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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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
(Jack Roosevelt "Jackie" Robinson)
생몰일자1919년 1월 31일~1972년 10월 24일
국적미국
출신지조지아주 카이로
출신학교UCLA
포지션2루수, 1루수(루키시절)
투타우투우타
소속팀니그로리그 - 캔자스시티 모나크스(1945)
인터내셔널리그 - 몬트리올 로열스(1946)[1]
메이저리그 - 브루클린 다저스(1947~1956)
1947년 메이저리그 신인왕
재키 로빈슨
(브루클린 다저스)
알 다크
(보스턴 브레이브스)
1949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재키 로빈슨
(브루클린 다저스)
짐 콘스탄티
(필라델피아 필리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재키 로빈슨
헌액 연도1962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7.50% (1회)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
No.42[2]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재키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내게 유니폼을 주고, 내게 등번호를 준다면, 내 배짱을 드리겠다.

ㅡ 영화 42에서, 브랜치 리키(해리스 포드 분) 다저스 단장이 반격하지 않는 배짱있는 선수를 원한다는 말에.

1 소개

그를 위한 노래도 있다.. ㄷㄷ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미국을 바꾼 사나이

미국 프로야구 사실상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3] 1947년 그의 데뷔는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기 16년 전이고, 선거 관련 법안을 제정하기 18년 전이며, 미군에서 흑인을 전면 받아들이기로 결의한 것보다 1년 빠른 일이었다.[4]

UCLA 출신으로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등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났다. 재키 로빈슨의 형 매튜 매킨지 '맥' 로빈슨도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200m 은메달리스트 출신이지만, 두 형제 모두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장교로 복무해 참전했지만 역시 인종차별과 맞서다가 면직 당하기도. 그리고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2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

흑인 선수를 데뷔시키고자 했던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5]에 의해 발탁되어 1947년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다[6]. 초기에는 4월 한달에만 두자리수에 가까운 몸에 맞는공[7]에 타석에서 1루에 갈때마다 상대팀 1루수의 발길질에 시달려야했고, 수비할때도 1루로 달려오는 타자가 로빈슨의 발목을 공격하는 일도 수차례 있었으며[8], 심판도 은근슬쩍 로빈슨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고, 언론들도 로빈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검은 파괴자", "검은 타이 콥"이라는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고, 동료들로부터도 따돌림 당했지만, 피 위 리즈의 포옹 사건 이후[9][10]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그를 진심으로 포용하게 됐고, 결국 로빈슨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유색 인종들이 활약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열었다는 것이 보통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단, 이후 공개된 인터뷰 등에서 피 위 리즈와의 어깨동무 일화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관련 근거들도 꽤 신빙성이 있어 이 미담들에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흑인이라고 비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감안해서 볼 여지가 있다.

아무튼 이런 일화들과는 상관없이, 그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도 유명했으며, 여러모로 미국의 흑인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인종차별의 벽을 깨부순 심볼로서의 의미가 너무 강해서 조금 언급이 덜 되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런거 다 떠나서 야구장 내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어마어마했다. 2루수로 맹활약하면서 신인상(1947)과 시즌 MVP(1949)도 수상했고, 팀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월드시리즈 우승(1955)에도 기여하며 다저스의 뉴욕 전성기를 이끌었다. 통산 출루율이 4할이 넘고 wOBA가 4할을 넘으며 커리어 10년만에 WAR 57을 넘는 선수. 단 10년만을 활약했지만 그가 기록한 스탯은 역대 최고의 2루수 퍼포먼스를 논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으며 누구에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관련 내용은 링크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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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밴 채프먼과의 화해(...)장면.[11] 뭔가 떠오른다면 기분탓이다.

