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로마의 역대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13대 트라야누스14대 하드리아누스15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5현제 목록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름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Hadrianus)
출생지로마제국, 이탈리카
생몰년도76년 1월 24일 ~ 138년 7월 10일
재위기간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rii)
로마 제국 최전성기의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정식 명칭은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1 개괄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속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의 도시 이탈리카[1]에서 태어났다.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와 동향인데다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외사촌관계였다.[2]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후 의심스러운 과정[3]을 통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절반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점검하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다. 하드리아누스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부분[4]에까지 손을 댄 선견지명이 있는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예방조치 덕분에 로마는 흔들리던 시기에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열렬히 심취[5]해 있었고, 동성애자였으며,[6]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다.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2 즉위 이전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76년 1월 24일에 이탈리카에서 출생했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은 오랜 세월동안[7] 히스파니아에 정착했던 가문이지만, 아버지 푸블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법무관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트라야누스에게 그의 미래를 부탁했고, 트라야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여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당시 트라야누스는 대대장에 불과했고,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대단한 선견지명을 발휘한 셈이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4살 되던 때 그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였고,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8]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제위에 오른 네르바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는 동시에 후계자로 임명한 후 병사했다.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단숨에 로마 황제의 최측근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전쟁을 치루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쟁에 참가하여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확장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정책을 의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9] 결국 트라야누스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아내였던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년 8월 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한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된다.

단, 이 과정에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여러 차례 내비쳤으나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지는 보여준 적이 없었으며,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동시에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이 의혹은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 트라야누스의 측근들이 일으킨 반란 기도로 이어지며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다.

3 즉위 이후

즉위 이후 하드리아누스트라야누스의 확장정책을 중단하고 방위 우선 정책으로 제국의 기본기조를 변동시킨다. 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수도 로마에 머무르지 않고 곳곳을 돌아 다니며 제국의 방위체제와 행정체계를 재정비했다. 121년부터 시작된 그의 순행은 제국 곳곳에 발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시행한 확장정책은 제국의 판도를 상승시키는데 큰 공헌은 하였으나, 공격 위주의 정책 시행으로 말미암아 제국 내부의 이완과 균열이 가시화 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제국 곳곳을 순행했고, 행정을 바로잡고 군단을 시찰하며 문제점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러한 그의 공적은 당대에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강화된 군단과 잘 정비된 행정 체계로 인해 제국의 위기를 어느 정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대단한 선견지명과 넓은 시야로, 군주로서의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평가를 잘 받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브리타니아(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자주 내려와서 깔짝대자 그 경계에 거대한 장성, 즉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하드리아누스 대제가 122년 브리타니아 시찰 도중 내린 명령에 따라 5년여의 공사 끝에 완성한 폭 3m, 높이 5m의 장대한 성벽이다. 섬의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장장 118km를 거의 일직선으로 건축됐다. 장성에는 모두 15개의 요새를 설치했고, 요새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00∼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북방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또 성벽 바깥으로는 폭 8m, 깊이 2.5m의 해자까지 둘러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로마제국 쇠퇴 후에는 잉글랜드가 이 장성을 1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정치적 독립을 향유했고 전통문화도 지켜냈다. 그렇긴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그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어 로마시대의 축성술과 군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찰과 여행은 그의 체력을 빼앗아 갔다. 40대의 한참 나이에 즉위했고 사자 사냥을 취미로 여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제국 변경 시찰에 쏟다 보니 자연히 가혹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었고[10], 그것은 그의 체력을 확실히 약화시켰다. 결국 재위 기간 발생한 유대 분쟁 직후 티볼리의 황제 별장으로 돌아왔고, 138년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지명하고 티볼리에서 병사했다.

