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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남송의 명장
1.1 개요
孟珙 (1195년~1246년)
송나라 강주(絳州)를 원적으로 두었으며 수주(隨州) 조양(棗陽) 출신이다. 자는 박옥(璞玉)이고 호는 무암거사(無庵居士)며 시호는 충양(忠襄) 또는 충안(忠安)이다.[1] 악비의 부하로 활약한 맹안의 증손, 악가군의 일원이었던 맹림의 손자, 일종의 사병인 충순군(忠順軍)을 이끌던 맹종정의 아들이다.
1.2 젊은 시절
대대로 무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맹종정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훈을 세운 명장이었다. 맹공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잘 남아있지 않은 편이나, 일찍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1217년 금나라가 늘 그래왔듯이 남송을 침공하였으나 맹종정은 양양과 조양 등지에서 이를 막아내었다. 이 때 맹공은 적군에게 둘러싸인 아버지를 보고 기병과 함께 돌격해서 구해냈다고 한다.
맹종정은 양양과 조양 지역의 군사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화북 지방에서 흘러온 유민들을 모아 충순군이라는 부대를 따로 조직하였고, 맹공이 맹종정의 뒤를 이으면서 2만 명이 넘는 이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1.3 금나라와의 전쟁
1219년 금나라의 완안와가가 대군을 이끌고 조양을 공격해 오나 참패하여 물러났다. 맹공이 이 때 성 위에서 여러 명을 활로 쏴 죽이고 부친에게서 군사를 받아 적을 파하여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1221년 광화현의 현위로 임명되어 정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과거시험 급제로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군인으로만 대우받았고, 조정에서의 입지는 별로 없었다.
1223년 아버지 맹종정이 죽는다. 맹공은 충순군을 물려받고 여타 유민들까지 합쳐 둔전을 시행하였으며, 그 와중에도 착착 승진을 해 나간다.
금나라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나라와 남송의 경제력 차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비등하다 보니 금나라는 어떻게든 남송을 삥뜯어서 국력을 보충해야겠다는 발상으로 몽골에게 맞으면서도 계속 남송을 공격하였다. 금나라는 1232년 삼봉산 전투 에서 몽골군에게 패해 망조가 들자 1233년 항산공 무선에게 대군을 주어 남송을 침공하지만, 맹공은 이를 수 차례 격파하고 항복하는 자들은 잘 대우해 주어서 선무공작까지 잘 해낸다. 한 편으로는 유민들을 받아 둔전에 포함시키고 군사력을 확충하는 것도 지속한다.
이쯤 되자 금나라 애종은 남송에 순망치한 화친과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 이후로 계속 얻어맞던 원한이 쌓인 남송은 이 때야말로 복수할 기회라고 여겨 몽골과 손을 잡고 금나라를 공격한다. 맹공은 금나라의 최후를 알린 채주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거듭된 승전으로 맹공은 수도 임안에 가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 된다.
1.4 몽골 제국과의 전쟁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남송 중앙 정부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여론이 우세해졌고, 맹공은 반대파였지만 명령을 따라 일부 공격을 지휘했다. 하지만 곧 반격에 물러나야 했고 이로써 몽골 제국은 1235년 3군을 편성하여 남송을 전면적으로 침공한다.[2] 이것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사천성, 동쪽으로는 지금의 황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고 몽골 제국이 남송을 멸하기 위해 작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몽골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같은 해 사천의 성도가 함락됐고 이듬해인 1236년에는 금나라 앞에서 우주방어를 자랑하던 양양도 함락되고 다음해인 1237년에는 맹공이 주둔중인 호북성 황주(黃州)까지 공격받았다.
이에 맹공은 우선 1236년 강릉 전투에서는 허장성세와 기습을 동원해 몽골군을 물리쳤으며, 1237년 황주 방어전에서는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주방어는 물론이고 적 선단을 불사르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포위망을 뚫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 때 몽골군은 화포도 동원하였지만 성루 밖에는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곧 맹공은 전선의 3분의2를 총괄하는 직책에 올랐고 1238년부터 공세에 나섰다. 각 방면의 지대장들이 연거푸 승리를 거두어 몽골군이 느슨해지자 맹공은 1239년 몽골군이 중시하지 않고 내버려둔 양양을 탈환하여 우주방어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240년에는 한때는 그의 동료였지만 이제는 몽골군의 대장이 된 장유가 그의 방식을 흉내내며 공세를 준비하자 선제공격으로 몽골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패퇴시켰다. (등양 전투)
형주를 비롯한 중부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맹공은 서쪽으로 가서 사천 탈환과 방위에 진력했다. 맹공의 형제들도 휘하 장수로서 참여하였다. 맹공과 형제들은 역시 이번에도 우주방어를 펼치며 몽골군의 취약점을 찔러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대오채 전투)
1241년 오고타이 칸의 죽음과 함께 1차 송몽전쟁이 끝나자, 맹공은 몽골이 신경을 못 쓰는 틈을 타서 일부 지역을 추가로 되찾고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방어선을 탄탄히 다졌다. 한 편으로는 맹공의 지나친 군권에 송나라 조정에서는 불안감을 느끼고 견제를 하려 했다. 이에 맹공은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내었다.
1.5 말년과 평가
맹공은 50세 정도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나, 그가 확립시킨 방어선과 전술들은 한동안 남아서 그의 사후로도 남송이 30년 간 더 버티는데 일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형제들과 아들 맹지경도 무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인품은 스스로를 무암거사라 칭했듯이 검소하고 청렴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황제가 의견을 묻자 본인은 사실 의견이 다르지만 무난하고 모범적인 대답으로 잘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 군기만큼은 엄정히 유지했고 멋대로 직무를 이탈하면 참수했다. 그럼에도 그는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면모를 보여 존경을 받았다.
당대 최강이라던 몽골 제국의 주력 부대를 방어전 뿐 아니라 야전에서도 여러 차례 격파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한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고 총사령관이라 직접 나서지 않은 전투도 있다보니 여러모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장군이다. 결국 남송이 이집트나 베트남처럼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 것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