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Roland Glen Fingers |
생년월일 | 1946년 8월 25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오하이오주 스테우벤빌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4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자유계약 입단 |
소속팀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1968~1976)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77~1980) 밀워키 브루어스(1981~1985)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영구결번 | ||
9 | 24 | 27 |
레지 잭슨 | 리키 헨더슨 | 캣피시 헌터 |
34 | 42 | 43 |
롤리 핑거스 | 재키 로빈슨 | 데니스 에커슬리 |
밀워키 브루어스의 영구결번 | |||||
1 | 4 | 19 | 34 | 42 | 44 |
버드 셀릭 | 폴 몰리터 | 로빈 욘트 | 롤리 핑거스 | 재키 로빈슨 | 행크 애런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롤리 핑거스 | |
헌액 연도 | 1992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1.3% (2회) |
198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 |||||
스티브 스톤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피트 버코비치 (밀워키 브루어스) |
198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 |||||
조지 브렛 (캔자스시티 로열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로빈 욘트 (밀워키 브루어스) |
1974년 월드 시리즈 MVP | ||||
레지 잭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롤리 핑거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신시내티 레즈) |
1 개요
메이저리그 마무리 계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투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성 시대 팀의 뒷문을 지켰던 든든한 마무리이자, 선수 생활의 말년이었던 밀워키 브루어스시절에도 팀의 영광을 안겨준 선수다. 뛰어난 구위를 바탕으로 뒷문을 지켜낸 투수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로, 은퇴 시점에서 세이브 통산 기록 1위였으며 이를 7년간 지키고 있었다. 아울러 멋있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던 선수기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역대 두 번째 마무리 투수다.[1] 통산 성적은 114승 118패 341세이브 2.90.
2 선수 생활
2.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수호신
아버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리그 소속 야구 선수로 룸메이트가 전설적인 강타자 스탠 뮤지얼이었다. 선수로는 대성하지 못하고, 은퇴 후에 오하이오에서 철강 노동자로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난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뜬금없이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결국 철강공장에 다시 취직(...)
다행히 아들인 롤리 핑거스는 야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서 프로 구단의 주목을 받았다. 먼저 그에게 접근한 것은 LA 다저스인데, 실제로 계약금 2만 달러를 제시하며 입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핑거스는 당시 다저스에 무지막지한 원투펀치인 샌디 쿠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을 보고, 이 두 양반이 있는 한 자기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1만 3천 달러를 제시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입단한다.
초기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역할이었는데, 선발보다는 구원에서 더 잘 던지는 쪽이었고, 마침내 팀은 결단을 내려 그에게 구원 투수의 역할을 부여했다. 물론 오늘날처럼 1이닝만 막는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기고 있으면 언제든 등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8회 등판은 기본이었고, 7회 등판, 심지어 6회에 나와서 경기를 끝낸 적도 있었다.
오클랜드는 그가 구원 투수로서 제 기량을 서서히 발휘하던 무렵인 1971년부터 리그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의 지구 5연패 및 리그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한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롤리 핑거스는 매년 60경기 이상 나와[2] 120이닝 가깝게 던지면서 팀의 뒷문을 책임졌다. 그리고 1972년과 1974년까지 오클랜드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PO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1974년 월드시리즈에서는 4경기 나와 9.1이닝을 던지며 1승 2세이브를 기록해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부진했던 1971년과 1975년 PO에서 팀은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오클랜드의 수호신으로 군림하며 영광을 누렸던 핑거스는 그러나 팀의 재정이 점차 악화되면서 주축 선수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팀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FA 자격을 얻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했다.
