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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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사이트

北京大学
Peking University

1 개요

영어로는 베이징 대학이 아닌 페킹 대학(Peking University)이라고 표시한다. 이는 베이징의 영어표기가 우정식 병음에서 병음으로 바뀌기 전에 만들어진 대학이라 그렇다. 오늘날에는 도시 베이징은 중국 현지음을 표현하는 병음에 따라 거의 Beijing으로 표기하지만[1] 북경대의 영어명칭은 이미 굳어진 고유명사라 그런지 계속해서 Peking University로 표기하고 있다. 비슷하게 Busan에도 Pusan National University가 있다. 중국어론 北京大学(북경대학)이라 하며 줄여서 베이다(北大)라고 한다. 일본에서 도쿄대학(東京大学)을 토다이(東大)로 줄여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2 역사

1898년 7월 3일 최초로 설립됐다. 청나라 시대였는데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이후 북경제국대학(北京帝國大學)으로 개명하였으며 개화기 시대를 맞이하여 학생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최고의 명문 대학교로 자리잡았다. 영어로는 Imperial University of Peking이라고 표시할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국립북경대학(國立北京大學)이 된다. 1919년 5.4운동에 재학생들이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난징대학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여학생을 받아들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캠퍼스를 중화민국에 의해 창사로 임시로 옮긴다. 당시 창사에는 칭화대학난카이대학도 함께 이전했다. 1938년에 세 학교는 쿤밍으로 다시 옮기는데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이란 이름으로 통합되기도 했다. 1946년에 전쟁이 끝나자 베이징대학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당시 단과대학은 여섯 개로 예술, 자연과학대학, 법학, 약대, 공대, 농학이었다. 학생수는 3천명 규모였다.

1949년에는 공산주의가 본토에 시작되었다. 1952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식의 대학개편이 단행되었다. 베이징대학은 예전에 옌징대학(燕京大學)[2]이 있던 곳으로 학교 부지를 옮겼다. 그러면서 옌징대학과 칭화대학의 교직원 일부를 흡수하였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당시 베이징 사범대와 함께 이곳 학생들이 시위의 주축이 되었다.

3 캠퍼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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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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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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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가 아니다. 대학 내에 호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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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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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대학 건물.

4 현황

주로 문과 자연과학 계열 위주로 발달했다. 칭화대학이 공과 중심인 것과 반대되는 특징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인문계가 하도 탈탈 털려서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도층엔 북대 출신보단 칭화대학 출신이 더 많다. 현재 교직원 규모는 4,206명이며 학부생은 15,128명, 대학원 이상은 15,119명에 이른다. 중국의 수능인 가오카오(高考)는 거의 1천만명이 보는 시험인데 북대에 들어오는 사람은 1년에 4천명이 안 된다. 엄청난 엘리트들인 셈. 다만 중국의 경우 지역균형선발처럼 각 마다 북대에 입학할 인원이 쿼터가 있어 제한된다. 교환학생이나 유학생 규모는 약 천명 수준이며, 그 중에는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놓고 돈 벌려고 만든 예과 제도를 통하여 한국인들을 포함한 유학생들 혹은 무늬만 외국인인 화교들이 매우 손쉽게 들어온다. 일부 유학생들은 예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고등학교 졸업증을 자국 혹은 중국에서 사서 들어가 본과 잘 다니다가 들통나서 짤리는 경우도 있다(...). 졸업했다고 해서 취소 안 시키는 거 아니니 괜히 1~2년 이익보려다가 나중에 졸업 못한 사람 되기 싫으면 하지 말자.

