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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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左)와 루키우스 베루스.루키우스 베루스는 당시 미남으로 추앙받았다. | |
이름 |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태어날 당시 ~ 입양 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입양 이후 ~ 즉위 전)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베루스 아르메니아쿠스(황제) |
친부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1] |
배우자 | 루실라 |
생몰년 | 130년 12월 15일 ~ 169년(로마) |
재위기간 | 161년 3월 17일 ~ 169년 |
매장지 | 이탈리아 로마 하드리아누스 영묘[2] |
Lucius Verus
1 개요
로마제국의 오현제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황제이지만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인물. 황제로서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재위기간은 161년 3월 17일부터 169년까지 였으며 공동황제는 의형제[3]이자 장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 황제가 되기 전 생애
2.1 입양 전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자 후계자 겸 공동황제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130년 12월 15일 태어났다.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였으며, 8세가 되던 해인 138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뒤, 새로운 후계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선정되어 하드리아누스와 입양관계를 맺을 때,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4]와 함께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
2.2 입양 후
본래 루키우스 베루스의 약혼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었던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소 파우스티나)였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난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하자 그 약혼은 파기하였다[5]. 동시에 그의 누나였던 케이오니아 파비아 역시 13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138년 파혼당했다.
(소년 시절의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가 되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양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그의 교육에 있어서는 사위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동등하게 대우했다.[6] 그래서 이들은 함께 당대 최고의 명사이자 웅변가, 문법학자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특히 그는 이때 스승으로부터 시를 쓰는 능력과 웅변에세 훌륭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또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그에게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린 로마 엘리트 공직코스를 두루 거치게 했다. 23세에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24세의 나이에 첫 번째 집정관을 지냈으며 양부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한 161년에는 형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파트너로 삼아 두 번째 집정관을 지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자신의 양아들들을 늘 끼고 다녔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생활한 적도 없었고, 군단 경험도 없었다.
3 황제 즉위
본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자신의 후계자이기보다는 넘버3로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후계자로 생각하였다.따라서 그가 소(小) 파우스티나와 파혼한 이후에도 루키우스는 31세가 될 때까지 다른 신부감을 정해주지 않았고, 독신으로 살았다. 성격 역시 본래 선량한 성격인데다 유쾌하고 뛰어난 교양은 갖추고 있었고,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진지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장남같은 묵직한 성격을 가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비되었다. 또한 본인이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며 원망과 증오심을 갖기보다는, 형이니까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상황을 즐기며 낙천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도 사이가 아주 돈독하여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궁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노환으로 잠자듯 편안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자 형 마르쿠스와 함께 국장을 함께 치뤘다. 이때 원로원에서는 그를 단순한 넘버2이자, 아들로서 해야할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유해가 화장되어 유골이 항아리에 담겨 영묘에 안치된 뒤에는 이 모습이 자신들의 예상과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신격화가 통과된 이후, 원로원 회의장에서 거행된 황제 취임식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 취임을 요청받은 것은 본인 뿐만 아니라 동생 루키우스도 함께라고 발표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베루스의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이들은 관례대로 선(先) 사양, 후(後) 승인 형식대로 요청을 받아들여 공동황제로 즉위했다[8].
4 외모
(수염을 기르기 전의 모습)
독신황제였기에 로마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비록 좁은 이마를 가지고 있는게 흠이었고 갸름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수염을 턱 전체를 걸쳐 길렀지만, 당대 미남이라고 불린 친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갸름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메리트도 있었다.
5 황제로서의 치세
5.1 파르티아 전쟁
161년, 즉위한 해부터 흉작을 경험하여 밀 생산 및 공급, 포도와 과일, 채소 재배에 있어서의 타격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거기에다 가을부터는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홍수까지 심해서 더 힘든 상황에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전쟁도 준비해야만 했다.
둘 다 군대 경험도 없었고 이탈리아 밖을 나간 적도 없는 상황에서 맨먼저 한 것은 파르티아의 공격으로 1개 군단을 잃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후임을 지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명의 황제가 한 행동이 최악이었던 것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자 이곳의 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자를 카파도키아로 보내 구멍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리스쿠스의 후임을 다시 지명해야만 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임명하고 고지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담담하는 속주총독에는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를 임명해 공백을 메꿨다.
