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모두스

로마의 역대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내전기
16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공동)
17대 콤모두스18대 페르티낙스
이름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1]
출생지라누비움(Lanuvium)[2]
생몰년도161년 8월 31일 ~ 192년 12월 31일
재위기간177년 중기[3] ~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 동시대를 살았던 로마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의 평가

당대와 후세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된, 로마 제국의 암흑기를 연 폭군.

호부견자의 대표 사례. 황제 부적격자. 혈통주의 폐단의 상징으로,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황제.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에 의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천 년에 걸친 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콤모두스의 즉위 연도로 보고 있다.

즉위 후에도 그 위험성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피바람과 황음으로 나라를 첫 쇠퇴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연산군의 프로토타입[4]이라고 말하기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1 즉위

정말 보면 볼수록 아빠를 닮았다. 하지만 통치는 전혀 안 닮은게 함정.

풀네임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가끔 "코모두스"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코모도 왕도마뱀이라고 놀려먹을 수도 있다. 사실 이름만 들어도 문득 떠오르는 것이 파충류의 한 종류일 것이다.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콤모두스는 서기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자녀 14명 중 열 번째로 태어났고 쌍둥이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그러나 그의 남자 형제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고 그의 쌍둥이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가 제위에 있을 때에 태어나 황제의 직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제였다. 물론 티투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그들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기 전에 태어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콤모두스가 제위에 있은 12년 동안 그가 행한 포악한 행위 때문에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그를 후계자로 삼는데 주저했다고도 하며,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에서처럼 다른 인물을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전해지는 얘기들이 있지만 실제로 마르쿠스 황제는 일찍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기르는 수순을 밟아왔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인 166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171년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아버지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176년에는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개선식을 했고 177년에는 공동 황제의 직위에 올랐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8년과 179년에 도나우 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180년으로 계획된 원정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죽은 후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황제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가 굳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콤모두스가 아버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체육이나 검투사 경기를 좋아하는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이것은 황제로서의 자질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취향의 차이였다. 검투사 경기는 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공부보다 체육을 좋아했다는 것이 로마 상류층에서도 딱히 흠이 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권장되기도 했다. 콤모두스가 180년 3월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후 이에 대해 군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짐의 아버지는 천상으로 올라가 신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심을 갖고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아테네 학당인가. 오오 인본주의자 오오... 하지만(...)

즉위 후 다 이겨가던[5]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사실 이 자체는 그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가 최악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시 로마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 판국이었던 차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상황에서 게르만족과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로마에겐 득보다는 실이 컸다. 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도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한 결정은 아니나 결과는 좋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6]처럼 이후 내치에 전념했으면 모를까 이후 행적을 봤을 때 그렇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도나우 강 건너편의 오지에서 갑옷 입고 군막 생활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그도 그럴것이 콤모두스는 지금 나이로 치면 대학교 1학년 정도의 철없는(?) 젊은이였다.(...)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모인 회의에서도 장수들의 강력한 요청을 단호히 기각한 것을 보면 역시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양이다. 콤모두스가 부황의 별세 이후 로마의 전례로 현장에서 군단의 승인을 받아서 곧바로 황위에 등극한 초짜 황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의로 배짱도 두둑하고 치세 초기에는 군왕의 권위도 있었다. 하지만 무능함이 드러나서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정치는 아버지 시절의 관료들과 침실 시종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먹는 세월을 보냈다.

이렇게 게으르고 무능한 황제로 치세를 끝냈다면 모르겠지만...

2 암살 시도와 보복

남매 중 장녀이며 친누나 루킬라가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암살극을 벌인 탓에(…) 황제 시해미수 이후의 치세는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Claudius pompeianus Quninitianus)가뭐 이리 길어.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콤모두스가 콜로세운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가까이 오자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지만,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라고 외치며 시간을 낭비했고, 이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호위병에게 붙잡혀 칼을 빼았겼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암살되자[7] 그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이것이 도져버렸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는 자식농사 에 실패 했다. 시기적 으로 이후 에 표변 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도 그저 좀 이상한놈->미친놈 으로 변하는 수준 으로 변했다는 평가가 많다.

