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아 왕조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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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nastie des Val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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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가 쓰던 문장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 프랑스 왕실은 카페 왕조 이래 계속 백합 문양을 썼다.)[1]

1 역사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되었다.

카페 왕조의 10대 왕 필리프 3세의 사남 샤를 드 발루아가 발루아 백작에 봉해지면서 발루아 가문이 만들어졌다. 1328년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샤를의 아들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서 프랑스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역시 카페 왕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 6세에게 태클을 걸어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1453년까지 백년전쟁을 벌인다.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왕까지 사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다가 명군 샤를 5세의 출현으로 잉글랜드 세력을 대부분 몰아냈지만, 40여년 뒤에 다시 쳐들어온 헨리 5세에게 아쟁쿠르 전투에서 또 대참패를 당하며 트루아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에게 프랑스 왕위를 빼앗길 위기까지 몰렸으나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나타난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전투와 랭스 진격 등의 활약 등으로 어떻게 어렵게 왕위와 영토를 지켜내면서 잉글랜드에게 승리하고 플랜태저넷 왕조의 도전을 완전히 물리친다.

1498년, 샤를 8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발루아 가의 본가가 단절된다. 발루아 왕조 3대 샤를 5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 루이[2]의 손자 발루아 오를레앙 가(maison de Valois-Orléan)의 루이 12세루이 11세의 사위이자 샤를 8세의 매형이었으로 살리카법의 의해 즉위했다. 참고로 루이 12세와 루이 11세는 칠촌으로 거의 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부터를 발루아-오를레앙 가라고 나눈다.

1515년, 그런데 루이 12세도 아들이 없어서 발루아-오를레앙 가는 한대 만에 단절된다. 똑같이 오를레앙 공 루이의 손자로 루이 12세의 사촌이던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 그러니까 루이 12세의 오촌 조카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의 사위였으므로 역시 살리카법에 의해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를 발루아-앙굴렘 가(maison de Valois-Angoulême)라고 나눈다.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지만, 스페인신성로마제국, 부르고뉴 공국 등을 차지한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아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559년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는 마상시합을 벌이다가 사고로 부상을 당해 사망한다.[3] 앙리 2세의 사망 이후 그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요절, 고자, 암살(…)의 삼연타가 터지면서 아들이 4명이나 되는데 자손이 하나도 없다.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필사적으로 왕조를 수호하는 상황이 돼버린다. 게다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위그노 전쟁까지 겹치면서 왕조의 상황은 거의 막장으로 치닫는다.

프랑수아 2세[4]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후계자 없이 요절, 그 동생으로 10세였던 샤를 9세가 즉위했으나, 그 역시 적자 없이[5]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폴란드의 왕으로 가있던[6] 앙리 3세가 돌아와서 왕위를 이었지만 위그노 전쟁이 폭발하면서 왕국은 분열되고 만다.

가톨릭 동맹의 맹주 기즈 공작은 과격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왕권에 위협을 느낀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암살하는 초강수를 둠과 한편 위그노 진영의 수장인 나바르의 왕 앙리(앙리 4세)와 동맹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앙리 3세는 막장스러운 행동으로 가톨릭 진영의 원한을 사서 암살당했다.[7]

앙리 3세는 자식이 없었고 동생인 앙주 공 프랑수아는 앙리 3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는 이로서 단절되고 만다. 본래 발루아 왕조가 플랜태저넷 왕조를 밀어내려고 어거지 써서 끄집어냈던(…) 살리카법 때문에 22촌(...)이나 되는 아주 먼 부계 친족인[8] 앙리 4세가 왕위를 이어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다.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앙리 4세의 왕비가 되기 때문에 모계 혈통은 부르봉 왕조에게도 전달되어야 했지만 마르그리트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2 의의