4 유대인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반란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있을 때 뒷통수를 친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비유하자면 일본이 서울을 점령하고서는 서울의 이름을 아마테라스 진구로 바꿔버린 꼴인데,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단,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하드리아누스 책임으로만 지나치게 뒤집어 씌우는 건 다분히 이야기적인 서술이지, 역사적인 엄밀한 내용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 특유의 디아스포라 성향은 그 전에도 강했으며,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로마인으로 동화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한편, 역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서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기존 로마인들도 많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이후 로마 제국이 계속 엄수하진 않았고, 이후에도 예루살렘엔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긴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대 문제를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5 성격 및 기행

그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럽다'했다고 한다. 나중에 늙었을 때는 '노친네 성격 한번 드럽게 까칠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11]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성격임에는 분명한 듯. 사실 어렸을 때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던 것도 그의 까칠한 성격이 한 원인이었다. 이런 성격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청난 실력이 기반이 되어있었다. 문학, 수학, 기하학, 회화, 악기 등에서 초일류였고 무예에 굉장히 능했다. 로마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은 매우 드물다.[12]

건축가로도 뛰어났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은 판테온은 그가 착안해 설계한 것이며[13][14] 티볼리에 지은 광대한 별장에도 그의 취미나 미적 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뒤에서 설명하듯 하드리아누스는 엄청난 그리스광이었는데, 황제 권력을 이용해서 아테네에 도시 하나를 지어서 바쳐버렸다. 이후 자기가 지은 신도시와 원래 도시를 구별하는 지점에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의 도시,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도시라는 개선문을 만드는데, 허영심이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15] 이 신도시지역은 오늘날에도 아테네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플라카 지역으로, 이곳에 그가 만든 개선문과 아고라의 유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가까워서 사람들은 이곳도 그냥 고대 그리스때 도시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안습;; 아드리아노플[16]도 그가 지어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로마 엘리트 중에서 가장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었으며, 덕분에 그리스 철학에도 꽤 뛰어난 학문적 식견이 있었다.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17] 네로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지만, 네로는 취미에 매몰되어 국정을 소홀히 한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굳이 흠을 잡자면 티볼리에 엄청난 돈을 들이부어 별장을 지은 정도. 다만 그가 평소에 제국 운영에 쏟아부은 열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애교라고 봐줘도 될 듯하다. 때문에, 이후 로마 황제들은 수염을 기르는 황제들이 많아지게 된다.[18] 한마디로 엄친아.

단 제국 내 최고 대학인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벌여 그들을 제압했다는 일화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매우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이는 오히려 하드리아누스 특유의 성격적 결함을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거기 있던 학자 중 하나는 "토론이란 등 뒤에 30만명이나 되는 군대가 있는 남자가 늘 이기는 거라고" 훗날 진지하게 언급했었는데, 이는 단순한 볼멘 언급이 아니다. 철학 부분에서 당대 지식인 평균을 웃돌긴 했으나 석학급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만심과 허영심이 대단히 강한 하드리아누스가 권력으로 토론회를 열어 학자들을 찍어눌러 잘난척했던 것이 진상이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12사도와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말년의 판단력이 좀 흐려진 콘스탄티누스조차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자기 학식을 전문가 집단에게 과시하진 않았었다. 특유의 파시즘적 성향 탓에 상당한 지식인 혐오 경향이 있는 시오노 나나미가 이 일화를 왜곡해서 잘못된 인식이 있는데, 이런 식의 서술은 하드리아누스에게 잘못된 편견만 가중시키게 될 수 있으므로 문제가 크다.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조선 정조처럼 정말로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던 군주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고 동성애자였다고 한다[19]. 당장 영문위키에만 가도 대놓고 그리스적 사랑[20] 같은 말이 가득. 그는 123년 클라우디오폴리스(현 터키의 볼루)를 여행하던 중 안티노우스(안티누스)라는 청년과 만난 후 연인관계가 된다. 제국은 순회할 때에도 안티노우스를 늘 동행하고 다녔다고. 그러다 130년 이집트에서 그가 죽었을 때 이집트에 안토니오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워줬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안티노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었는데, 마침 이집트에선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라는 믿음이 있는 걸 안 하드리아누스는 즉시 안티노스를 신으로 삼아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안티노스 신앙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더해 안티노스를 조각한 석상은 제국 전역에 뿌렸다.제국 전역을 시찰할 때마다 보기 위해서 였던 듯? 정확히 말해 황제가 명령했을 수도 있지만 안티노스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가 죽고 나서 냉혹하고 까탈스럽고 땡강이 심한 것도 큰 원인일지도. 지금도 세계의 아무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안티우노스 석상은 늘 함께 둔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가 연인관계였고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를 진심으로 아꼈다는 건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들은 매우 많지만, 정작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나 연인 관계가 되었고 그 후 관계가 어떠했고 등에 대한 내용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안티노우스의 죽음도 사실 미스테리다. 하드리아누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끌려가 질식사했다는 식으로 결론내고 안티우노스 신앙을 퍼트렸지만, 안티노우스가 타살되거나 자살했다는 의혹도 많다. 가령 황제와 안티노우스의 친밀한 관계를 질투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식. 하드리아누스와안티노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는 오시리스 축제기간이였는데, 하드리아누스가 큰 병에 걸리자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현지 믿음을 듣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안티노우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인신공양을 증오해 제국내에서 완전히 금지했다는 것들을 보면 둘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1] 안티노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이유는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제거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무레도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인간 내력은 별 도움이 안되는 데다, 안티노우스와의 사생활은 자신의 기억과 추억만으로 충분하다고 봤을 수도.

