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앙리 3세 | ← | 앙리 4세 | → | 루이 13세 | ||
역대 나바르 왕국의 군주 | ||||||
후아나 3세 & 안토니오 | ← | 엔리케 3세 | → | 루이스 2세 |
이름 | 앙리 4세 (Henri IV) | |
생몰년도 | 1553년 12월 13일 ~ 1610년 5월 14일 (56세) | |
출생지 | 나바르 왕국 포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재위기간 | 나바르 왕국 | 1572년 6월 9일 ~ 1610년 5월 14일 (38년) |
프랑스 왕국 | 1589년 8월 2일 ~ 1610년 5월 14일 (21년) | |
대관식 | 나바르 왕국 | 없음[1] |
프랑스 왕국 | 1594년 2월 27일 |
"하느님은 최소한 일요일에는 우리 프랑스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기를 원하신다."
Henri le Grand[2]
Ang리 4세
닭들이 이 사람을 싫어합니다
1 요약
군사면 군사, 내정이면 내정,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부르봉 왕조의 명군주
프랑스판 세종대왕
닭들 입장에서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장난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개창자로 카페 왕조 방계 후손이자 카페 왕조 루이 9세의 막내 아들 로베르 드 프랑스의 후손이었던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duc de Vendôme)과 나바르의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3]의 차남이다. 차남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은 형 앙리 대신 후계자가 될 수 있었으며 어머니가 사망하자 나바라 왕위를 이어받아 엔리케 3세로 즉위했다. 더불어 위그노(신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낭트 칙령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왕이다. 별명은 선량왕(선하신 왕 앙리) 또는 호색왕으로 재위 중 업적을 많이 남긴 관계로 대왕(le Grand)의 칭호를 받아서 앙리 대왕(Henri le Grand)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553년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아틀란티크 지방인 나바라 왕국의 베아른의 포 성에서 나바라의 앙리 또는 나바라의 엔리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로마 가톨릭식의 세례를 받았으나 나바르 여왕이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는 신실한 위그노답게 강경한 인물이었기에 위그노로 자랐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베아룬에서 지냈다. 베아룬 사람들은 대개 개방적이고 영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앙리 드 나바라의 성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앙리 드 나바라는 종교에 기반한 이상주의자인 강경한 어머니와는 다르게 온건한 성품을 바탕으로 개방성을 발휘하여 훗날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561~1567년까지 프랑스 궁정에서 먼 친척뻘인 앙리 2세의 자녀들과 함께 지냈으나, 그 사이인 1562년 위그노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일가 전체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으로 나누어졌고 아버지인 앙투안 드 방돔은 위그노와 동맹을 맺다가 곧 편을 바꿔 가톨릭 편에 서서 싸우다가 루앙 전투에 중상을 입어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고, 1568년 앙리 드 나바라는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어머니 잔 달브레의 곁으로 돌아와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으면서 군사 교육도 받았다. 1569년 가을에 나바라 남부의 반항적인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의 이름뿐인 지휘자가 되어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다가 3차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잔 달브레는 적극적으로 위그노를 지지했고 아들인 앙리 드 나바라를 같은 위그노이자 시동생인 루이 드 콩데에게 맡겼으나 1569년 3월 13일 자르나크 근처에서 벌어진 앙주 공작이었던 앙리 3세의 기습 공격으로 패배당하고 콩데 공작이 전사하게 되자 잔 달브레는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허나 사령관의 모든 권한은 앙리 드 나바라의 군사교육을 맡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에게 있었고, 이후 사촌인 소 콩데 공작 앙리[4]와 함께 10월 3일의 몽콩투르 전투에도 참전했고, 1570년 6월 26일 16세의 나이로 아르네르뒤크 근처에서 처음으로 출전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고, 이후 푸아투에서 부르고뉴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오랫동안 원정했다.