이전 버전까지에서는 백년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위그노 전쟁을 근거로 '어째 대대로 잘 풀리는 일이 별로 없었던 왕조' 라고 평가되었던 왕조. 하기야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 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이탈리아 전쟁에서도 신나게 박살이 났고, 위그노 전쟁에서도 망했어요. 다만 군사적으로는 이렇듯 안습한 왕조였지만, 문화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일단 백년전쟁 시대에는 샤를 5세라는 명군이 출현하여 건축과 문학을 진흥시켰고, 자기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등 합스부르크 황조에게 신나게 털린 프랑수아 1세도 르네상스 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발전시켜 언어, 문학, 학문, 건축, 예술 등등 손을 안 댄 분야가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내정 면에서는 '프랑스의 세종대왕' 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은 이후 부르봉 왕조 시대에도 이어져, 베르사유를 중심으로 프랑스라고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궁정 문화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편 발루아 왕조 시대에 프랑스가 중세 봉건왕국에서 근세적인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도 중요. 일단 샤를 5세가 프랑스 최초로 정기적인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관료제를 정비하고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상비군을 갖춤으로서 밑그림을 그려놓았고, 백년전쟁 이후에 즉위한 루이 11세가 중앙집권을 완성했다. 그는 백년전쟁으로 많은 봉건 귀족들이 죽거나 영지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의도적으로 대귀족들을 억압하고 중소귀족들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결국 부르고뉴 공작 샤를을 중심으로 대귀족들이 '공익동맹' 을 결성하고 루이에게 맞섰으나 진압되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는 루이 11세가 '짐이 곧 프랑스다!' 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강력한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이러한 중앙집권체제는 서유럽에서는 가장 빠른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외교도 중요 포인트. 이는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 중에, '우리 프랑스 혼자서도 안 되고(4차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모조리 긁어모아도 안되잖아(5차 이탈리아 전쟁)?! 그렇다면...' 이라는 발상으로 동맹을 제안한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이슬람 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9]. 이후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왕조가 발루아에서 부르봉으로 바뀐 1620년에도 프랑스의 대외 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가 오스만 제국이었다. 또 의복이나 음식 등 오스만 제국의 문화가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전체에서 유행하게 되었는데, 비록 프랑스는 아니지만 터키 행진곡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충분한 예가 될 듯. 이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할 때까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동맹은 간간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보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3 역대 국왕 목록

3.1 발루아 본가

  • 필리프 6세(1328~1350): 카페 왕조 최후의 왕 샤를 4세의 사촌. 하지만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내 외할아버지가 샤를 4세니까, 너보다는 내가 더 촌수가 가깝거든...?!' 이라는 이유로 딴지를 걸어와 백년전쟁이 일어났고, 필리프 6세의 시대에 백년전쟁기 프랑스의 첫번째 참패인 크레시 전투가 벌어졌다.
  • 장 2세(1350~1364): 필리프 6세의 아들. 전형적인 기사 타입으로, 정치력이나 전략, 전술은 영 아니었던 인물.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요소가 여럿 있었음에도 '싸움은 정정당당하게' 를 모토로 내건 결과 푸아티에 전투에서 망했어요.
  • 샤를 5세(1364~1380): 장 2세의 아들. 아버지와는 달리 신체적으로 허약하여 사실상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할 정도였지만, 그 정체는 백년전쟁기 프랑스 최대의 명군.
  • 샤를 6세(1380~1422): 샤를 5세의 아들. 할아버지를 닮아 마상시합에 관심이 많았다지만, 열병에 걸렸다가 그게 정신병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의 치세에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다시 프랑스를 침공해와 백년전쟁이 재개되었으며,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털리게 된다.
  • 샤를 7세(1422~1461): 샤를 6세의 아들. 당시 프랑스 내에서 가장 강력했던 봉건 귀족인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의 편을 드는 바람에 1429년까지 즉위식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잔 다르크라는 소녀의 출현으로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한 인물. 잔 다르크 이야기만 읽다 보면 악역처럼 느껴지지만, 나름 전후처리는 잘 해냈다.
  • 루이 11세(1461~1483): 샤를 7세의 아들. 위에서 소개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프랑스는 봉건귀족들의 힘이 크게 약화되고[10] 전제군주정으로 큰 걸음을 내딛었다.
  • 샤를 8세(1483~1498): 루이 11세의 아들.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하며, 나폴리 지배를 노리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결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조금 받게 되었지만, 정작 샤를 자신은 그런 건 아웃 오브 안중. 게다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와 다시 침공을 준비하느라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죽었다.