2.2 밀워키 브루어스의 수호신
오클랜드 시절에 비해 연봉이 4배 올랐고, 고향과도 가까운 샌디에이고로 간 것은 분명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실제로 샌디에이고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문제는 이 당시 샌디에이고는 그리 강팀이 아니었다. 1977년과 1978년 두 차례 세이브 1위에 올랐지만, 샌디에이고로서는 거물 마무리를 오래 잡을 정도로 그리 한가한 팀은 아니었고, 마침낸 1980년 시즌이 끝난 후,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로빈 욘트와 폴 몰리터를 앞세워 창단 후 처음으로 강호로 도약한 밀워키 브루어스에 합류해서 핑거스는 맹활약한다. 1981년 78이닝에 나와 6승 3패 28세이브 평균자책 1.04 라는 기록을 내며 활약하며, 팀을 사상 첫 PO에 올려 놓았고, 본인은 사이 영 상과 리그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활약은 이듬 해에도 계속되어 29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또 한 번의 PO 진출을 이끈다. 그러나 이 때 부상으로 인해 1982년 월드 시리즈에는 나서지 못하는데, 이게 밀워키가 7차전 접전 끝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뒷문의 불안으로 먼저 선취점을 낸 경기가 5경기였지만, 이를 지키지 못한 것. 반면 이 때 세인트루이스에는 또 다른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마무리인 브루스 수터가 버티고 있었고, 그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1984년에도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만 38세 시즌은 1985년에 5점대 평균 자책을 찍으면서 무너졌고,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에 이른다.
3 콧수염
롤리 핑거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콧수염이다. 사실 원래는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오클랜드 시절 팀 동료 레지 잭슨이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자, 원래는 팀 동료들은 구단주인 찰리 핀리가 수염을 못 기르게 할 줄 알고, 잭슨이 수염을 밀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들도 그냥 면도를 안 해 버렸다.[3]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괴짜 구단주인 찰리 핀리[4]는 오히려 수염 기르기 콘테스트를 열었고, 필 받은 핑거스는 이 때 정말 열심히 수염을 가꿔서 핀리가 내건 보너스를 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가꾼 그의 카이젤 수염은 핑거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핀리는 아예 수염의 날(...)을 지정해 수염을 기른 관중을 무료 입장시키는 마케팅을 펼쳤다. 물론 수염 기른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었고.
밀워키에서 무너진 후, 1985년 밀워키에서 나왔을 때, 신시내티 레즈에서 그를 영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팀의 구단주인 마치 쇼트[5]가 수염은 무조건 면도한다는 규정을 내세워서 결국 입단하지 못하고 그냥 은퇴해 버렸다.
4 평가
천대받던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그보다 앞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너클볼 투수 호이트 윌헬름이 구원 투수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핑거스는 좋은 구원 투수 한 명이 팀의 우승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오클랜드의 전성시대와 밀워키의 전성 시대에 모두 핑거스가 기여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2이닝 이상 던지지는 않았지만,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마구잡이 구원 등판의 위엄도 보여줬다. 100이닝 이상은 매년 기본으로 던진 것. 통산 던진 이닝이 구원 투수 치고는 상당히 많은 1701이닝이라는 점은 그의 등판 빈도와 활용도를 짐작케 한다.
그가 개척한 구원 투수의 길은 브루스 수터가 이기는 경기에만 나간다는 개념으로 업그레이드 시켰고, 리치 고시지를 거쳐 마침내 토니 라 루사와 데니스 에커슬리에 의해 등장한 1이닝 마무리로 완성되었다. 요컨대 사실상 마무리 투수가 팀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증명한 선수. 오늘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구원 투수의 개념을 개척하는데 기여한 선수다.
빅게임에서 강했고, 구원 투수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가는 팀마다 맹활약한 선수라서 그런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다른 구원 투수들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단 두 번만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 34번은 그의 전성 시대를 함께 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밀워키 브루어스 모두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 최초는 너클볼러인 호이트 윌헬름인데, 너클볼이라는 유니크함 때문에 마무리 투수의 시초라기보다는 차라리 불펜 에이스의 시초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 ↑ 1971년만 48경기였다.
- ↑ 그렇게 해야 구단주가 집단으로 반항한다고 생각하고 면도를 강제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 ↑ 지명타자제도의 도입, FA 제도 당시 모든 선수를 FA로 풀자는 파격적인 제안(소수의 선수만 풀리면 몸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차라리 매년 모든 선수를 FA로 풀어서 연봉 상승을 막자는 의도였다.), 볼넷을 볼 셋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한 인물이다.
- ↑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 구단주로 팀의 중흥기를 만든 주인공이지만,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기도 하다. 별명은 여자 스타인브레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