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샤를 9세 | → | 앙리 3세 | → | 앙리 4세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 ||||||
지그문트 2세 | → | 헨리크 발레지[1] | → | 안나 야기엘론카와 스테판 바토리 |
이름 | (프랑스)앙리 3세 (Henri III) |
생몰년도 | 1551년 9월 19일 ~ 1589년 8월 2일 |
재위기간 | 1574년 5월 30일 ~ 1589년 8월 2일 |
이름 | (폴란드-리투아니아)헨리크 발레지 (Henryk Walezy) |
재위기간 | 1573년 5월 6일 ~ 1575년 5월 12일 |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왕. 발루아 왕조의 지파인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사남으로[2] 큰 형 프랑수아 2세, 작은 형 샤를 9세가 모두 요절하고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이 되었다. 두 형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동생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를 제치고 모친의 총애를 받고 자랐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앙리 2세와 다른 세 형제들과 달리 발루아 왕조의 전통인 사냥과 운동은 약간의 흥미만 가졌고 검술에 능하는 것 외에도 예술과 독서 같이 메디치 가문의 취향들을 선호했다. 15살인 1566년 앙주 공작이 되었으며 1568년 위그노 전쟁 당시 왕실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1569년 3월 자르나크에서 콩테 공작과 같은 해 10월 몽콩루트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군대를 격파해 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위그노들의 지도자중 한 명이었던 루이 드 부르봉 콩테 공작을 죽여 모욕한 일로 위그노들의 증오를 사게 되었다. 1570년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약혼이 오갔으나, 백년 전쟁 이후 골이 깊어진 양국간의 감정으로 없던 일로 처리되었다. 이 혼담은 나중에 그의 동생 프랑수아한테도 있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1572년 7월 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자 카트린느는 공석인 폴란드 국왕위에 앙리 3세를 내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선출제였으므로 가능했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에른스트와 경쟁하여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다. 원래 폴란드 귀족들은 전 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의 누이동생이자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던 안나 야기에오와 앙리 3세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서 밀어줬던 것이다. 그러나 앙리 3세는 폴란드로 떠나는 것을 주저했다. 8월 24일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나바라 왕 앙리 드 부르봉[3]과의 결혼식 첫날밤인 성 바를톨로메오 축일에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을 일으켜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위그노 곧 개신교 신자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당시 앙리 3세는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 일어날 때까지 폴란드로 떠나지 않았으며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 자체가 당시 샤를 9세와 가까이에 접근하려했던 개신교 신도들의 수뇌부 중 한 명이었던 콜리니 제독을 제거하기 위한 카트린느와 기즈 공작가의 결탁한 음모였고 앙리 3세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모후인 카트린느의 총애를 받은 것을 볼때 그 역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의 전모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거나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이후에도 여전히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면서도 계속 프랑스를 떠나려하지 않자 샤를 9세의 최후 통첩을 받고 1574년 측근 몇 명을 대동하고 독일 북부로 통해 폴란드로 떠난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 세력이었던 팔츠 선제후들을 비롯한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의 위협을 받았다. 1월 25일 폴란드령인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2월 21일 바젤 대성당에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헨리크 발레지로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자신의 왕권을 어떻게 행사할지는 몰랐기에 각 조항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지그문트 2세 당시 체결한 루블린 합병으로 모든 권한 등을 인정받은 폴란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그에게 더많은 특혜를 얻어낼려고 했으며 결국 바르바샤 근교 카미엔에서 자신의 폴란드식 이름을 딴 헨리크 조약을 채택해 왕으로서의 모든 권환을 박탈당하고 수용한 규정에 따라야만 했다. 결국 싫다고 해도 억지로 외국의 왕이 됐지만 졸지에 왕권을 제대로 발휘를 할 수 없는 허수아비가 되 버린 것(...)이다. 계획대로 안나와 결혼했으면 프랑스-폴란드 동군연합을 이루었겠지만 절대군주정인 프랑스에서 자란 헨리크는 진절머리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헨리크 조약은 폴란드 왕위 세습도 금지했으니 그가 죽으면 어차피 동군연합은 자동으로 해체됐을 것이다.