2.2 나바라 국왕
1570년 8월 평화조약이 체결된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아주 관대한 포교령이 내려졌고, 내전의 종식을 기대하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아이디어[5]로 발루아의 마르그리트와의 혼담이 오갔고, 1572년 봄까지 질질끌다가 두 어머니들 간의 합의로 그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둘의 결혼이 확정된 뒤에 먼저 파리로 떠난 잔 달브레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앙리 드 나바라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국왕이 되었다. 8월 18일, 예정대로 마르그리트 공주와 노트르담 성당에 혼인 서약을 해 카트린느와 잔의 의도대로 두 가문이 화해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거라고 생각했으나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로 망했어요.
위그노파의 가스파르 드 콜리니가 아들인 샤를 9세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카트린느가 기즈 공작가와 결탁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샤를 9세를 충동질한 대학살극 당시에 앙리 드 나바라는 카트린느에 의해 반쯤 감금당하기도 했고, 그 사이에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파리에 있던 위그노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면서 고립되고 만다.[6] 이후 프로테스탄트를 포기하라는 샤를 9세의 명에 굴복해 가톨릭을 개종, 3년 동안 감금되었다.
이후 파리에서 그럭저럭 유폐생활을 보내던 중,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즉위한 후 암군으로 돌변하면서 1576년을 기점으로 국내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자신의 나라 나바르 왕국에 도착해 다시 위그노로 개종,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나바르 왕국은 신교도의 집결지[7]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는 4차 위그노 전쟁에서 신교도의 맹주가 되었다.
하지만 앙리 4세는 위그노들이 계속 연패를 해오면서 열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그노들을 설득하여 1577년 위그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가톨릭 진영에서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 성을 점령하자 곧바로 폴뢰망스를 기습공격했다. 이후 1580년 봄에 카오르를 공격해 점령하였고 나아가 1583년 자신의 소유지였던 몽드마르 시가 반환되지 않자 야간 공격을 감행해 점령했다.
1584년 2월 앙리 3세의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신교도인 네덜란드의 오랑예공 빌렘에게 네덜란드 군주에 추대받다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동생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문제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발루아-앙굴렘 왕가와는 가까운 친척으로는 나바라의 부르봉-방돔가의 앙리 4세와 그의 숙부였던 루앙의 추기경 샤를 밖에 없었고, 특히 앙리 드 나바라의 경우 앙리 3세와는 모계로는 6촌 형제 관계[8]였지만 왕위 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계로는 22촌 관계였는데, 살리카법에 의해 왕이 된 것이다.굳이 말하자면 철종과 흥선대원군/고종??[9]
하지만 앙리 3세는 위그노인 앙리 드 나바라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기즈 가문을 위시한 신성 동맹 내에서도 가톨릭의 성직자였던 그의 숙부 샤를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내세우면서 앙리 드 나바라와 기즈 공작을 위시한 신성 동맹과 대립하였고,[10] 1587년 10월 20일 8천명의 국왕군을 이끌던 앙리 3세의 총신이었던 안 드 조아이유즈 공작을 격퇴했다. 그러다가 1589년 12월 23일 블루아에서 앙리 드 기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 루이 드 기즈가 앙리 3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전황은 앙리 드 나바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11]
결국 1589년 1월 5일 앙리 3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느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앙리와 루이의 동생이었던 샤를 드 마옌느 공작을 비롯한 신성동맹에 의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프랑스 대도시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렸고,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하던 파리의 대법원 또한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 신성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 법원마저 신성동맹편에 서는 등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자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라 국왕 앙리 밖에 없자 결국 앙리 4세와 손을 잡게 되었고, 1589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신성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앙리 드 나바라가 이끌던 위그노 군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이후 두 왕은 함께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두달 동안 준비를 한 후 같은해 7월말에 4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으로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허나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면서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인 자크 클레맹이 앙리 3세에게 편지를 건내 앙리 3세가 편지에 정신을 팔리는 사이에 자크 클레맹에게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병상에서 문병을 온 앙리 4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권하며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숨을 거두고 만다.
