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이름 | 마누엘 페레이라 (Manuel Ferreira) |
생년월일 | 1905년 10월 22일 |
사망년월일 | 1983년 7월 29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트렌케라우켄[1]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6cm / 73kg |
등번호 | -[2] |
소속팀 |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1924-1933) CA 리버 플레이트 (1933-1935)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1935-1936) |
국가대표 | 21경기 / 11골(1927-1930) |
감독 |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1955) |
1 생애
1.1 선수 생활
페레이라는 대부분 선수생활을 에스투디안테스에서 보냈다. 아마추어 시절의 기록은 전해져오지 않지만 프로로 전환된 1931년 시즌부터 81경기에 출전, 26골을 넣었다.
1.2 국가대표
192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주장이자 핵심멤버였다. 1928년 올림픽에서 은메달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초대 월드컵에서도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대회 도중에 대학교 시험을 이유로 아르헨티나에 돌아가기도 했다.[3] 그 덕분에 초대 월드컵 득점왕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활약할 기회가 생겼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총 21경기에 출전 11골을 넣었다.
1.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전 대표팀 동료 로베르토 체로와 함께 월드컵 중계를 하기도 했다. 1983년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1991년엔 그의 고향 트렌케라우켄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마누엘 페레이라는 조종사 또는 롤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엔리케 과이타 등과 공격 편대를 이루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스트라이커였다. 20년대 아구스틴 파레데스의 탱고에서 그는 나무랄 데 없고 매혹적인 그리고 기술적으로 비길 데 없는 선수로 묘사된다.
3 뒷 이야기
- 192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홈팀 페루를 상대로 50초 만에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신기록이었다.
- 한참 골을 잘 넣을 때에는 5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당시 8골을 기록하였다.
4 수상
4.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0(이상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