판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너무 가톨릭만 까지는 맙시다. 4차 십자군의 가라는 예루살렘은 안 가고 콘스탄티노플 진격은 봐줄 수가 없지만[9][10][11]

하지만 사방에 통수질은 시전한 베네치아도 4차 십자군 병크로 오스만을 키워준 꼴이었고, 결국 오스만과의 싸움 끝에 망해버린다. 역시 정직한 지중해 세계. 통수쟁이에게 가차 없죠.

13세기 이후 동로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세계 공의회를 통해 양대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5 오늘날

athenagoras-i-4.jpg

분열로부터 900년이 흐른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고 서로를 적법한 보편교회로서 인정하였다.
  1. 왼쪽은 가톨릭(로마)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고, 오른쪽은 정교회(콘스탄티노플)를 상징하는 성 안드레아다.
  2. 다만 이것의 책임을 서로마를 "포기"한 동로마에 돌리는 견해가 있는데 학문적으로 근거 없는 얘기다.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지만 이건 두 로마 제국의 주도권이 책임감 있는 황제가 아닌 자기 잇속 밖에 모르는 권신들에게 넘어간 속사정 탓이었다. 물론 스틸리코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필 스틸리코의 홈그라운드는 서로마였던 데다가 다른 정치력 있는 부하도 없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동서 로마의 협조 체제는 나름 복원되지만 반달 왕국의 대반격으로 동로마가 큰 군사적 재난을 입어 이후 더 이상 서로마에 개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코 동이 서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3. 전 교회 통합을 꿈꾸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현대에 와서야 제대로 일어난 일이다. 교회에 좋던 싫던 정치 알력이 얽힐 수 밖에 없던 옛날엔 수위권 분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4. 하지만 동방 교회들간에 수위권 타령 = 신앙적 자살(...)이 된 현대에선 저 교리 분쟁은 사실 오해(...) 였다고 결론났다.
  5. 아래에도 설명되어있었지만 동로마의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성상파괴주의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문화 및 종교 사건으로 그 특징과 파괴력이 가히 로마판 문화대혁명 급이다.
  6. 이 양반은 롱고바르드 왕국도 개발살, 색슨 왕국도 개발살, 그야말로 로마 교회의 적이란 적은 모조리 개발살 냈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려던 이슬람 세력도 개발살 냈다. (물론 프랑크 왕국의 이베리아 진출은 실패.) 게르만-북구 신화에서 신성시되는 세계수의 상징이자, 색슨족의 성지였던 이름술도 바로 샤를마뉴가 색슨 왕국을 개발살 내면서 활활 태워버렸다. 개발살 전문
  7. 물론 콤네노스조의 외교 정책은 신묘한 수준이었으나 결국 단기적으로만 좋았을 뿐이다. 알렉시오스 때부터 이미 동로마의 외교평판은 바닥을 기고 있는 판이었고 당연하지만 외교력 뛰어난 콤네노스조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다. 아나톨리아 지방 방치는 동로마의 군사력을 아작내었으며, 결국은 오스만의 발흥을 방치한 꼴이 되어 동로마가 끝장나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 돈도 없고, 군사력도 없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동로마에게 남은 것은 제국의 멸망이었다.
  8. 이 시기의 제국은 재정력은 로마 역사상 최강이었고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경지였으나, 결국 그걸 끝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9. 이건 동서 대분열보다 더 한 참사였다고 볼 수도 있다.
  10. 오스만의 발흥이 동방 무역 루트를 끊어먹어서 서유럽이 우회루트를 찾아 해매게 만들었고 이게 근대의 시작란 점을 생각해보면...
  11. 매우 흥미로운 점은, 어째서 근대의 서유럽은 흑인 민족들을 잊어버렸냐는 것이다. 중세는 분명 에티오피아와 누비아도 있고, 아바르 칸국, 카자르 칸국, 쿠만족등등 머얼리 동방에서 이주해온 듯한 수많은 유목 민족과 함께하는 역사였으며, 서아프리카쪽의 말리도 마냥 안 알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대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만이 발흥하자 이게 싸그리 잊혀진듯 (...) 심지어 이슬람권과의 교류도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역시 돈 때문이다. 중세 역사를 조금만 읽어봐도 인종차별주의는 중세만도 못한 미개한 불량 사상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