2.3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사망후 발루아 왕조의 맥이 사실상 끊기자 앙리 드 나바라는 사실상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고 이 때 프랑스와 나바르는 동군연합이 되었고[12], 루이 14세 때 아예 한나라로 통일되었으나 연합군 내에서 앙리 3세를 따르던 가톨릭교도들이 위그노였던 앙리 4세를 져버리고 탈영하면서 앙리 4세 또한 잠시 뒤로 물려나야 했고 몇 주일 뒤 노르망디의 아르크 성이 보이는 곳에서 마옌느 공작 샤를과 싸웠고 1590년 3월 14일 이브리에서 마옌느 공작을 패퇴시켰다.
그사이에 그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숙부 샤를[13]이 죽으면서 그의 전통성은 견고해졌고 신성 동맹은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펠리페 2세의 딸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내세우는 등 살리카 법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1591년 4월 10일에 샤르트르가 앙리 4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앙리 4세는 차츰 가톨릭 세력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1593~1594년쯤 되면 앙리 4세의 군대는 파리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샤르트르에 이어 누아용까지 점령했으나 루앙만큼은 점령되지 못하자 앙리 4세는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들이 묻히는 생 드니의 대성당에서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말을 하고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하게 되었다.
앙리 4세의 개종은 그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킬 정도로 국외의 신교도들에게 파격적이었으나 이미 종교 내전으로 인한 프랑스인들에게 환영받은 조치였다. 이후 오를레앙과 리웅이 복종하였고,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루고 3월 22일에 파리에 무혈입성하게 된다.[14]
이후 신성동맹 치하에 있던 여러 도시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하였고 랑의 경우 포위공격 끝에야 겨우 복종하였으나 브르타뉴만큼은 앙리 4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스페인의 지원으로 계속 저항했다. 결국 1595년 1월에 앙리 4세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게되며 6월 5일 브루고뉴의 풍텐프랑세즈에서 스페인 기병대를 격퇴하였으나 그 보복으로 스페인 군은 캉브레와 칼레, 아르드르를 점령했다.
1595년 9월 17일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그의 파문을 취소하고 왕위 계승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스페인군은 프랑스에서 떠나지 않았고, 앙리 4세는 6개월 동안 라페르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는데 성공하나 1597년 3월에 스페인의 기습 공격으로 아미엥이 점령되면서 3월 11~12일 동안 파리는 스페인군에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앙리 4세는 기적적으로 병력을 재편성한 후 9월 19일에 아미앵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자신의 서자와의 결혼을 미끼로 브르타뉴 공작을 회유하는데 성공했고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낭트에서 낭트 칙령[15]을 통해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5월 2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베르뱅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을 종전시킨다. 이후 위그노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복구에 힘쓴 뒤,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항쟁을 준비하다가 1610년 5월 10일, 가톨릭 광신도였던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당했다. 암살 당일날에 파리에서는 왕비의 대관식 날이었고 이 때문에 교통체증 상태였는데 이 때를 노렸던 것.
유언은 "으윽! 나 칼에 찔렸다!"였다. 뭐, 저 상황에선 웃을 수도 없는 말이긴 하다.(...)
라바이약은 바로 근위병들에게 얻어맞아 체포되었고,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받았지만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17일 후인 5월 27일 사형에 처해졌는데 거열형으로 끔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서양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연좌제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형사처벌이 없었다. 대신 라바이약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은 라바이약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거주가 허락되었다.
3 평가
본격 프랑스 버전 세종대왕그럼 필리프는? 고려 광종아닐까
건실한 군인이고 뛰어난 정치가였던 만능형 군주
정치와 군사 양면에 모두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고, 그 수완에 걸맞는 업적을 세운데다, 그 업적을 퇴색시킬 실책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인물로 사실상 부르봉 왕조 최초이자 최후의 먼치킨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이 항목에서는 정치만 다뤄지는 데 군사 쪽으로도 재능이 뛰어나 그는 불리해보이는 여러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대 최고의 명장인 스페인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제도 한 번 물 먹였을 정도였다.[16] 오죽하면 그 평가에 인색한 프랑스인들에게 대왕의 칭호를 받았을까. 후대의 루이 이름을 사용한 왕들이 국력을 신나게 말아먹은 것[17]을 보면 그들의 이름이 아까울 정도다.