하지만 유학생 전부가 예과 제도를 통해 입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과 출신은 더 적다. 예과(=예비반) 제도는 원래 '중국이 아닌 국가의 고등학교' 혹은 중국내 '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외국국적자를 대상으로 등록비와 수업료를 받고 중국어 등 기초과목 수업을 1년간 진행 한 후 최종 시험을 통과한 인원을 대학 본과에 입학시켜주는 특수한 제도이다. 이를 악용해서 중국에서 로컬고교를 다녀놓고 본국고교졸업장을 날조해 등록하는 경우가 암암리에 있어왔다.[3] 그러나 2012-13년 경 일부 유학원을 통한 한인학생들의 고교졸업장 날조가 적발돼 대거 입학무효 처리되는 일이 있었고 여파가 상당했다. 그 후 예과 쿼터가 대폭 줄었고 리스크가 커졌으니 졸업장 날조 또한 줄어드는 것이 마땅하나 아직도 존재한다.
여하튼 원래 일반적인[4] 유학생의 입학 루트는 베이징대학 유학생 입학시험[5]을 치는 것이다. 베이징대학 유학생 입학시험의 과목은 어문(语文:언어=중국어), 수학, 영어 세과목. 어문은 듣기, 독해, 문법, 작문(논술) 파트로 세분. 어문의 난이도는 매년 평이한 편이나 수학과 영어는 전년도 수험생 성적에 따라 난이도가 널뛰기. 전년도 고득점자가 많으면 난이도를 상향조정하는 식. (2010년 기준 수학은 한국 문과수학 수준, 영어는 대학영어 수준으로 출제). 점수 분배는 어문, 수학 각150점 만점, 영어 100점 만점으로 총 400점 만점. 시험점수로 1차 당락이 결정되며 2차는 교수진 면접. 시험 점수가 높을 수록 1지망학과에 붙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러나 저러나 가오카오보다는 경쟁률이 훨씬 낮으니 합격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고 미국에서는 유학생도 똑같이 SAT 점수로 들어가는 것과 비교하면 중국에서는 유학생이 현지학생들보다 쉽게 입학하는 것은 맞다. 워낙에 지원하는 사람의 수가 차이가 많이 나다보니 벌어지는 현상.
같은 베이징대 유학생들이라도 전공에 의해서 인식은 다르다. 한국과 비슷하다. 한국인 속성이 어디 가겠냐 예를 들어 서울대 경영학과와 서울대 국문학과가 갖는 일반적 사회 인식처럼 북경대 광화관리 [6]와 중문학과가 가지는 위엄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부모들의 자랑질도
애초에 중국은 대학진학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이름 알 정도의 대학이면 중국에서 취직할 때 불이익은 거의 없는 편이니 과에 구애받지말자.

5 동문

  • 보시라이(薄熙來/박희래): 한때 충칭의 성장(省長)이었으나 현재는 대몰락. 후진타오를 도청하려고 한 간 큰 사내다.
  • 리커창(李克强/이극강): 시진핑 밑에서 총리를 맡고 있다.
  • 마크 리퍼트 : 중국어 전공으로 석사를 땄다. 미국의 외교관 이다. 2015년 한국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되었다.
  • 정수일 :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조선족 출신 북한 간첩으로, 체포된 후 전향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 이상은 : 철학부 졸업.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 4.19 혁명때 교수단 시위를 주도하였다.
  • 최민정 : SK그룹 회장의 손녀로 한국 해군 장교.
  • 투유유 : 1955년에서 1959년까지 베이징의학원 약학과를 졸업했다.[7] 말라리아 치료제를 연구해 2015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최진석 :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도가 철학을 전공 하여 박사 학위를 베이징대에서 받았다.

6 교수진/직원

  1.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엔 자신이 옛 사람이라며 페킹이란 표현을 고집한다.
  2. 1919년에 세워진 미국과 영국 계열의 그리스도교 대학이며 1949년 사실상 폐교되었다. 1952년까지 교직원과 학생이 일부 남아있었다.
  3. 이 경우 당연히 중국어에서 우세
  4. 대부분 중국 로컬고교 혹은 로컬고교 부설 국제부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경우
  5. 칭화대학과 런민대학 등 유학생을 받는 다른 대학 대부분이 자체 유학생 입학시험을 치른다
  6. 한국의 경영학과와 비슷한 과. 뱀발로 중국 대학은 정확히 한국의 경영학과와 일치하는 과는 없고 이름도 대부분 다르다. 학교 정책에 따라 잘라버리거나 합쳐버린다.
  7. 이후 북경대에 통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