그의 왕권을 제한했던 헨리크 조약은 다섯 조항으로 되어 있다. 첫째, 국왕은 의회인 세임[4]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 둘째, 국왕은 세임을 2년에 한번 6주간 열게 한다. 셋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 조세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넷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총동원을 할 수 없다. 다섯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선전포고와 정전을 선언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세임에 의해 권력이 매우 제한된 완전한 꼭두각시 국왕이었다.
이듬해 5월 30일 바르톨로메오 학살로 큰 충격을 받아 와병 중이었던 샤를 9세가 죽자 프랑스 왕위 계승을 위해 6월 18일 프랑스에서 같이 동행한 측근들과 함께 미련없이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급히 서둘러 크라쿠프의 왕궁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신성 로마 제국의 모라비아 변경백령에 도착한 후 빈으로 가 막시밀리안 2세의 환대를 받고난 후 가톨릭 세력권인 남부 독일을 경유해 베네치아 공화국, 만토바, 페라라, 사보이 공국의 토리노 등 이탈리아 북부를 유람하는 듯 거치면서 9월 2일 샹베리에 도착하여 동생 프랑수아와 합류하고 이어 9월 6일 리용에 도착, 어머니 카트린느와 만났다. 1575년 2월 21일 랭스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 이틀 뒤 로렌가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했다. 이 때 폴란드 귀족들은 그가 다시 폴란드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앙리 3세가 돌아오지 않자 그들은 새로운 국왕 선거를 치뤄 스테판 바토리를 선출했고 그가 안나와 결혼했다.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 전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원래 그는 똑똑하고 지적이었으며 세련된 성격이라 모친이 매우 총애했었는데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이란 불린 총신들에 대한 지나친 총애, 동성애적인 성적 취향, 조각배를 타고 강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의 기이한 행각, 사치 등으로 비난을 받았고 모친 카트린느와 더불어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즉위 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프랑스를 다시 혼란으로 몰고 갔다.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10일이 지나서 그의 동생 프랑수아가 파리를 탈출해서 자신의 영지 내에 위치한 드뢰로 도망쳐 자신의 지지자를 모아 2일이 지난 후 신성동맹의 수장 앙리 드 기즈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루이 드 부르봉의 아들이자 앙리 드 나바르의 사촌형제 앙리 드 부르봉 또한 파리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위그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위그노들의 반란이 재발하는 동시에 형제간의 골육상잔이 발생하는 동시에 팔츠 선제후였던 요한 카시미르까지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4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들어왔다. 당시 앙리 3세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연이은 반란과 사치에만 몰두해 당황하면서 우왕좌왕했으며 모든건 지휘한 사람은 기즈 공작 앙리였고 그는 신성동맹을 내세워 위그노들과 싸웠다. 결국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2월 3일 파리에 억류되었던 신교도의 지도자이자 나바라의 왕이기도 한 앙리 드 나바라마저 파리를 탈출하고 나바라의 수도 베아른에서 다시 세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바라의 앙리가 탈출한 계기로 사치에만 몰두하는 앙리 3세, 신성동맹의 수장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후예라 주장하며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기즈의 앙리, 발루아 왕가와 먼 친척이자 앙리 3세의 매부였던 나바라의 왕인 앙리 등 세 앙리의 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결국 1577년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해 위그노는 몇 가지 자유권을 박탈당했고 가톨릭 측은 신성동맹을 해체해야 했다.