메이저리그에 28세에 데뷔해 통산 10시즌을 뛰면서 1382경기에 출전해 1518안타 137홈런에 타/출/장 .311/.409/.474을 기록했다. 특히 통산 BB-K가 740:291로 시즌 평균 29개의 삼진 밖에 당하지 않는 뛰어난 넘사벽급의 선구안과 컨택트를 과시했고, 2루수 수비도 뛰어난 선수였다. 메이저리그에 늦게 데뷔했지만 그것이 무색할만큼 대단한 실력의 선수였다. 훌륭한 성적임에는 틀림없지만 늦은 나이에 데뷔한지라 누적성적은 다른 명전 멤버들에 비해서는 확연하게 손해를 본 건 사실. 그러나, MLB의 모든 유색인종 선수의 시작점이라는 상징성과 그 무게를 이겨냈고, 결국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 첫 해에 77.5%의 득표로 입성했다.

3 은퇴

브루클린 다저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로빈슨은 1형 당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경기력도 현저하게 떨어져 선수생활에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다저스는 경기력이 떨어진 로빈슨을 라이벌인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했지만 본인이 고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은퇴 2년 전에 커피 체인인 Chock full o'Nuts의 사장과 1957년 시즌 후에 은퇴를 하고 체인의 이사 자리에 취임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고 후일 공개된 은퇴 사정에서는 밝히고 있다.

다만 이 시기에 후배 선수의 잠재력을 발굴했는데, 바로 샌디 쿠팩스 옹 되시겠다. 그는 쿠팩스의 잠재력을 보고 중용하려고 했지만, 이 시기 쿠팩스가 그냥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막장이었던지라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앨스턴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은퇴 이후에는 사업을 하면서 흑인직원 고용, 직업훈련교육 지원등 흑인 일자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특히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 당했던 차별 때문에 흑인인권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지병이 되어버린 당뇨병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4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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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수 시절 뛰었던 등번호 42은 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지 정확히 50년이 지난 1997년 4월 15일에 셰이 스타디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뉴욕 메츠 전에서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다저스의 존재감은 언제 어디에서나.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그의 불꽃같았던 야구인생을 기리고 있다.

단, 1997년 시즌 당시에 이미 42번을 달고 있던 선수는 예외적으로 42번을 계속해서 달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선수들 중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한 2013년 시즌 종료 후에야 전구단 영구결번이 완성되었다.

1997 시즌 MLB 전체 구단은 유니폼 소매에 재키 로빈슨 데뷔 50주년 기념 패치를 붙이고 시즌에 임했다. 상술됐듯, 로빈슨은 다저스의 연고지 이전을 강력히 반대했던지라 결국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뉴욕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에서 행사를 가졌다. 또한 미망인 레이첼 여사는 LA로 가버린 다저스보다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역사를 잇고 있는 뉴욕 메츠에 더 마음이 간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로도 뉴욕 메츠는 '재키 로빈슨 재단'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구단에서 영구결번된 선수로는 재키 로빈슨 외에 NHL웨인 그레츠키의 99번이 있다.

이외에도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올리자는 이야기가 논의되었으나, 재키 로빈슨의 딸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5 재키 로빈슨 데이

원래 모든 선수들이 42번 저지를 입고 나오는 재키 로빈슨 데이의 아이디어가 나올 당시,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었다. 당시 한참 인종차별 협박에 시달리면서 경기에 나오던 재키 로빈슨이 "다음 경기에도 나오면 42번, 너 총으로 쏴버린다."는 정체불명의 살해협박을 받고 고통받을 때, 동료였던 외야수 진 허만스키(Gene Hermanski)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르겠지?"라는 말로 농담을 하며 로빈슨을 격려해준 일화가 시작이었다. [12]

이후 수십년이 지난 2007년 켄 그리피 주니어4월 15일에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42번 저지를 입는 것을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건의하여 실행했던 데서부터 시작, 이후 각 팀의 흑인 선수 한 명에게 4월 15일 경기에 42번을 입고 뛰게 하도록 하다가 현재는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 이 날만은 모든 선수와 코칭 스탭, 그리고 심판까지 등번호 42번 저지를 입고 경기에 임한다.[13]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6 영화 「42」

영화 42 항목 참조.