자신은 비비아 사비나(Vibia Sabina)[22]라는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을 2명이나 입양했으나 친자식은 없었으며 '자식 새끼 있어봤자 머리만 아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황후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위에 언급된 안티노스보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비중이나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황제는 그래도 역시 당대 로마인답게, 말년 어느날 괴로움을 더는 참지 못해 호신용 단검으로 자살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었다. 로마인들은 늙어 심신이 다 소모되면 추하게 사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도 그러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단검을 빼앗아 막자 그 다음엔 자신을 존경해 온 그리스 출신 주치의에게 독약제조를 명령했다. 제조하자니 위법행위고, 제조하지 않자니 진심으로 존경해온 사람의 명령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던 이 불쌍한 의사는 결국 조제한 독약을 자기가 먹고 자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에 충격받아 그후 다시는 자살 시도를 안 했지만, 대신 땡깡이 한층 더 심해져서 주변 사람들을 더욱 괴롭게 하고만다.

어느 날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과거 자기 휘하의 군인으로 있었던 노인이 벽에 등을 문지르고 있어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때밀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을 듣고 때밀이 노예를 하사하고 운영비(?)까지 대줬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목욕탕에 가보니 온 사람들이 죄다 벽에다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이걸 본 하드리아누스가 사람들에게 서로의 등을 밀어주라고 했다고.

6 창작물에서의 등장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하드리아누스의 생애를 그린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지었는데 이 책 한 방으로 그녀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5년 세계사에서 출판된 1권짜리였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지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간행된 2권짜리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또 그만큼 과감하면서도 불문학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니 시간이 있으면 일독을 권한다.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 등장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바로 이 사람이다. 테르마이 로마이의 주인공, 루시우스 퀸투스 모데스투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며,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만화가 막을 내린다. 위에 언급된 건축가로서의 자질, 동성애를 즐기는 것 모두 가감없이 나온다. 성우오오츠카 아키오.

PSP 게임 로스트 레그넘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 이미 죽었으나 영혼만이 남아 악령이 되었다.