보복은 무자비했다.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으니. 루킬라와 퀸티아누스가 처형되었고, 근위대장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Taruttienus Paternus) 역시 사오테루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콤모두스는 앞서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파테르누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었지만, 파테르누스가 처형되자 페렌니스가 근위대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통치권까지 전권을 잡았다. 다만 루킬라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는[8] 숙청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위로 삼을 만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큰 누나와의 내외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 때문인 듯. 그리고 5명의 누이들의 남편 - 매형, 매제 - 들 중 3명이나 살해하는 참극을 일으켰다. 누이들에게 위협은 가하지 않았지만 애정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콤모두스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평생 일부일처로 절제된 생활을 한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애첩과의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인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어 카프리 섬에 유배했고 며칠 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콤모두스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고 모든 사항을 페렌니스를 통해 전달하게 했다. 페렌니스가 통치권을 잡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는 인물을 바꾸어 가며 권력을 쥐어주고 황제 자신은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수시로 온천을 즐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명에 달하는 첩들과 함께 놀았으며 3백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내며 하렘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내세운 권력자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재산을 축적하고 그 돈을 가지고 황제의 타락한 생활을 뒷받침 했다. 권력을 잡은 자는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자리까지도 공공연하게 판매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고 황제 역시 그 과실을 함께 취했다. 콤모두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검투사 경기에만 심취했고 이것은 곧 중독 증세로 발전했다.

그래도 유능한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있을 때는 페렌니스가 직무 유기하는 어리석은 황제 대신 나라를 이끌었지만, 185년 페렌니스가 권력에서 밀려났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진 그가 콤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이 장정 대표 1500명을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한다. 또는 브리타니아 군단이 시위를 한 실제 이유는 페렌니스의 정부가 부패해서였거나 또는 페렌니스가 그 해에 일찍이 브리타니아 내의 로마군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가혹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페렌니스의 반란 음모가 사실이여서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콤모두스가 자신의 의심병과 간신배의 농간에 넘어가 오히려 자신의 충신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반란의 사실여부는 모르지만 콤모두스는 결국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의 즉각 반역죄로 처형시켰다. 그들이 죽고서 새 침실 시종이자 탐욕스러운 해방노예 출신인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가 실권을 쥔 뒤로 로마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클레안드로스는 처음 프리지아 출신의 노예로 로마에 왔다가 황실 내에서 차근차근 승진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유능한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페렌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력 역시 황제를 원하는 방식대로 살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있었다. 클레안드로스 역시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자리를 공공연히 판매하였고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어느 해에는 무려 25명을 집정관직에 임명하면서 극에 달했다. 클레안드로스는 벌어들인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가졌지만, 상당한 몫을 콤모두스에게 주었다.

이 무렵에 콤모두스를 노리는 두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궁정 관료가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으로, 군대를 이탈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갈리아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마테르누스(Maternus)였다. 그는 187년 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라신(Cybele)[9]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였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축제 기간 전에 처형되었다. 콤모두스는 더욱 강한 호위병을 곁에 두었고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황실 사유지나 교외 지역에서 보냈다. 그는 더욱 재판과 황제의 업무를 피하면서 신변 보호를 더 철저히 했다.