그런 상황에서 파르티아 군을 이끌고 있던 볼로가세스3세는 목표를 시리아 속주로 바꿔 공격했다. 이에 총독인 코르넬리아누스가 반격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퇴각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뒤이어 동방의 동맹국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파트너이자 31세의 젊은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 전선에 파견했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입장에선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대로 "루키우스는 육체적으로 튼튼하고 나이가 젊어서 전선을 지휘하기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를 떠난 건 162년 초여름이었는데, 이마저도 반도 끝 브린디시로 가는 도중 루키우스가 카누시움에서 병으로 쓰러져 늦어지고 말았다[9]. 다행스러운 것은 병의 원인이 너무 놀아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는 4일 동안 푹 쉰 다음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동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마저도 루키우스 베루스가 안티오키아로 직행하기보다는 그리스 반도의 코린트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향하며 더 늦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루키우스 베루스는 32세의 생일을 아테네에서 편안하게 보내고 에게 해 일대의 섬들을 관광하며 느긋하게 소아시아 해안가의 에페소스, 밀레투스를 거쳐 겨울이 돼서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시간을 질질 끌며 여행을 느긋하게 즐기는 동안, 새로운 총독 시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서둘러 영국에서 터키 동쪽 끝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 패잔병들을 다독이고 전력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루키우스 베루스였다. 그는 온갖 환영식을 참석하고 제국 동방을 여행하며 늦게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이후에도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장군들과 가진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해서 루키우스 베루스와 신임 총독 리보 사이에 의견차이마저 생겨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시리아에서 새로운 애인을 만나 연애를 즐기느라 일찌감치 작전회의에서 제외되고, 총독 리보마저도 시리아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는 것이다[10].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보낸 수행원들은 황제와 총독을 제외시키고 재빨리 작전회의를 진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키우스가 노는 사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망한 총독 리보의 후임으로 율리우스 베루스를 임명하여 파견하고 반격을 펼쳤다. 그 결과, 프리스쿠스의 반격을 시작으로 하여 로마군은 163년 봄부터 공세를 펼쳐 아르메니아 수도까지 진격하여 파르티아군을 쫓아내고 파르티아가 앉힌 파코루스 왕자를 쫓아내고 소파에무스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163년 말에는 완전히 파르티아 군을 내모는데 성공했다.
(글레디에이터에서도 나오는 콤모두스의 누나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아내 루실라)
전쟁이 2년째 접어든 164년 루키우스 베루스는 배를 타고 이오니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에페소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형제이자 공동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4살 된 큰 딸 루실라와 결혼식을 올렸다[11]. 결혼과 동시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방에 왔을때 사귄 그리스 미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결혼생활을 별 문제없이 이어나갔다.
결혼 이후 루키우스 베루스는 1년차 전쟁때와 달리, 황제임을 내세워 전략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장군들에게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자고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도 이기고 있고 장군들이 반대했기에 결국 그 제안은 쏙 들어가고, 새로이 국경강인 티그리스 강을 넘어서 파르티아 영토를 공격하고 철수하는 전략으로 수정되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특히 이때 시리아 출신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맹활약해서 파르티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것으로 파르티아 왕국은 전력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60년 뒤 파르티아보다 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대두의 원인이 되고 만다. 황제가 말할 때 들었어야지
166년 10월, 전쟁이 끝난 뒤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실라와 귀국하여 파르티아 전쟁 승리 기념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는 49년 만에 열린 개선식이었다.
6 사망
(루키우스 베루스의 도안이 담긴 금화)
파르티아 전쟁 이후 2년(166 ~168)까지는 로마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도나우 강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168~169년에 걸친 겨울동안 아퀼레이아에 머물렀다. 당시,황제 일행이 겨울에 도나우 강 전선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역병이 만연해있어 황제들이 역병에 감염될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었다[12].
169년, 봄이 되자 루키우스는 수도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황제 일행이 100km 떨어진 알티눔에 온 무렵, 루키우스 베루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3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도나우 전선에 퍼져있던 역병에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뇌졸중을 의심하고 있다[13].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실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명의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고 한다.- ↑ 또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고도 한다.본명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하드리아누스와 양부-양자 관계를 맺었다.
- ↑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청 성채로 개조되어 현재는 카스텔 산탄젤로라고 불린다.
- ↑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어린 시절 입양관계를 통해 역시 입양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형제지간이 되었다.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명
- ↑ 소(小)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하였고, 결혼하였다.
- ↑ 하지만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공식적인 제왕수업은 받지 않았다.
- ↑ 이때 마르쿠스는 3번째 집정관 경험이었다.
- ↑ 이 사건은 로마 제정 역사상 최초였다. 그래서 이를 예상하지 못한 원로원은 당황했다.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생을 아피아 가도의 중간 지점인 카푸아까지 동행했지만 이 보고를 받은 뒤, 말을 타고 카누시움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 ↑ 리보는 결국 현지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병사하고 만다.
- ↑ 이 결혼은 정략결혼인 동시에,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삼촌과 조카의 결혼이었다.
- ↑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루키우스 베루스를 붙잡기 위해 차선책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 ↑ 실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생활은 화려하고 굉장히 불규칙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