여담으로 앙리 4세 덕분에 닭은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앙리 4세가 일요일에는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 위정자의 애민정신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앙리 4세 치세 말기와 루이 13세의 치세를 거치며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고, 그랬으니 국민들로부터 선하신 왕 앙리, 앙리 대왕의 칭호를 받았으리라. 코코뱅이라는 프랑스의 닭고기 스튜 요리가 생겨난 때를 이 시점으로 잡는 설도 있으니 그 위상은 알 법하다.이밥에 고깃국 약속도 못지키는 이북의 어느 독재 일가들이랑 비교된다
삼총사에 이따금 앙리 4세가 언급된다. 주로 루이 13세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데, 무척이나 털털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1598년 유럽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 칙령(Edit de Nantes)가 반포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18]
모든 이에게 믿고싶은 종교를 믿을 자유를 부여하노라.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아니된다.
본인도 겪었던 종교전쟁으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한 이 칙령으로 인해 혼돈의 프랑스는 급격하게 안정을 취했는데 이러한 업적을 손자와 현손자[19]가 홀딱 말아먹고 임팩트도 그 쪽이 더 쎄 정작 다른 나라에는 앙리 4세라는 국왕이 있는지도 모른다. 안습.
거기다가 아내가 이혼하고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들 루이 13세를 늦게 본 것이 약점이었다.
4 여담
앙리 4세가 처음부터 개신교였다는 것은 잘못 알려져 있는 것으로, 태어났을 때 세례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방돔 공작이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 반면에 어머니 잔이 아주 신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덕분에 부부간에 종교가 달라서 말 그대로 박터지게 싸웠을 것 같지만, 사실 아버지 앙투안은 정치적 야심도 없었고, 종교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기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거기에 앙투안은 상당한 공처가였던지라 아내에게 항상 눌려서 지냈다.
2007년~2008년 경 몇몇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앙리 4세의 활약을 다룬 연재글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 때 역덕후들은 앙리 4세를 앙간지라 칭하며 칭송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앙리 4세의 업적의 상당수는 부하인 쉴리 공작과 겹친다.[20] 프랑스의 국고를 채우고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다만 귀족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면서 귀족들이 불만이 높아지면서 앙리 4세가 죽은 뒤에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부르봉 왕조가 유독 재상이 일을 더 많이 했다. 리슐리외라든가... 마자랭이라든가...
유명한 사실이지만, 여색을 무진장 밝혔다. 그의 일생을 통들어 그가 거쳤던 여인의 수가 5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덕분에 그의 또다른 별명은 팔팔한 오입쟁이였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국민들이 오히려 이 때문에 앙리 4세를 더 좋아했다는 것. 그야말로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진담으로 통용되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당시 프랑스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문란한 편이었다. 다만 말년에 15살짜리 소녀에게 빠져서, 그녀를 봉신과 위장결혼시키려고 했으나, 봉신이 눈치채고 그녀를 자신의 영지로 데려가버리자, 되찾겠다고 전쟁까지 벌이려고 한 것은 당대에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전쟁준비 중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역사상 호색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왕건이라든가, 왕건이라든가... 정략이나 계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들이 대부분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잠시 만났던 정도였고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또 어떤 의미로건 대단하다. 다만 정부 중 하나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엄청나게 아껴서 마르그리트와 이혼한 후에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문제는 가브리엘이 결혼식 직전에 죽어버렸다는 거. 참고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이 막장인게 첫 아내 발루아의 마르그리트나 앙리 4세나 서로 거침없이 바람을 피고 다녔다. 남편이나 부인이나 잘하는 짓이다.[21] 하지만 이혼과 무관하게 합의로 프랑스의 공주이자 왕비라는 지위는 유지하게 되었고 앙리 4세와 그의 아내 마리 드 메디시스와는 친구로 지냈다.