콤모두스에게 정치적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클레안데르스의 정적들이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클레안데르스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주범은 곡물 담당관인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rius Dionysius)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여러 차례의 재난에 이어 전염병과 기근으로 초래된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들을 취한 후에 그 책임을 클레안데르스에게 뒤집어 쓰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남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지나 로마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리 빌라로 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데르의 처형을 요구했다. 클레안데르스는 기병대에게 군중들을 로마로 쫒아 보내라고 명령했지만, 군중들이 밀고 들어오자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옥상에서 공격을 당했고 수도 경찰대마저 민중의 편에 섰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야 콤모두스는 사태를 깨달았다. 그는 클리안데르스를 처형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는 걸로 봉기를 가라앉혔다. 군중들은 기뻐하며 몰락한 권신의 시신을 마구 다룬 후에 그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환호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콤모두스는 클레안데스 같은 사람을 재상에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권력을 모조리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자주 속주의 총독이나 국경의 군대 지휘관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제국 전역에 부임한 총독이나 지휘관의 수를 합하면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보니 보통 황제들이 일일히 서신을 쓰기보다는 몇가지 지침만 내려주면 그걸 가지고 서신을 작성하는 관료들이 살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처럼 일일히 자기가 다 답장써준 먼치킨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콤모두스의 숙청극으로 이런 관료들이 아예 공직에서 쫓겨난데다가, 콤모두스 본인도 통치에 관심도 없다보니 황제가 보내온 편지에는 늘 Vale[10]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다고 한다(...) 지휘관이나 총독들은 과연 이 편지를 받고 무슨 생각을 했으려는지...

3 검투사 황제

그의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데르스가 죽고 난 뒤였다. 이런 과대망성 증상은 계속되는 암살 시도와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목숨에 불안을 느낀 불안감 때문에 정신이 불안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콤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데에도 신격화를 해달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며,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라고 불러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는 병약했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아버지를 경멸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을 강인함과 용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곤봉을 든 모습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는데 맨위에 보이는 저 조각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여겼으며 사자 가죽 옷의 헤라클레스 복장을 입고 곤봉을 휘두르며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코스프레라니! 심지어 검투 시합을 예행연습한 장소로 추정되는 미니 콜로세움까지 발견됐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였으며, 매 싸움마다 전승무패였다. 물론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곤봉과 칼에 희생당한 자들은 검투사들보다는 주로 본인이 스스로 조달하게 한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문 검투사들과 싸운 경기의 승리는 반드시 상대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와 대결한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사들 쪽에서 먼저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을지언정, 그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억지로 상대를 지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의 무서운 힘과 기술은 베스티아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기린, 얼룩말를 사냥하고, 코끼리 3마리를 죽였고,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을 때려죽인 적도 있으며 그 외 각종 맹수들을 무대에서 죽이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단순히 완력이 셌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Augustan History에 따르면 70-90km/h로 전력질주하는 타조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콤모두스는 192년 11월에 열린 플레브스의 경기가 있는 동안 투기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묘기를 보여주었다. 디오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 장면을 적었다.

"첫날 그는 난간에서 활을 쏘고 ...(중략)... 혼자 힘으로 100마리의 곰을 모두 죽였다. 다른 날들은 위층 자신의 자리에서 투기장 바닥으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축들을 모두 베어버렸으며 ...(중략)... 그는 또한 호랑이, 하마, 코끼리도 죽였다. 그는 이러한 묘기를 보여주고 난 뒤에는 물러났다가, 다시 점심식사 후에 검투사가 되어 격투를 벌였다. 그의 격투 방법과 입은 갑옷은 '세쿠토레'의 것이였고 ...(중략)... 그는 오른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 검을 쥐었으며,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디오 카시우스, 73. 18-19
그의 사격술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고 ...(중략)...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로 미우레타니아의 타조들을 쏘았는데, ...(중략)... 콤모두스가 화살로 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더니, 새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 헤로디아누스, 1. 15

191년에는 로마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반이 소실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부유한 많은 로마인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였던 팍스 로마나의 상징인 평화의 신전까지도 불에 탔고,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성상과 베스타 신전이 파괴되기도 했다. 도심의 많은 지역이 큰 타격을 입어 대대적인 복구 작업과 재건축이 필요했고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지휘한 콤모두스는 자신이 제2의 로마를 창건했다며 로마를 '콤모두스의 땅'이라고 이름을 짓고 달력에서 달의 이름을 자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는 등 광기를 드러냈다.

