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라

1 과거 피레네 산맥 스페인/프랑스 지역에 존재했던 왕국

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고대 - 레콘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레콘키스타스페인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왕국카스티야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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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우마이야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아라곤 연합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후우마이야무라비트무와히드나스르
718년 ~ 1492년1492년 ~ 1931년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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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의 국기.윷판...? 착시현상이 생긴다....

영어 : Navarre
바스크어 : Nafarroako
스페인어 : Navarra
프랑스어 : Navarre
한국어 : 나바라

  • 에스파냐의 나바라(Navarra)지역은 프랑스어로는 나바르(Navarre)이다. 때문에 프랑스와 관련해서는 나바르나바로라고 읽혀야 한다.

나바라 왕국이 등장한 것은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기독교 세력은 서북부의 산악 지역으로 위축되었을 무렵이다. 나바라 왕국은 원래 과거 바스크 지방에서 등장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로 수도는 팜플로나였으며 지금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걸쳐 있었다. 원래는 프랑크 왕국의 통치 하에 있는 바스크 공작령이었으나, 824년 초대 국왕인 이니고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여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은 905년 레온 왕국의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평민 반란군 출신에 의한 근본도 없는 국가로 취급당하여 무시받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10세기 중엽 무렵 나라 이름을 다시 나바라 왕국으로 바꾸고 서유럽식의 봉건제도를 도입하여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905년 이니게스 왕조의 이니고의 손자 포춘이 죽자 후사가 없어 형제 산초 1세가 뒤를 이어 히메노 왕조를 창건했다.

조금씩 영토를 확장하던 나바라는 1004년 즉위한 산초 3세의 통치 아래 전성기에 이르렀다. 원래 나바라와 아라곤 지방만 통치하고 있던 나바라 왕국이었지만 산초 3세가 무슬림들을 격파하고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 전체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 때의 위세는 대단한 수준으로 산초 3세는 산초 대왕이라고 불리며 그는 스스로를 이베리아 반도의 황제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단 1대로 그치게 되었는데 1035년 산초 대왕 사후 그의 왕국이 나바라/아라곤/카스티야/레온으로 분할상속되어 갈갈이 쪼개졌기 때문이다. 국가의 분할 이후에도 나바라 왕국은 계속 존재했으나, 1076년 산초 대왕의 손자인 산초 4세가 동생들에게 암살당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나바라의 왕위가 공석이 된 틈을 타 사촌이었던 아라곤레온-카스티야의 국왕들이 개입하여 영토를 분할했다. 결국 이후로 나바라는 한 때 이베리아 반도의 최강국이었다는 명성도 무색하게 피레네 산맥 깊숙히 박혀있는 미니 왕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1234년 산초 7세가 후사가 없이 사망해 히메노 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의 상파뉴 백작 티보 3세와 산초 7세의 여동생 블랑슈의 아들이자 산초 7세의 외조카 티보 4세가 테오발트 1세로 즉위해 상파뉴 왕조를 창건했다. 이 때부터 샹파뉴 영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나바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스페인계라기보단 프랑스 궁정의 일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비슷한 예로 로렌 가문과 기즈 가문이 있다.[1] 이후 1274년 테오발트 1세의 아들 엔리케 1세가 딸 후아나만 남기고 사망하자 후아나가 후아나 1세로 즉위했다. 후아나 1세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필리프 4세와 결혼했는데 필리프 4세는 후아나 1세와의 혼인동맹을 통해 나바라의 왕위를 획득하게 되어 펠리페 1세가 되었으며 나바라는 프랑스의 일부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284년 사실상 상파뉴 왕조는 멸망하고 나바라의 카페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1305년 후아나 1세가 사망하자 펠리페 1세(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루이스 1세(프랑스의 루이 10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루이스 1세는 1314년 필리프 4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왕으로도 즉위했으나, 1316년 사망하여 그의 유복자 후안 1세(프랑스의 장 1세)가 나바라,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5일 만에 사망하자 그의 삼촌 펠리페 2세(프랑스의 필리프 5세)가 즉위했다. 1322년 펠리페 2세가 아들없이 죽고 그의 동생 카를로스 1세(프랑스의 샤를 4세)가 즉위했으나, 역시 아들없이 1328년 사망했다. 프랑스는 필리프 5세때 찾아내어 억지로 해석한 살리카법 때문에 모계 계승이 불가능했으나, 나바라는 이게 없었기에 모계 계승이 가능했다.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는 직계가 끊겼는데 왕위 계승 요구자들의 대립 끝에 그해 필리프 4세의 조카 필리프 6세가 즉위하고 발루아 왕조가 세워졌다. 다만 필리프 6세는 나바라와는 아무 혈연도 없었기에 프랑스-나바라 간 동군연합은 해체되고 나바라의 왕위는 루이스 1세의 유일한 딸 후아나 2세에게 돌아갔다.