3.2 발루아-오를레앙 가

  • 루이 12세(1498~1515): 샤를 8세의 친척. 정확히는 샤를 5세의 장남이 샤를 6세였고 둘째아들이 오를레앙 공 루이였는데, 이 오를레앙 공 루이의 손자가 루이 12세다. 그의 치세에 2차 이탈리아 전쟁과 3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났지만, 법과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도로망 확장, 농업시설 개선 등 내정 측면에서 상당히 공을 기울여 재정 부족에 허덕이지 않았을뿐더러 샤를 8세 시대의 빚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삼부회로부터 '국민의 아버지' 라는 존칭을 받았고, 마키아벨리도 '군주론' 에서 이러한 경제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3.3 발루아-앙굴렘 가

  • 프랑수아 1세(1515~1547): 루이 12세의 사위. 프랑수아의 치세에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결합된 '합스부르크 제국' 이 탄생해, 프랑스는 사방에 적을 두게 된다[11]. 그리고 프랑수아는 어떻게든 합스부르크 제국의 힘을 꺾기 위해 네 번이나 전쟁을 일으키며 도전하지만, 그 결과는 4전 4패였을 뿐.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여,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한편 프랑수아 시대에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이 성사되었으며(정확히는 1525년에 동맹이 체결되었고, 조약으로 공식화된 건 1536년.) 위그노 박해가 시작된 것도 이 때.
  • 앙리 2세(1547~1559): 프랑수아 1세의 아들로, 문화 발전,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 오스만과의 외교, 위그노 박해라는 아버지의 정책을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페로도 께~속' 이라는 식으로 이어받은 인물. 하지만 문화나 외교는 몰라도 나머지 둘은 성과가 영 좋지 못했고, 마상시합 중에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 프랑수아 2세(1559~1560): 앙리 2세의 아들. 16세의 나이에 즉위한데다 재위기간이 저모양이라, 그저 안습.
  • 앙리 3세(1574~1589): 앙리 2세의 셋째아들 정확히는 넷째지만....
  1. 다만 이것은 샤를 5세 시대(1364~1380)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문장이고, 그의 시대에 위의 문장처럼 작은 백합을 주루룩 늘어놓는 것에서 큼직한 백합 세 개로 바뀌었다.
  2. 샤를 8세의 증조부 샤를 6세는 샤를 5세의 장남이었다.
  3.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그 사건.
  4. 메리 스튜어트의 첫 남편이었다.
  5. 애첩에게서 태어난 앙굴렘 공작 샤를은 있었다. 사생아라서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샤를 9세의 대를 이어나갈 수는 있었다.
  6. 당시 폴란드는 선거왕제였다.
  7. 여담으로, 당시 각 진영의 주역이 각각 앙리 3세, 앙리 드 나바르(훗날의 앙리 4세), '앙리 드 기즈'(기즈 공작)로 다들 이름이 같은 '앙리'였기에 위그노 전쟁 시기를 가리켜 '세 앙리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다만 모계로 따지면 실제 촌수는 육촌 형제다.
  9. 다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정작 당시에는 '신성모독이다!' 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10. 루이 11세와 싸운 부르고뉴 공작은, 백년전쟁 시대 부르고뉴 공작의 아들이다.
  11. 샤를 8세 때부터 스페인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여 왔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12. 정확히는 셋째지만, 바로 위의 형인 루이가 향년 2세(...)의 나이로 가시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