4 최후

치세 마지막 몇 년 동안 콤모두스는 점차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적대적이 되었다. 로마가 재건되었으나 황제는 신의 화신임을 자처했고, 많은 의원들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나마 죽이지나 않은게 다행이었을 거다. 검투사 활동을 하면서 왼손으로 잘려나간 타조의 머리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피 묻은 검을 휘두르며 관중석의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걸어오면, 오락거리매우 오싹하지만는 협박 그 자체가 되었을테니. 그것은 타조에게 한 것처럼 의원들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광기는 192년 마지막 몇달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 192년 11월의 시합들이 끝나고 콤모두스는 새해를 맞으며 신을 넘어 로마의 새로운 건국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로 재건한 것을 축하하고, 황제를 '로마의 건국자'로 만들려는 것이였다(...) 여기에 선출된 집정관 두 명을 모조리 죽이고, 다음날 자신이 검투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 검투사 집정관까지 되려고 했다.

이와 같이 피에 굶주린 고어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으며, 정적들은 황제의 변덕에 벌벌 떨었다. 황제의 최측근들조차 그에게 치를 떨며, 민중들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하여 불러올 수 있는 파멸을 미리 막아보기 위해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이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는데다 거의 대부분을 무장한 채 지내는 국사무쌍(...)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그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그의 레슬링 교관이자 파트너를 보내서 목 졸라 죽이게 된다.

어처구니 없게도 암살의 원인은 지독한 검투사질 때문이었다. 그가 일도 안 하고 범죄자들을 경기장에 동원해서 때려죽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아예 검투사 숙소에서 살면서 본격적으로 검투사질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근위대장과 애첩이 어이없어 하며 이를 말렸다. 아무리 황제가 검투사질을 하는건 둘째치고라도 검투사랑 똑같이 숙소에서 살겠다는 건 황제의 체면상 있을수 없는 일이었으니. 측근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만류를 했음에도 되려 콤모두스는 빡쳐서 오히려 근위대장과 애첩을 처형하라는 명령서에 싸인을 했고 이를 알게된 그들이 결국 살기 위해서 콤모두스를 죽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와 별개로 콤모두스를 죽여서 다음 황제를 일찍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정적들이 암살 계획을 보조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시신은 콤모두스가 죽일 계획이었던 집정관 당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파비우스 킬로(Fabius cilo)에게 넘겨져 밤 사이에 매장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신을 파내 일반 죄수처럼 시내를 끌고 다녀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지만 그것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대로 그도 당하게 하라"

단 네로는 사치나 코르불로와 같은 장군들을 위협이 될 지 모른다며 자결을 강요한 것을 비롯해 원로원측에서 깔 만한 거리가 많았던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그저 기득권인 원로원을 무시하고 로마가 공화정이 아닌 제정 국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한 인물이었기에 야만적이라고 욕먹은 것일 뿐이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의 기록 말살형은 그냥 원로원인 개새끼였기에 벌어진 일이었고, 결국 3세기에 들어 질린 로마 황제들은 사실상 수도를 버리게 되며, 나중에는 동고트 왕국이 로마 원로원을 갈아버리는 걸 보고도 모른척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였다.

콤모두스의 시신은 그 뒤 상당 기간 그대로 매장되었다가 이어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 황제에 의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이장되었다. 다만 기록 말살형은 세베루스 황제가 철회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세베루스는 평소에 콤모두스 하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세베루스가 왜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철회를 명령했냐 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기록말살형 철회가 원로원 입장에서는 크나큰 굴욕이었을 것이다.

5 평가

그냥 천하의 개쌍놈. 좀 더 자세히 표현하면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 동양권에서 최악의 황제로 손꼽히는 수양제해릉양왕, 충혜왕, 연산군조차도 이 콤모두스라는 인간 앞에서는 전부 꼬리를 내려야 할 정도. 동서양 통틀어 아무리 막장인 황제를 데려다 놓아도 최소한 콤모두스보다 더한 자는 거의 없고, 비슷한 자도 찾기 힘들다. 흔히 칼리굴라 등을 암군으로 부르지만, 치세가 4년에 불과했고 기본 운영은 했다는 점에서 아예 손놓고 검투사질이나 하거나 수시로 사람을 죽인 인간말종 콤모두스와 비교하면 화낼 정도.