1584년 2월 네덜란드의 오랑예 공작 빌렘에 의해 네덜란드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동생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과정이 새로운 국면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앙리 3세의 슬하에 뒤를 이을 자식들이 없었고 다른 형제들도 후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왕위 계승권은 앙리 3세의 매부이자 개신교도의 지도자였던 나바라의 왕 앙리에게 넘어갔다. 이에 국내외의 가톨릭은 프랑스의 왕위가 개신교도인 나바라의 앙리에게 넘어가는 것에 반발하고 신성동맹을 다시 일으켜 나바라의 앙리의 숙부이긴 하지만 가톨릭 신자이며 루앙의 추기경이였던 샤를 드 부르봉을 환속시켜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내세우는등 국내 정세가 불완정하고 있었고 급기야 1585년 7월 18일 신성동맹과 손을 잡아 왕권을 강화시키려하는 태후인 카트린느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의 자유을 박탈당한 위그노에서도 반발을 불려 나바라의 앙리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로부터 경고를 받게 된다.
결국 1년 6개월이 지나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내전으로 치달았고 이 내전이 바로 오늘날 세 앙리의 전쟁이라 불린 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앙리 3세는 여전히 사치에 물두하고 있었고 그나마 쿠트라 전투에서 총신인 국왕군 총지휘관인 조아이유즈 공작을 비롯한 국왕군 8000명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점차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지 못하였다. 또한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앙리 드 기즈의 공작으로 파리 내에서 국왕으로서의 위신이 실추되기 시작했다. 1588년 5월 12일 결국엔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모후인 카트린느가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해 샤르트르로 피신하고 만다.
앙리 3세가 파리를 탈출하면서 유리한 것은 앙리 드 기즈였으나, 그 또한 파리를 점거하면서 신성동맹 내에 발생하는 파벌싸움을 제어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자 두 사람의 앙리는 모친 카트린느의 중재하에서 다시 협상을 하였고 1588년 7월 19일 앙리 3세는 루앙에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 조약을 발표했고 3일 뒤 조약은 파리의 대법원에 등록되었다. 그가 발표한 연맹조약은 위그노들에게 느무르 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항이 있었고 이는 앙리 3세에게도 가혹한 것으로 부르쥬, 오를레앙등 4개의 도시를 신성동맹에게 제공하는 것 등이었다. 이는 순전히 앙리 드 기즈와 신성동맹의 권한을 더욱 몰아주었다. 10월 16일 연맹조약을 명문화하기 위해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개최하면서 앙리 드 기즈와 그의 동생인 로렌의 추기경인 루이 드 기즈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12월 23일 암살 계획을 실행해 앙리 드 기즈를 자신의 방으로 불려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루이 또한 살해하고 신성동맹이 내세운 자신의 또다른 후계자인 샤를 드 부르봉을 포함한 기즈의 측근들을 체포한다.
1589년 1월 5일 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느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앙리와 루이의 동생이었던 샤를 드 마옌느 공작을 비롯한 신성동맹에 의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프랑스 대도시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린데다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하던 파리의 대법원 또한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되고 신성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 법원마저 신성동맹편에 서는 등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었다. 가톨릭에 완전히 버림받은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라 왕 앙리 밖에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바라의 앙리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앙리 3세는 블루아에서 투르로 거처를 옳겼다. 1590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신성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앙리 드 나바라가 이끌던 위그노 군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이후 앙리 3세는 나바라의 앙리와 함께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두달 동안 준비를 한 후 같은해 7월말에 4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으로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589년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면서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인 자크 클레맹(Jacques Clément)을 맞이 한 후 그가 갖고 온 편지에 주의를 팔고 있는 사이에 그가 휘두른 단검에 복부를 심하게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그를 밀쳐내 경비병을 불려 자크 클레맹을 죽였지만 이미 심한 중상을 입었기에 병상에 누웠고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하나 문병차 온 후계자인 앙리 드 나바라에게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할 것을 권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앙리 드 나바라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한 뒤 구술로 아내와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지방의 총독과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낸 후 다음난 오전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멸망했다.
후사가 없었고 그의 뒤를 이어 매부였던 앙리 드 나바르가 즉위해서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