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하워드 브루스 수터(Howard Bruce Sutter) |
생년월일 | 1953년 1월 8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펜실베이니아주 랜캐스터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1년 자유계약 입단(시카고 컵스) |
소속팀 | 시카고 컵스(1976~198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981~1984)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85~1988)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영구결번 | |||||
1 | 2 | 6 | 9 | 10 | 14 |
아지 스미스 | 레드 셰인딘스트 | 스탠 뮤지얼 | 에노스 슬로터 | 토니 라 루사 | 켄 보이어 |
17 | 20 | 24 | 42 | 45 | 85 |
디지 딘 | 루 브록 | 화이트 허조그 | 브루스 수터 재키 로빈슨 | 밥 깁슨 | 어거스트 부시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브루스 수터 | |
헌액 연도 | 2006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76.9% (13회) |
1979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 |||||
게일로드 페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브루스 수터 (시카고 컵스) | → |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
1 개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를 주름잡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구원 투수.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구원 투수 중에서 최초로 선발 경험 없이 오직 구원 투수로만 등판한 선수다. 통산 성적은 68승 71패 300세이브, 2.83 ERA, 1042.1이닝, 861K, K/9 7.94, BB/9 2.18, K/BB 3.64, HR/9 0.79를 기록했다.
2 선수 생활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워싱턴 세네터스로 부터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결국 1971년 자유계약으로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다. 컵스에서 5년간 마이너 생활을 마친 후, 1976년에 데뷔했는데, 데뷔 시즌부터 맹활약했다. 이 당시 마무리 투수는 1이닝만 막는 현재의 형태가 아니라, 승패가 넘어갈 수 있는 고비에 나와서 경기 끝까지 책임지는 형태였다. 그래서 수터는 마무리로 뛰었지만, 매년 80이닝 이상을 던졌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80이닝을 넘게 던진 시즌이 딱 두 번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무리의 패러다임이 달랐던 시대에 뛴 것.
가장 위력적이었던 시즌은 1979년으로 이 해 다소 마구잡이로 기용하던 마무리 기용법을 이기는 경기에만 기용하기로 한 허먼 프랭크스 감독의 결정으로 인해 이기는 경기에만 나오면서 6승 6패 37세이브를 기록, 이 해 사이 영 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에도 세이브 1위를 달성. 하지만, 컵스는 부상도 은근히 많았던 그를 그다지 탐탁치 않아 했는지, 어이없게도 그를 철천지 원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트레이드시켰다. 이 트레이드는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많이 던진 탓에 좀 흔들리는 경향은 있어도 1980년대 초반에도 정상급 마무리로 군림한 것이 브루스 수터였다. 세인트루이스 감독이었던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그를 평해 구원 투수계의 샌디 코팩스라고 칭한 것처럼,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마운드를 지켜냈다. 그 결과는 1981년, 1982년, 1984년 세이브 1위. 특히 1984년에는 세이브 기록 타이를 달성하기도 했다.[1]
1984년을 끝으로 자유계약 자격을 얻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이적했지만, 그의 전성기는 끝이 나고 있었다. 어깨 부상을 입으면서 고전한 것. 결국 브레이브스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988년 은퇴했다.
3 스타일
그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2이닝 이상, 필요하다면 3이닝도 막아내는 구원 투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3시즌이라는 짧은 커리어와 다소 적어보이는 300세이브 기록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는 투수 분업화가 보편화되는 1980년대 말 이후로는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이런 유형의 구원 투수 중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수터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스플리터다. 그의 스플리터는 역대 최고의 스플리터로 평가받으며, 스플리터를 대중화시킨 최초의 선수였다. 처음 그가 스플리터를 본격적으로 주무기로 쓰자 사람들은 마구라고 난리를 쳤다고 할 정도. 원래 스플리터의 별명이 마른 스핏볼[2]이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야구 전문 기자 롭 네이어가 평가하기로는 역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플리터/포크볼 계열의 구사자.
다만, 스플리터가 몸에 무리가 많이 투구 구종이라는 속설 때문인지 선수 생활 말년에 부상이 잦았다. 어깨 부상으로 수술 3번, 무릎 부상으로 역시 수술 3번, 팔꿈치 수술 한 번, 등 부상으로 또 한 번 수술(...) 덕분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투수들이 15년 정도는 뛰는 편인데, 수터는 딱 12년을 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나마도 말년은 많이 뛰지도 못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및 영구결번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구원 투수들에게 짠 기자들의 성향 때문에 애를 먹었다. 분명 압도적인 구원 투수이고, 스플리터를 대중화시킨 투수였으며, 단순한 1이닝 마무리는 아니었던 선수지만, 뛴 기간이 짧았고, 한 팀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는 점이 감점 요인이 된 듯.
이 때문에 은퇴한지 18년이 지난 2006년에 13번째 투표만에 간신히 입성에 성공했다. 입성 당시 투표율도 76.9%로 턱걸이. 사실 이도 당시 경쟁자들이 거의 없다시피한 사정 때문에 가능했다. 왜냐면 그 이듬해 등장하는 양반들이 칼 립켄 주니어와 토니 그윈(...) 만일 이 해 못 들어갔으면, 2008년 마지막 투표에서 간신히 들어갔거나, 정말 아예 못 들어갔을 듯.
컵스에서 버림받은 기억도 있고, 또 생애 유일한 우승 반지를 안겨준 팀이자 세이브 1위를 세 번 차지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2006년 9월 17일 그의 등번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그의 등번호가 42번이라는 점인데, 그의 입성 전에 이미 재키 로빈슨의 영구 결번이 되어 세인트루이스는 42번을 동시에 결번 처리했다. 이로서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세명에 불과한 42번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되었다.[3]
5 그 외
2011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면서 1차전 홈경기를 갖게 되자 시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