철인 황제-철학자 황제라고까지 불렸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오죽하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생겨났다. 황후인 크리스티나가 검투사를 애인으로 삼아 해안 휴양지에서 즐기며 얻은 아들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며 이를 채용한 픽션도 있다. 하지만 조각상이나 기타 문헌을 보면 생긴 게 완벽하게 닮았다고 한다. 선입견 탓인지 묘하게 흐리멍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대에는 꽤 괜찮은 미남으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균형 잡힌 몸매에 남자답고 잘생긴,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이글거렸고, 머리는 날 때부터 금발에 곱슬로 햇빛을 받으면 하도 반짝거려서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를 불가사의하게 여겨 하늘의 후광이 그의 머리를 비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1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병약한 몸과 철학적 기질과 성실성, 그리고 아들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비성실성을 볼 때, 최소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에 존경하고 복종하기에도 후계자 선택권이 사실상 없는 상태이므로 눈앞에서 시늉만 해도 그만. 그리고 국정운영을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와 모자란 재능과 천성까지 연결되면 아버지의 성품이나 수완을 이해하고 존경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아버지랑 달리 불성실한데다 무능한 나머지 정치나 국방에서는 하나도 개선된 게 없었다.

이때부터 근위대장의 시대가 시작된다. 콤모두스 초기에 국가를 통치했던 페렌니스는 근위대장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시절까지의 문민 통치가 이 때부터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로 전환된다. 페렌니스가 피살되고 뒤를 이은 클레안드로스는 아주 탐욕스러워 제국을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었고, 이제 지방 정부에서 딴 생각을 품고 비위를 저지르더라도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근위대가 준동하기 시작[12]했고, 세베루스 이후의 로마 제국의 군국주의화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페르티낙스가 피살된 직후 곳곳에서 군대가 들고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속주에 대한 감시도 이 때부터 해이해졌을 것이다. 여러 모로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기하는 황제[13]다. 하필이면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되고 제국의 재편성이 필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터져버렸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선 수백 명의 미소년, 미소녀들을 모은 하렘이 있었다는데 그 숫자가 각각 33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며 매일매일 술판을 벌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등 타락의 극치를 달렸라고 적혀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진짜라는 주장도 있고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쪽에서는, 물론 콤모두스에게는 여러 명의 후실 황비가 있었으며 정실 황후는 귀찮다는 이유로 폐서인하고 살해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14] 콤모두스의 후실 황비와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콤모두스가 하렘 같은 것을 운영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로 이런 하렘이 있었다는 측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보면 콤모두스가 자신의 첩들이나 자신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제거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콤모두스가 즐겼다는 하렘이 있었으며, 자식이나 첩들이 없던 이유는 콤모두스가 그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슬하에 자녀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며 여러 명을 얻었는지 몰라도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원로원과 근위대에게 참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콤모두스의 자녀들이 잠시 동안의 내란기에서도 무사히 생존했다고 해도 후에 황위에 등극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며,비록 그가 콤모두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했다고 해도 냉정한 세베루스 황제가 콤모두스의 후궁과 자녀들을 살려둘 리 없다.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네로를 떠올리는데 콤모두스와 비교하면 명군이라고 불리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막판에 실패했어도 네로는 최대한 할 일을 하는 황제였다. 사치가 심했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나친 심취[15], 무엇보다 화재 전에 로마는 아름답지 못해서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 데다가 화재 후 복구 사업 때 자신의 궁전을 크게 지으려고 한 부적절한 처사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사실 네로는 제위 기간 동안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고 제법 성과도 올렸다. 거기에 이런저런 이벤트도 많이 열었고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황제였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정치할 생각을 아예 그만둔 암군이었다. 폭정이든 실정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오직 여흥과 취미생활 분야에서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가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숙청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만 한번 터지면 제대로 성질을 부려서 관련자들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역대 로마 황제이나 다른 나라의 황제에 비하면 성인군자로 보일 지경. 왕권이 어쩌니 하면서 신하들에 대해서 스토커적 감시를 하며 최대한의 경계를 하는 전제군주들에 비하면 아주 점잖은(?) 수준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지만 콤모두스가 제위에 앉은 12년은 기근, 홍수, 전염병, 야만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아버지의 통치기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시기였다고 한다. 하다못해 그의 치세에 노예,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언급이나 이야기도 없다.