사실은 로리라고 하더라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1. 지금의 세비야 근처의 마을로, 지금까지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로마 식민도시의 예를 잘 보여주는 유적. 이탈리카는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나온 이름이고, '하드리아누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이 빼도박도 못하는 이탈리아 출신임을 보여주는 것.
  2. 한국의 촌수 기준으로 따지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촌수는 5촌인 셈.
  3. 트라야누스가 죽기 직전까지도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가 아니었다. 트라야누스가 죽으면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와 가까웠던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를 비롯한 측근들이 짜고 하드리아누스를 제위로 올린 것이 아닐까 의심받고 있다.
  4.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히스파니아 원정, 동방 순방, 칼리굴라의 갈리아 방문,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원정 정도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역시 속주 방문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다.
  5. 당시 로마에서는 별종으로 여겼다. 하드리아누스 이후 더 이상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6. 그 유명한 상대가 바로 안티노우스이다. 줄인말로 안티노.. 13세 혹은 15세 때 그리스 이타카 지방에서 만난 뒤로.. 전쟁터이든 순방하든가에 따라 다녔고 23세 때 이집트 나일강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자살 또는 타살)으로 끝나게 된다.
  7.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복할 때 정착했다.
  8. 때문에 이탈리카 출신들이 제국 요직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들이 서슬퍼렇게 살아 있었을 때니 조심스러웠겠지만 말이다.
  9.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전임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지방조차 포기하려 했었다. 반대가 심해서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이 황제가 얼마나 확장정책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초석은 될 수 있다.
  10. 로마는 위로는 독일, 아래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서로 정반대의 기후대에 놓인 거대한 나라였다. 거기에 더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막중한 결정을 계속해서 내려야 했음으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 마차나 수레에 기대서 편하게 간다고 해도 고대의 마차는 롤스로이스가 아니다. 거기에 더해 여행 중 그의 심신을 위로하던 동성의 애인도 잃었으니...
  11. 이건 젊어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심신을 혹사시킨 탓에 말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렸고 게다가 후계자까지 지명해 둘 정도로 할 일도 다 해놓아서 뒷 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탓도 컸다.
  12. 후세에 또 한 번 등장하긴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로 갈리에누스다. 학식도 대단했고 군대 지휘 능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 사후 체제 전반에 걸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을 실천했던 오랜만에 등장한 개혁 군주였으나, 로마사를 잘 모르는 일반적인 현대 한국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오히려 역으로 너무나도 군국주의화되어 있었던 시대 분위기에 맞지 않았던 나머지 잘 안 풀린 케이스. 시오노 여사 말대로라면 이 갈리에누스 황제는 100년전 2세기 말이 아닌 군인황제시대에 활동했던게 죄인 황제이기도.
  13. 구체적인 실무야 건축가들에게 맡겼겠지만, 어쨌든 돔형 지붕이라는 아이디어는 그가 냈다. 판테온은 원래 아그리파가 지은 건축물이지만, 불탄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설계해 재건했으므로 그가 지은 건물이라 봐야 한다.
  14. 여담이지만, 한 로마의 건축가는 판테온의 돔을 보고는 '신들이 일어서면 지붕이 뻥 뚫리겠군.'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세간에 퍼져서 하드리아누스의 귀에 들어가자 마상을 받았는지 이후 그 건축가는 하드리나우스가 주도하는 건축 사업에서 모조리 배제됐다고 한다.
  15. 이는 아테네의 학자들과 아가리 파이팅을 하다가 권력으로 찍어누른 유명한 일화에서 또 드러난다.
  16. 현재의 터키 에디르네
  17. 정확히는 네로가 턱수염을 슬쩍 기르려고 시도한 적이 있긴 하다. 평이 안 좋아서 그만뒀지만.
  18.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딱히 반헬레니즘적이었던 건 아니며 기독교적 전통과 구레나룻 사이에는 별반 상관 관계도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수염을 길렀다. 기독교도 로마 황제들 중에도 수염 기른 사람은 많다. 사소한 데 너무 큰 의미를 두진 말도록 하자.
  19. 후술하듯, 황후가 존재는 했으나 대개의 로마 황족들이 그렇듯 정치적 목적의 결혼이었다. 황제가 그녀(이성)와 관계를 가지는 것조차 기피한 것인지 그저 생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둘 사이에는 친자가 없었다.
  20. Greek love. 보통은 그리스 시대에 흔했던 남성간의 동성애 관계를 지칭하곤 한다.
  21. 더 나아가 안티노우스가 더 이상 늙기 싫어 거세시술을 받아 사고로 죽었다는 주장까지 있는데.. 이미 20살이 넘어간 사람에겐 거세 시술을 한다고 카스트로가 될 수 없다는건 이미 로마시대에도 알던거고, 고대 로마에선 거세는 커녕 포경수술조차 금기시해 종교적 죄악으로 보고 있었다. (유대인 탄압 이라는 말도 있다.)게다가 당시 포경=할례 였는데.. 그걸 범죄자 를 골라서 해버리는 시대 였고 그렇게 명령을 내려서 시행을 한게 하드리아누스 본인 이다.
  22. 트라야누스황제의 친척이었다고 한다. 모친이 그의 조카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