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의회

영어: ecumenical councils
라틴어: Concilium

1 개요

그리스도교에서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

사도행전 15장에서 공의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때 안티오키아 지방에서 일어난 할례, 율법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성 바르나바와 성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들이 하던 일에 대해 보고하고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야고보[1]의 주장으로 인해 할례를 하지 않고 다만 우상과 피를 멀리하자고 결의한다. 특기할 점은 이때 베드로가 회의를 결론짓고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각 지역별로 다른 점을 수정하여 하나의 교회로서 성립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대표적으로 아래 7차례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다.

2 1~7차 세계 공의회

가톨릭정교회가 모두 인정하는 일곱 차례의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처음 공의회를 소집한 이후로,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소집하였다.

#연도명칭소집자주요 사항
1325년제1차 니케아 공의회콘스탄티누스 1세아리우스파 단죄, 니케아 신경 성립
2381년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테오도시우스 1세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성립
3431년에페소 공의회테오도시우스 2세네스토리우스파 단죄, 테오토코스 논쟁 정리
4451년칼케돈 공의회풀케리아단성론 단죄
5553년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유스티니아누스 1세삼장 문제 토의, 칼케돈 공의회 교리 재확인
6680년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콘스탄티누스 4세단의론 폐기
7787년제2차 니케아 공의회이레네성상 파괴 운동 배척

2.1 가톨릭, 정교회 이외의 교파에서의 인정 여부

  • 아시리아 동방교회: 첫 두 공의회를 인정한다.
  • 오리엔트 정교회: 에베소 공의회까지를 인정한다.
  • 성공회: 추가바람
  • 루터교회: 대체적으로 일곱 개의 공의회를 모두 인정하나, 엄밀히 말하면 그 공의회에서 채택된 교리들을 인정한다.
  • 기타 개신교 계열: 대개 칼케돈 공의회까지를 인정한다.#
  • 비삼위일체파(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유니테리언 등): 인정하지 않는다. 몰몬교에서는 공의회의 교리가 신약 성서의 교리와 크게 차이가 나며, 그리스 철학에 물든 신학이라고 단죄한다.#

3 가톨릭에서만 인정하는 공의회

동서 교회 대분열 이전에 개최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빼면 모두 로마 교황이 소집하였다.

#연도명칭소집자주요 사항
8869년
870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
교황 하드리아노 2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 추방[2]
91123년제1차 라테란 공의회칼리스토 2세최초로 서유럽에서 개최된 공의회
101139년제2차 라테란 공의회인노첸시오 2세
111179년제3차 라테란 공의회알렉산데르 3세알비파 단죄, 교황 선거법
121215년제4차 라테란 공의회인노첸시오 3세왈도파, 카타리파 배척. 성체변화 정의
131245년제1차 리옹 공의회인노첸시오 4세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2세 파문
141274년제2차 리옹 공의회그레고리오 10세콘클라베 제도화, 동서 교회 합일[3]
151311년
1312년
비엔나 공의회클레멘스 5세성전기사단 해산
161414년
1418년
콘스탄츠 공의회그레고리오 12세
마르티노 5세
대립교황 폐위, 위클리프, 후스 단죄
171448년
1445년
바젤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동서 교회 합일 시도[4], 아르메니아, 시리아, 마론파와의 합일 모색
181512년
1517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율리오 2세
레오 5세
교회 개혁 시도(실패, 종교개혁 불러옴)
191545년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비오 4세
개신교 단죄, 가톨릭 교의 재확인
201869년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비오 9세교황무류성 교의 결정
211962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요한 23세
바오로 6세
개별 문서 참고

4 정교회에서만 인정하는 공의회

연도명칭소집자주요 사항
692년퀴니섹스툼 공의회유스티니아누스 2세퀴니섹스툼 공의회는 명목상 제5차, 제6차 공의회에서 해결되지 못한 교리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한 공의회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여기에서 결의된 102개조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으나 교황은 거부했다. 이에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려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오늘날 이 공의회는 정교회에서는 제5차, 제6차 공의회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가톨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정교회에서는 동서 대분열 이전 일곱 차례의 공의회만을 '세계' 공의회로서 인정한다. 한국정교회대교구의 설명에 따르면[5] 정교회는 에큐메니컬 문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세계 공의회로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이들 공의회에서 채택된 문서들은 정교회의 교리가 맞지만, 세계 공의회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설명한다.

  •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정교회) (879년-880년): 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소집.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10년 후에 개최되었으며, 이그나티우스의 사후 포티우스를 다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인정하였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또한 성자로부터'(필리오퀘)를 넣은 것을 규탄하였다.
  •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1341년-1351년): 헤시카즘 인정
  • 야시 교회 회의 (1662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파르테니우스 1세가 소집. 칼뱅주의 교리 정죄
  • 예루살렘 교회 회의 (1672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도시테오스 2세가 소집. 루카리우스의 칼뱅주의 교리 접모 시도 단죄, 정교회 신앙 고백 채택
  1. 사도 야고보가 아닌 주님의 형제 야고보
  2. 테오필로스 황제의 황후 테오도라는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었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물러나고 미카일 3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테오도라의 오빠이자 실권자인 바르다스는 이그나티오스를 추방하고 포티우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동방교회에 개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위는 바실리오스 1세에게 넘어가고, 바실리오스 1세는 서방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기 위해 포티우스를 추방하고 이그나티우스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불가리아 기독교가 서방에 속하는지 동방에 속하는지의 문제로 인해 서방교회와의 관계 개선은 물거품이 되었고, 10년 후 포티우스는 다시 총대주교로 돌아온다. 포티우스 분열은 동서 교회 대립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3.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후 미카일 8세가 참가하여 동방교회는 신경의 '또한 성자로부터' 문구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방교회의 신도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큰 소용이 없었다.
  4. 그러나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망해버렸다.
  5. 신학, 한국정교회대교구, 2016년 9월 14일 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