또한 현제로 알려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콤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콤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콤모두스의 애첩이 된 마르키아의 입김도 작용했던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마르키아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 대해서 무관심해서 기독교 박해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얼마 안 되는 선행 중 하나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건에 섭섭하게 여겼는지 애매모호하게 반응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신고해도 콤모두스 황제가 무시하고 기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로 과인을 귀찮게 하지 마."정도의 대응이었고 큰 연관성은 없겠지만 그를 시해한 암살건에 가담한 후실황비가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잠시나마 기독교 공동체에 숨통을 튀어주었고 계속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정말로 큰 업적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선황 아우렐리우스에게 탄압을 받은 기독교가 콤모두스 치세에 연속해서 궁지에 몰리지 않았기에 다른건 몰라도 기독교 문헌이나 교황청에서 콤모두스를 지적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교황청 입장에서는 빌라도처럼 표창장을 주고 싶을지 모른다. 의외로 세상사람들에게는 명군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 탄압으로 후세에 기독교가 제국을 장악한 로마 말기나 중세유럽에 신나게 혹평당하고 그의 기마상이나 동상은 보는 즉시 파괴할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현대사회에 기독교 신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그를 어찌 보는지는 의문이지만?

로마 인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 기질은 뛰어났고 또한 특별히 대형사고를 친 것도 없으며 인민들을 핍박하거나 무리한 세금징수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제국이 그의 치세 중에 막장으로 치닫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다. 사실 로마 제국의 막장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황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였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처럼 그럭저럭 수습만 했을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 게 그 증거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막장화 수습에 나름 노력하면서 초동 진화에 성공했다면 쇠퇴가 꽤나 미뤄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어느 정도였나면 콤모두스 사후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지만 뭘 한게 없으니 이름을 지울 기록조차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냥 용상에 등극하지 말고 콜로세움의 검투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좋을 뻔 했다. 이 양반 애비가 황제인 걸 탓해야지 뭐

여담이지만 그의 치세에 중국 한나라에서는 역시 비슷한 막장 테크가 일어났고 그 이후에 군웅들이 한 왕조를 무시하고 거병하는 내란이 발발하고 삼파전 분할대립으로 중국이 엉망이 되는 전개가 벌어졌다. 중국이나 로마나 이런 전개는 절대로 낭만이나 대서사시가 아니며 민생이 파탄나고 전란으로 생지옥이 되는 혼돈 그 자체였다. 중국의 경우를 봐도 삼국 분할이 끝나고 서진이 일시적으로 재통일했지만 얼마 못가 5호16국시대로 더 엄청난 재앙이 도래했다. 로마의 경우는 군인황제시대 이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치세는 일시적인 안정이 있었지만 그들 사후에 야만족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하고 제국의 통제력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결국에는 멸망하였다.

중국 명나라천계제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황제로서는 부적합하지만 이들이 했으면 매우 적합한 직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콤모두스는 황제로서는 부적합했지만 검투사를 했으면 대성했을 인물이였고 천계제 역시 황제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였으나 목수를 했으면 대성했을 인물이였다. 다만 천계제는 사람은 좋았다는 점에서 암군일지언정 폭군 취급은 받지 않는다.