후아나 2세는 1328년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서자이자 할아버지뻘인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 필리프와 결혼했는데 이렇게 에브뢰 왕조가 들어서고 필리프는 펠리페 3세로 즉위했다. 1425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자 딸 블랑슈가 블랑슈 1세로 즉위했는데 그녀는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 후안 2세와 결혼했고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세워졌다. 1464년 후안 2세의 딸 엘레노르가 즉위했는데 오빠 카를로스 4세, 언니 블랑슈 2세 모두 후사가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1479년 엘레노르가 사망하자 포와 왕조가 들어섰다. 엘레노르는 포와 공작 가스통 4세와 결혼했는데 포와 왕조의 창건자 프란시스코는 엘레노르의 손자이자 비에나 공작 가스통의 아들이었다. 프란시스코는 1483년 사망했지만 결혼하지 않아 후사가 없어 그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즉위했다.

그런데 1512년 프랑스가 신성 동맹 전쟁으로 바쁜 틈을 타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2] 상(上) 나바라를 점령하고 합병하면서[3] 피레네 산맥 이북의 약간의 영토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나바라 왕위와 피레네 이북에 남은 영토 일부, 즉 하(下) 나바라[4]를 가진 작은 독립 군주국으로 얼마간 존속하였다. 1517년 카타리나가 사망하자 그의 남편이자 달브레 공작이었던 후안 3세가 즉위하고 달브레 왕조가 세워졌다. 1555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후아나(프랑스의 잔 달브레)가 뒤를 이어 후아나 3세로 즉위했다. 후아나 3세는 프랑스의 방돔 공작 앙투안과 결혼했는데 이렇게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앙투안느(프랑스의 방동 공작 앙투안)는 1562년 사망하고 후아나 3세도 1572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엔리케 3세가 즉위했다. 엔리케 3세는 그해 발루아 왕조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그런데 1589년 프랑스의 앙리 3세위그노 전쟁에 휘말려 암살당하고 발루아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그가 프랑스의 앙리 4세로 즉위했다. 그래서 샤를 4세가 사망한지 261년 후에 다시 한 번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이 결성되었다.

엔리케 3세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 되면서 부르봉 가문은 엔리케 3세, 즉 프랑스의 앙리 4세에 의해 단 1대 만에 왕위 두 개를 차지하는 벼락출세를 달성했다. 엔리케 3세가 1610년 암살당하고 그의 장남 루이스 2세(프랑스의 루이 13세가 나바라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사실 나바라는 영토가 극히 작았기에 크게 의미가 없었고 루이스 2세, 즉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아들 루이 14세 때 나바라 왕국은 폐지되고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래서 나바라 왕국은 사라지고 대신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라는 것으로 프랑스 왕위에 따라붙는 부가적인 칭호로만 남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시기 루이 16세의 칭호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에서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흔적조차 없어져 루이 16세를 끝으로 소멸했다. 그 후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복고 왕정 시기에 잠시 부활했지만 루이 필리프 1세가 다시 "프랑스 국민의 왕"을 칭호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2 스페인의 자치 지방

스페인 자치 지방
자치 지방
안달루시아아라곤아스투리아스발레아레스 제도
바스크카나리아 제도칸타브리아카스티야 라 만차
카스티야 이 레온카탈루냐에스트레마두라갈리시아
라 리오하마드리드나바라발렌시아
무르시아
자치 도시
세우타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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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지방의 주기. 나바라 왕국의 문장이 가운데에 있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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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초록색 부분.

