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Marguerite de Valois
(1553-1615)

프랑스 발루아 왕조공주앙리 2세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후의 딸이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었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동생이며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의 첫 번째 왕비다. 마르고(Margot)[1]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마르고는 그녀의 애칭이다.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문제는 두 오빠 샤를 9세, 앙리 3세근친상간 테크를 탔다. 너무 사랑하다 못해서 그만 근친상간 크리가 돼버렸다는 것이다...는 썰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혐의는 발루아 왕조를 폄하하기 위한 위그노 선전가들의 글에 주로 등장하는 것으로, 마르그리트가 형제들과 근친상간관계였다는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현대 학자들은 거의 없다. 일종의 흑색선전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마르그리트 말년에 직접 집필하고 1632년에 처음 출간된 회고록이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근친상간은 커녕 애인들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원래 회고록이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는것이므로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직접 기록했을리 없다.)

그러다가 자라서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즈 가문의 기즈 공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지만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후와 샤를 9세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인즉슨 샤를 9세가 유약한데다 후계자가 없어서[2] 발루아 왕조의 존망이 어두운 가운데 샤를마뉴의 혈통인 기즈 공과 마르그리트가 결혼하게 되면 샤를 9세가 후계자가 없는 한 왕위가 기즈 공에게 넘어가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마뉴의 혈통에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으로 발루아 왕조를 계승할 권리까지 생길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카트린과 기즈 가문은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3] 더군다나 프랑수아 2세 재위기간과 1차 위그노 전쟁 당시 카트린을 능가하는 권력을 쥔 적이 있었다. 또한 샤를 9세는 즉위 초엽에 기즈 가문에 휘둘릴 뻔한 적이 있어서[4] 기즈 가문에 대해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기즈공은 카트린과 샤를 9세의 명으로 포르시앵의 카트린 드 클레베와 혼인하였고 마르그리트에게는 나바르의 앙리와의 정략혼인이 추진되었다. 앙리 나바르는 나바르의 여왕인 잔 달브레의 아들이자 발루아 왕조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왕위 계승 1순위였기 때문에 앙리 나바르와 혼인하게 되면 모계로 나마 발루아 왕조가 이어질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또한 개신교측인 나바르와의 정략혼인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를 통해 프랑스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개인에게는 앙리 드 나바르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기즈 공과 비교하면 외모도 딸리는데다 개신교도라서 그와 결혼하라는게 불쾌하게 여겨졌던 것. 그러나 어머니와 오빠의 강권에 할수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5] 그러나 그녀와 앙리 나바르의 결혼은 당초 계획된 프랑스의 화합을 불러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벌어졌던 위그노였던 콜리니의 암살 미수 사건이 비극적인 사태를 불렀으니 바로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 그것이었다. 앙리 드 나바르 개인에겐 비호감이었던 마르그리트였지만 그래도 앙리와 그의 가신들을 구해준 것은 그녀가 손을 쓴 덕이었다는게 오늘날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의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된 샤를 9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오빠 앙리가 즉위해 앙리 3세가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앙리 3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동생인 알랑송 공 에르퀼 프랑수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마찰이 일었다. 결국 그녀는 앙리 3세로부터 에르퀼 프랑수아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탈출시켰고 에르퀼은 온건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도들을 규합해 강경 가톨릭 세력을 이끌던 기즈 공에 맞섰다. 앙리 드 나바르도 사냥을 핑계로 가신 도비녜와 마르그리트의 연인인 라 몰느의 도움을 받아 파리를 탈출해 나바르로 도망쳤다.

상황이 이리 되자 앙리 3세는 당황했고 마르그리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 어쨌든 그녀는 앙리 나바르의 부인이자 알랑송 공의 누나였기 때문. 결국 어머니 카트린느가 중재에 나서 마르그리트가 파리를 떠나지 않는 대신 알랑송 공에게 앙주의 방대한 영지를 내리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고 위그노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이때에 앙리 드 나바르와 부부로서 후사를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게 되자 다시 서로 자유분방하게 바람을 피고 다녔다(...)

1583년, 마르그리트는 방탕한 남자관계와 알랑송 공을 돕는다는 이유로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남편인 앙리 드 나바르와도 사이가 나빠진 가운데 동생 알랑송 공마저 네덜란드에서 크게 실패한 뒤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마르그리트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앙리 3세는 더이상 마르그리트를 통하지 않고 직접 앙리 드 나바르와 협상하려 하자 빡친 마르그리트는 옛 연인인 기즈 공과 손잡고 강경 가톨릭 세력으로 말을 갈아탄다(...) 그녀는 잠시 권력을 회복했으나 앙리 3세와 앙리 드 나바르가 동맹을 맺고 기즈공에게 맞서면서 다시 암운이 드리워졌고 기즈 공이 앙리 3세에게 암살되자 권력을 다시 잃고 말았다.

앙리 3세가 암살된 후, 앙리 드 나바르가 뒤를 이어 앙리 4세가 되자 그녀는 앙리 드 나바르의 왕위계승을 막기 위해 강경 가톨릭 세력을 규합해 내전을 벌였지만 앙리 4세에게 캐발리고 결국 반역과 방탕한 생활등을 이유로 이혼당하고 만다.[6] 그러나 그녀는 합의로 프랑스의 공주이자 왕비라는 지위는 유지하게 되었고 위자료도 받은 돈으로 파리에서 매우 호화롭게 살면서 정치와는 무관하게 문화계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자유로운 여생을 보내게 된다. 더불어 앙리 4세와 그의 새 아내 마리 드 메디시스와는 친구가 되었고 마리가 낳은 앙리 4세의 자식들은 물론 앙리 4세의 사생아들까지 귀여워했다. 앙리 4세가 암살당하고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했을 때 마리가 섭정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7] 발루아 왕조는 완전히 명맥이 끊겼다. 그녀가 죽을 때 발루아 왕조 마지막 생존자였기때문에 애도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자식이 없어서 그랬는지 앙리 4세의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는데 특히 그녀를 따랐던 루이 13세는 그녀의 죽음을 아주 슬퍼했다고 한다. 평생 임신을 하지 못한 걸로 봐서 석녀(石女)였다는 설도 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94년 여왕 마고[8]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어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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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배우는 이자벨 아자니. 이 영화에서는 마고와 라 몰르와의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녀가 라 몰르를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평생의 연인은 아니었다(...),
  1. 흔히 '마고'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어의 특성상 어말의 자음이 묵음화되는 경우는 있어도 어중의 자음이 묵음화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마르고'가 맞는 표현이다.
  2. 엄밀히 말하면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었지, 사생아 앙굴렘 공작 샤를은 있었다. 샤를은 장수해서 루이 14세 때까지 살았다.
  3. 기즈 가문 자체가 카트린의 연적인 정부 푸아티에 부인의 후원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4. 기즈 가문의 당주가 오를레앙을 공격하다가 암살되면서 겨우 벗어났다.
  5. 결혼식 때 예법대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그녀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 보다못한 샤를 9세가 나서서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6. 다만 사생활의 문란함은 앙리4세도 결코 지지 않았고 뻔뻔함은 오히려 앙리4세가 한 수 위.애첩의 출산에 아내가 도와주지않자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 적도 있다.
  7. 죽기 직전까지 애인들을 쉴새 없이 갈아치웠다(...)
  8.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왕비 마르고'가 맞는 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