6 창작물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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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이 인상적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호아킨 피닉스가 배역을 담당.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김일. 베스테아리로서의 전투 능력은 어딘가로 증발하고 찌질+시스콘[16] 기질이 다분한 악당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그 브리커로 질식시켜 죽인다(…). 썪씨딩 유, 퐈더 누나인 루킬라는 암살 시도 얘기가 없어진 채 선역으로 부각되었다. 사실 이 정도면 대체역사물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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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라프 남작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콤모두스로 열연한 고전영화 로마제국의 멸망[18]에서는 생부가 유명 검투사라는 설정이 나온다. 클라이막스에서 이 비밀이 밝혀지고 격분한 콤모두스는 친부를 죽이게 된다.] 황후의 부정을 제다이 기사인[19] 아버지 아우렐리우스가 눈 감아주었고 대신에 믿을 만한 부하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공화정을 부활시키려고 했는데 콤모두스의 부하가 그것을 알고 독살한 것으로 처리된다. 콤모두스도 나중에 그 진실을 알게 되고 원래 황위에 오를 수 있던 부하도 그걸 알지만 일부러 황위를 포기하고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긴다. 로마 쇠퇴의 원흉

비르투스》에서는 고증에 충실하게 무패의 검투사로 묘사되며 서쪽 나라에서 300승을 올린 웨르키우스가 콤모두스에게 도전하지만 패배하고 콤모두스는 내심 서쪽 나라에서 최고라고 칭송받는 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시시하다고 한숨을 쉰다.
  1. 라틴어를 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름에 들어가는 "Commodus"는 놀랍게도 모두의 법이 되는 자라는 뜻이다. 세상에나 이 싸이코가...
  2. 로마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3. 180년 3월 17일부터 단독 통치.
  4. 친정 당시 한국 나이로 콤모두스는 스물, 연산군은 열아홉이었다. 아버지의 재위기간 중 태어나 즉위한 최초의 계승자이며, 12년을 단독 통치하다가 심복에게 끝을 맺었다는 점도 닮았다.
  5. 게르만 부족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하면 정치적, 군사적 요소가 부족했기에 로마군의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6.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반 죽여놓은 상태에서 죽은 후 파르티아랑 화해했다.
  7. 별개의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8. 누나의 연인관계(?)라는 설정 때문인지 이 시대를 다룬 2차 매체에서는 반드시 이 사람과 루킬라를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9. 대지의 여신으로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숭배된다고 한다
  10. 라틴어로 작별인사. 잘 지내라 혹은 안녕 정도의 의미.
  11. 헤로디아누스, 1.7
  12. 이후 황제인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장인 레토에 의해 피살.
  13. 실제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콤모두스의 치세부터 시작한다.
  14. 시오노 나나미조차도 이런 악행은 곱게 보지 않았다.
  15.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많이 수용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1세기까지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로마인이 많았다. 철학만큼은 예외였지만 쾌락주의 같은 경우는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16. 작중 대사에 "누나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내가 누나를 사랑하니까..."란 대사가 나오는데, 웹툰작가 정철연마린블루스에서 이 대사를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꼽기도 했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슬픔을 표현한 이 대사 하나로 악역인 콤모두스를 동정하게 되었다고.
  17. 게다가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마루쿠스와 검투장에서 1대1 캐삭빵 대결을 벌이다가 허무하게 발리고 죽는다(...). 황제이면서 검투사로 나오는건 어느 정도 실제역사와 동일하지만 실제 역사인물은 하루에 곰 100마리(...)를 떄려 죽였다는 인간흉기급의 괴물인데 마루쿠스도 수십년간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초베테랑 겸 글라디에이터 챔피언이지만 고문도 실컷당하고 칼빵까지 전에 맞은 상태에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황제를 쳐죽인다(...). 인간흉기의 굴욕 거기에 더 심하게도 자꾸 이름 거론되다가 콤모두스 가 엎어져 있는데 등장하는 사람..뭐? 그라쿠스? 그 사람 300년전에 죽었다고! 카이사르 마리우스&술라 가 등장도 하기전에 그라쿠스 가문은 대가 끊어졌었다.
  18. 원제나 시대를 보면 로마 제국의 쇠퇴라고 보는 게 더 낫다
  19. 오비완 케노비로 유명한 알렉 기네스 옹이시다. 영화에서는 완벽한 철인 황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