  1. 메이저리그로 본격 데뷔하기 전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이 인종차별이 덜한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다. 이런 인연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97년 이전에 이미 42번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2. 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양해를 구한 후 2006년 명예의 전당에 13수(...)만에 입성한 브루스 수터의 등번호 42번을 재키 로빈슨과 함께 공동 영구결번 처리를 하였다. 이후 뉴욕 양키스 역시 2013년 은퇴를 선언한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 42번을 공동 영구결번 처리를 하였다. 이로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42번 영구결번의 주인공은 단 세명뿐이다.
  3. 왜 사실상이냐면, 미국 야구의 태동기인 1870년대에 몇몇 팀에 흑인 선수가 있었기 때문. 내셔널리그 소속인 당시 시카고 컵스의 스타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캡 앤슨이 우연히 다른 리그의 팀과 연습경기를 하던 중 이를 알고 흑인 선수를 추방하기위해 주동적으로 나서서 내셔널리그에서 흑인 선수의 계약을 금지하는 구두합의를 했다.(그 밖의 일화는 여기 참조) 그리고 시카고 컵스는 그 저주를 받아 100년 넘게 우승을 못 하는 중
  4. 말이 결의지 미군에서 흑인을 받아준게 해리 S. 트루먼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5. 미국 프로야구의 역사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팜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최초의 흑인 재키 로빈슨 외에, 최초의 중남미 선수 등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 그야말로 트인 사고를 가진 만능의 천재로 야구 외에도 능해서 수많은 자격증의 보유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브랜치 리키 항목 참조.
  6. 재키 로빈슨보다 더 실력은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고 브랜치 리키도 공인했지만, 재키 로빈슨의 최대 장점은 붙임성과 스스럼 없는 성격이었다. 위대한 타자이자 스즈키 이치로 이전 단일시즌 안타 신기록을 갖고 있었고 은퇴 후 스카우터로 활동하던 조지 시슬러에게 브랜치 리키는 무엇보다 정신력이 강한 선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시슬러가 데려온게 재키 로빈슨이었다.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래리 도비가 속으로 냉가슴만 앓는 성격이라 더더욱 고생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장점이었을 것이다.
  7. 상당수가 헤드샷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헬멧도 없던 시절.
  8. 영화 42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노스 슬러터가 로빈슨의 발목 뒷부분을 스파이크로 찢어내는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참고로 이 에노스 슬러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카디널스 선수들을 선동해서 다저스와 경기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그러나 뒷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이딴 천하의 개쌍놈도 명예의 전당행이라니...
  9. 자세한 내용은 피 위 리즈 항목 참조바람.
  10. 또한 브루클린 다저스의 명감독이자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명언을 남긴 레오 듀로셔 감독이 로빈슨을 거부한 팀원들을 향해 '난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해.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잘해야 니들 연봉도 오른다는 거야, 멍청이들아.'라며 일갈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사실 여러 일화를 통해 추리해 보자면 듀로셔 감독은 흑인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진짜로 재키 로빈슨이 흑인이든 뭐든 경기만 이기면 장땡이었을 사람이라….
  11. 필라델피아의 감독 겸 선수였던 밴 채프먼이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중에 재키 로빈슨에게 온갖 모욕을 줬고, 이것에 대해 여론의 반발이 일어나자 재키 로빈슨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이다...라고 할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진기자 및 여론에 "이거 봐봐. 난 재키 로빈슨과 화해했음. 이제 그만 좀 X랄들 하세요."라는 뜻의 보여주기 식 행사였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채프먼은 흑인과 손을 맞대기 싫어해서(...) 재키 로빈슨은 채프먼의 손 대신 그가 들고 있는 방망이를 붙잡고 있다. 전기영화 42에서 이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고 바람. 여담으로 전기영화 42의 후일담에 의하면 밴 채프먼은 1948년 감독직에서 짤린 이후, 다시는 감독이 되지 못했다고. 단지 영화 42 내용대로면 방망이로 악수를 대신하자고 제안한건 재키 로빈슨 본인으로 농담 겸 배려였던걸로 보인다.
  12. 물론 당시 로빈슨은 혼자 흑인이었으므로 몰랐을 리는 없다...
  13. 다만 게임데이나 전광판에는 투수도 42번, 타자도 42번이라 헷갈리기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