또 발루아 왕조와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를 매우 증오했다. 일생 일대의 적이었으니...거기에 카트린이 죽을 때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것에 대해 앙금을 가졌다. 덕분에 카트린은 죽은 후에도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어딘가의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혀 지냈다. 그래도 통치자로서의 카트린은 긍정적으로 본 모양인지, 그녀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남편의 죽음으로 졸지에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서 왕위를 빼앗을 생각만 하는 두 가문, 즉 우리 가문(부르봉 가문)과 기즈 가문에 맞서야만 했던 그 불행한 여인이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로서는 자기 자식들이 계속 왕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두 가문을 속여가면서 기이한 사람의 흉내를 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녀가 그만큼이라도 해낼 수 있었다는게 놀랍기만 하다."
그나마 이게 긍정적인 평가라고 하니 카트린에 대한 앙리의 증오를 알 수 있다.
희한하게도 두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는 그렇게 증오하던 카트린느의 친척이었다. 응?[22]
앙리 4세는 죽은 후에 방부처리되어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때 혁명군들이 생 드니 대성당을 약탈하고 훼손할 때 역대 왕, 왕비, 왕족들의 시신을 훼손했는데 그 때 시신도 훼손되고 2개의 구덩이에 모두 파묻혀 생석회로 막아놨다가 왕정 복고 후 루이 18세가 수습하고 복구했다. 이 때 앙리 4세의 머리가 잘려 여러 수집가들 손을 거쳤는데 최근 그의 머리가 확인되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앙리 4세의 나머지 시신 부분과 머리를 이어서 시신을 복구하고 다시 안치한다는 계획이다. 이 머리 미라에서 추출한 DNA를 통해 그의 후손인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될 때 피를 담았다는 호리병이 진짜 루이 16세의 것이라고 확인을 할 수 있었다. 관련 기사 다만 기자가 영어로 된 원본 기사를 그대로 번역했는지 앙리 4세를 헨리 4세라고 썼는데 영어와 프랑스어의 발음 차이일 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혼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번역에 주의를 했어야 했다.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제8요일의 주연을 맡기도 했던 프랑스의 배우 다니엘 오떼유가 배역을 맡았다.- ↑ 앙리 4세가 나바르 왕이 되었을 때는 위그노 전쟁중이어서 대관식을 할 겨를이 없었다.
- ↑ 프랑스에서 손자인 루이 14세와 더불어 대왕 칭호를 받은 두 왕 중 하나다. 다만 루이 14세는 대왕이라고 불러주기엔 암군의 업적도 있었다.
- ↑ 나바라 쪽으로는 후아나 3세로 저 멀리로는 카페 왕조의 루이 10세 후손이다. 따라서 앙리 4세는 부모 양쪽으로 루이 9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 ↑ 자르나크 전투에서 전사한 숙부 루이 드 콩데 공작의 아들이다.
- ↑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가 모두 후사 없이 죽고 앙리 3세마저도 후사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프랑수아가 있었지만 그 역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앙리 3세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차기 왕위계승자인 앙리를 사위로 맞이하여 발루아 왕조의 혈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가톨릭이라면 치를 떨던 잔 달브레로서도 내치기는 아까운 제안이었던 것이, 앙리를 차기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앙리 드 나바라가 프랑스 궁전에 있을때 고려된 적이 있었다.
- ↑ 당시 부르봉 가문과 위그노 전쟁에서 자웅을 겨뤘던 기즈 가문의 살생부에 의하면 앙리는 부르봉 가문의 총수였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차마 새신랑인 사위를 죽일수 없다고 생각한 카트린과 마르그리트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신 심복들을 붙여놓고 밤낮으로 감시시켰다.
- ↑ 나바라 왕국이 위그노에 동정적이 었던 것은 앙리 4세의 외조부 나바라 왕 앙리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나바라와 가톨릭의 악연은 그보다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도하여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대항한 신성동맹에서 나바라 왕국은 중립을 선언했다가 이전부터 나바라를 노리던 페르난도에게 탈탈 털리고 왕가는 파문당한 적이 있었다(…).