2.1 개요

주도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던 팜플로나이며, 지역민의 50% 이상이 팜플로나에 살고 있다. 현재도 바스크인들이 많은 지역이며, 바스크 지역과 비슷하게 바스크어스페인어와 함께 통용되는 편이다. 지역의 유명한 스포츠 구단으로는 팜플로나의 CA 오사수나가 있다. 크게는 남부, 중부, 북부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편. 북부는 바스크어 다수 지방이고, 남부는 카스티야어 다수이며, 팜플로나 시를 포함한 중간지대는 두 언어 다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피레네 산맥의 영향으로 기후가 매우 다채롭게 나타나는데 높은 곳은 해발 2,500미터 정도까지 올라가며, 지역의 상당 부분이 고원 기후를 보인다. 그러나 북부 지역은 대서양 인근까지 접해 있어 해양성 기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대체 에너지가 활성되어 있는 이 지역은 지역 전력을 60% 이상을 대체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는 그 중 전력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피레네 지역의 풍력을 이용한 풍력 발전, 15% 정도의 피레네 지역의 낙차를 이용한 수력 발전을 포함한 것이다. [5]

주요 산업은 나바라 지역의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한 관광업이나 피레네 인근에서의 축산업 등이 대표적인 산업이다. 폭스바겐 폴로가 생산되는 폭스바겐스페인 공장이 팜플로나에 있다.

2.2 바스크 지역과의 관계

대대로 바스크 족이 살았던 지역으로 바스크어가 통용됨에도 불구하고 바스크 자치 지역에 속하지 않으며, 바스크 독립 시에 함께 독립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스페인 내전 때도 반란군을 지지한 전력이 있다. 게다가 ETA의 테러 활동에 피해를 입은 전력이 있고, 바스크 자치 의회 건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자치 정부를 수립한 바가 있다. 나바라에서는 바스크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는 여론이 상당수이며, 바스크 지역에서는 나바라를 통합하기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형편. 애초에 바스크어와 문화가 확고하게 대다수인 바스크 자치공동체와 달리 나바라는 바스크어권과 카스티야어권이 반반씩으로 나눠 먹고 있는 곳이고, 바스크 민족주의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카스티야계 주민들도 많다.

3 프랑스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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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깃발. 사실은 나바라 국기 복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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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쪽 노란 부분 중에 가운데 부분.

프랑스 북부 바스크 지역의 일부분으로 흔히 저지(低地) 나바르라고 불린다. 지역의 대표도시는 생 장 피 드 포르(Saint-Jean-Pied-de-Port). 중소규모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중세로부터 이어지는 산티아고 대성당[6] 순례길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으며, 현대에도 속칭 "프랑스 길"[7]의 출발지로 여겨진다.

4 타이의 대모험의 등장인물

파일:Attachment/Dragon Quest Merle Nabara.png

성우는 에모리 히로코.
떠돌이 점술가로 손녀인 메를르와 함께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점성술로 마왕군이 언제 침략할지 미리 알고 피해다녔던 것. 염세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던 중 벵가나 왕국에서의 사건으로 타이일행과 만나게 되고 타이가 용의 기사라는 것을 눈치게게 된 후 테란왕국으로 안내하게 된다.

후에 타이의 검을 만들 단서를 찾을 때 다시 나오는 데 이 때는 손녀에게 점술가를 맡기고 자신은 은퇴한 듯 하다.

5 진 여신전생 4의 등장인물 나바르

자세한 정보는 나바르 항목 참조.

6

큰 수의 단위
비바라(毘婆羅)1067699845898419233783545856
나바라(娑婆羅)10135399691796838467567091712
마라라(摩攞羅)

를 이만큼 봐라

화엄경에 등장하는 수. 지수로 표현하면 10135399691796838467567091712이다.
  1. 이들은 처음엔 독일계 로트링겐 공국의 지배자들이었으나 점차 프랑스 궁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로렌은 로트링겐을 프랑스식으로 읽은 것이다.
  2. 나바라의 여왕 엘레노르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는 모두 후안 2세의 자식들이지만 둘은 이복남매이다. 엘레노르는 나바라의 여왕 블랑슈 1세의 소생이고 페르난도 2세는 블랑슈 1세가 죽은 후 후안 2세가 새로 맞이한 후아나 엔리케즈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안 2세 사망 후 나바라는 엘레노르, 아라곤은 페르난도 2세에게 돌아갔다.
  3. 이 때 나바라 왕의 엔리케 2세의 매제이던 체자레 보르지아가 나바라의 장수로 참전했다 허무하게 전사했다.
  4. 베스 나바르(Basse - Navarre)
  5. 60% 중 나머지 5% 가량은 바이오매스와 바이오가스 발전을 활용하고 있다고.
  6.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무덤이 있으며, 중세 가톨릭 사회에서는 예루살렘과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와 함께 3대 순례 성지로 꼽혔다.
  7. 현재 산티아고를 향하는 수많은 순례길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