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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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强 (Lǐ Kèqiáng; 이극강) (1955년 7월 1일 ~ )
1 개요
2012년 제18차 중국 공산당 당 대회에서 원자바오의 뒤를 이어 중국 국무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다. 1955년 7월 1일생으로 안후이 성 출생. 태자당인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가 있던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이며, 북경대를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배경으로 두는 사람이다.
원래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중국 국가주석에 이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장쩌민의 상하이방의 격렬한 반대에 밀려 결국 태자당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고 이 사람은 총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공산당 서열 2위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 15일 중국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명목상 중국의 국가최고의결기관이다.)에서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2 경력
안후이 성 출신이지만,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서 허베이 성에서 자랐다. 1974년 문화대혁명 기간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고교 졸업생들은 지식분자로 간주되어 농촌에 배치되어 삽질을 하게 되었다. 리커창도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몇년간 삽질을 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중앙으로 올라와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공계 출신이 주름잡던 다른 총리들과는 달리[1] 문돌이다. 베이징 대학 학생회장을 역임한 공청단 파벌. 이어 관리생활을 시작하고, 관리생활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다. 이 논문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관련 상인 쑨예팡 상을 받았다.
1999년 허난 성 성장(대한민국의 도지사)에 지명되었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연소 성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44세) 중국의 동부지역(베이징 시, 상하이, 선전 등)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중부 내륙 지방인 허난 성의 경제를 어느정도 이끈 공을 인정받아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입성하였고, 동북 지역의 랴오닝 성 서기, 부총리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무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임기 중 홍콩 우산 시위와 2015~2016 중국 증시 폭락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가주석 시진핑의 권력 확대로, 전임 주룽지나 원자바오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미약하다.
3 기타
기사 암살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민심을 살펴보겠다고 청두를 방문했다가 정육점 주인에게 능욕당한 일도 있다.- ↑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와 고졸인 자오쯔양을 제외하면 중국 총리는 모두 이공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