- ↑ 앙리 3세의 할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 앙리 4세의 할머니인 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는 서로 남매였다.
- ↑ 하지만 고종하고 철종은 부계로 겨우(!) 17촌 정도의 차이가 났다. 뭐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으니 법적인 촌수는 8촌이었다.
- ↑ 내전에 관여하던 세 세력의 지도자의 이름이 모두 앙리(앙리 드 앙주-앙리 3세, 앙리 드 나바라-앙리 4세, 앙리 드 기즈)였기에 이를 3앙리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 ↑ 앙리 드 기즈의 죽음은 그와 그의 가문이 앙리 3세의 왕권을 노골조로 무시된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앙리 3세는 카트린느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쿠트라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사치를 전혀 줄이지 않으면서 파리 시민들마저 등을 돌렸고, 1588년 5월 12일 결국엔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모후인 카트린느가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 샤르트르로 피신하가 같은해 7월 19일 앙리 3세는 루앙에서 기즈 가문을 위시한 신성 동맹에 유리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 조약을 발표했고 앙리 3세에게도 부르쥬, 오를레앙등 4개의 도시를 신성동맹에게 제공하는 불합리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 ↑ 덤으로 나바르 왕국에 복속되어 있던 안도라 대공의 지위도 이때부터 프랑스 왕이 겸하게 된다.
- ↑ 놀랍게도 추기경이었다.
- ↑ 이때 또다른 유명한 명언으로 "짐은 공동묘지를 통치하고 싶지 않다."가 있다. 이 발언을 통해 가톨릭과 위그노 양대 세력이 저지른 병크에 지쳐있던 민중의 인심이 위그노가 아니라 앙리 4세에게 쏠리게 된다.
- ↑ 후에 손자 루이 14세가 이를 폐기하면서 프랑스 상공업의 주류 세력이던 위그노들의 대량 해외유출 사태를 초래하여 프랑스의 대영국 산업 경쟁력을 크게 깎아먹는다.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를 연상시킨다 - ↑ 물론 파르네제는 그 전에 앙리 4세를 전략적으로 완전히 물 먹이고 파리를 수복한 바 있다. 문제는 가톨릭파의 삽질로 다시 전황이 앙리 4세 측으로 기울어지고 파르네제는 다시 한 번 프랑스로 투입되었다가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하던 앙리 4세에 막혀 큰 성과 없이 철수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 ↑ 아들 루이 13세 제외. 참고로 루이 16세 때는 앞의 두 명의 왕(루이 14세, 루이 15세)이 130년 동안 다 말아먹어서(...) 더 이상 말아먹을 것도 남지 않았다.
- ↑ 이후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된다.
-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이다.
- ↑ 그렇게 보기에는 쉴리 공작이 실제로 정세를 주도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더군다나 쉴리는 앙리 4세보다 한참 어렸고, 그 때문에 프랑스 왕국의 정책에 있어 앙리 4세가 연륜에 기반하여 좀더 선견지명을 발휘한 부분도 없지 않다. 물론 쉴리의 공로가 큰 것이 사실이기에 본문의 말도 틀리지 않지만, 앙리 4세와 쉴리의 관계는 본문에서 연상되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의 관계보다는 루이 14세와 콜베르의 관계에 가깝다. 물론 앙리 4세는 루이 14세처럼 말아먹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앙리 4세가 최종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는 놀랍게도 위그노였던 쉴리의 충고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이때문에 쉴리는 다른 위그노들에게 경멸을 받았고, 위그노였기에 가톨릭들에게도 증오의 대상이었기에 앙리 4세가 암살되면서 실각되고 만다.
- ↑ 사실 마르그리트가 후사를 낳는데 실패해서 그랬던거라는 설이 있다.
- ↑ 이것은 토스카나 대공가였던 메디치 가문의 지참금을 노린 정략적인 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