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

400px-Yue_Fei_temple_12.jpg
岳飛
1103년 03월 17일 ~ 1142년 01월 27일

중국인에게 "중국사의 영웅은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면 일단 가장 먼저 나올 인물.

1 개요

중국 북송 말기의 무장으로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명장. 는 붕거(鵬挙). 시호는 충무(忠武).[1][2] 흔히 악왕(鄂王)이라고 일컫는다.

1.1 생애

야사는 그가 태어날 당시 황하가 범람해 그의 아버지 악화[3]는 익사하고, 그의 어머니 요부인은 악비를 안은채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그 후 큰 가 지붕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북송이 멸망할 무렵에 의용군을 조직해 금나라에 항거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송에서 장군이 되어 악가군을 조직해 수많은 무공을 세운 명장이다. 얼마나 강했는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움직이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움직이기는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낙양과 정주 등을 회복했다. 또 악비는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불과 40여리 떨어진 주선진까지 점령했다. 이 때 금나라 대장 올술은 여러번 패전하자 개봉을 버리고 퇴각하려고 했으나, 한 문관의 만류로 개봉을 끝까지 수비한다. 그 문관은 올술의 말고삐를 잡으며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하면 외지에서 아무리 능력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올술은 문관의 말을 들었다.

악비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전쟁시에는 이를 금했다. 그러나 금나라 수도 근처의 황룡부까지 진격하면 병사들에게 거나하게 먹자고 약속하고 다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과 화친해야한다는 온건파의 거두 재상 진회와 여러 차례 마찰을 겪었는데, 북송이 멸망한 뒤 북쪽에 있던 한족들은 여진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송인의 일부는 여진족과 싸워 국토를 회복해야한다는 의견이 들끓었으며 악비는 그 주전파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송황제 고종도 진회쪽에 더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를 12번이나 불러 소환시키고 악비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일설에는 살가죽을 벗겨 죽였다고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독살 당했을 것으로 본다.

이때 악비의 전우이자 또다른 주전파인 한세충이 "악비의 죄가 무엇이오?"라며 따지자 진회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막수유, 莫須有)라고 대답했고 한세충은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며 한탄했다 한다.

1.2 그의 무덤

그의 시체를 진회가 훼손할 것을 두려워한 옥지기가 악비의 시체를 자신의 집에 묻었고, 자신이 죽을 무렵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후에 악비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악비의 묘는 크게 지어졌고 커다란 동상도 만들어지게 되어 악왕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매국노 진회는 물론 그 부인 왕씨, 묵기설[4], 장준[5]과 함께 무릎 꿇고 있는 동상이 만들어져 악비 동상 앞에 놓이게 된다. 아내의 동상까지 만들어진 것은, 진회조차 죽이기를 주저할 때 아내의 재촉으로 처형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6]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도 부부에게 침을 많이 뱉어서 지금 악왕묘를 가보면 동상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근데 사람들이 아직도 싫어하는지 침이나 쓰레기 투척은 예사고 오물 투척도 툭하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섭다는 공안이 이런 오물 투척을 한 사람을 폭력을 안 쓰고 팔짱 끼고 끌고간 것을 보아 아마 정부에서도 워낙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 적당히 봐주는 듯.

dsc00076_p.jpg
이 짐승에게 먹이침을 뱉지 마시오

등 뒤에는 젊었을 때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 진심으로 충성해 나라에 보답한다)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문신을 어머니가 새겼다고도 하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평생을 나라에 충성하고 억울하게 죽은 비운의 명장으로, 중국인들에게는 관우와 비견될 정도로 추앙받는 한족의 영웅이다. 이름이 같아서인지 야사에서는 장비의 환생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2 재평가

파일:/image/036/2004/03/04/021105000120040304499 70.jpg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을 실시하면서 여진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을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좀 사그라들고, 대신 진회가 민족통합의 선구자로써 재평가받고 있다.[7] 이를테면 교과서 등에서 악비를 가리키는 '한족의 영웅'등의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같은 이유에서 악비의 전공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8]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비의 전공의 상당수는 송이나 금의 공식기록이 아니라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에 남아있으며 교차검증이 안 되는데다가 몇백 명의 보병으로 몇만 명의 기병을 몰살시켰다는 식의 황당한 전과가 많아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금사(金史)를 보면 악비가 패한 기록이 여럿 있는 등 그의 전공에 대해 영웅화가 걷혀지고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는 분위기. 거기에다, 악비 때문에 동시대에 전공을 세운 이들(종택[9] 등)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부분 또한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인들 중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악비의 시《만강홍》(滿江紅) 역시 명나라 시대의 위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더구나 악비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한족 반금의병군을 습격하여 전멸시키거나 남송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로 군량과 전비를 요구하는 등 조정내부에서도 악비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없었다. 특히 악비가 본격적으로 영웅시 된 것도 처형 후 40년이 지난 후로 남송이 국가적 위기를 이기고 전성기를 누리는 동시에 다시 북벌을 하였던 시기였고 당시 상황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은 뒤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중국 학계에서 악비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여전히 악비는 중국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고.

여하튼 덕분에 악왕묘의 진회는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일어서게 되었다(...). 일어나는게 더 힘들거 같은데...

3 대중문화 속의 악비

김용무협 소설 중에서 남송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사조영웅전》,《신조협려》에는 악비가 쓴 병법서인 무목유서가 등장한다. 아무래도 무협 소설인지라 병법서는 별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곽정이 이것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악비를 섬기는 사당은 악왕묘라고 한다. 그런데 악비보다 약간 이전 시대를 다룬 수호전에서 악왕묘가 나온다. 후수호전에서 악비가 특별출현했다.(덤으로 한세충도) 시간을 달리는 악비[10]

무협소설에서는 이 악비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무림세가산동악가가 나오기도 한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악비인 만큼 야사도 몇가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하나는 악비의 성품을 보여준다.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청년 시절의 악비가 어느 부자집에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그 집은 전염병으로 아리따운 딸과 하인들만 남고 가족들이 모두 죽은 상태였다. 딸이 울며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을 아내로 거둬달라 청했는데 올곧은 악비는 부모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홀로 남은 여성을 아내로 거둘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시신만 수습하여 극진하게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딸이 악비와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길

'선비님은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시신을 거두고 제를 올려주셨으니 훗날 그 이름이 빛날 충신이 되실것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인 저의 청을 거절하시고 거둬주시지 않으니 그 끝이 좋지 못하실듯 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악비가 떠나자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악비는 남송의 충신으로 길이 남았지만 결국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11] 미소녀의 청을 거절하다니 악비가 잘못했네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는 송고종에게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회가 이를 반대하자 황궁에서 퇴청한 후에 진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진회가 금나라에게 이길 수 없고 금나라에 있는 송휘종, 송흠종을 죽일 것이라 하자 분노하고 다음날에 9족과 함께 처형된다.

목만 남은 채로 살아있다가 엔란(앵란)으로부터 죽은 자를 3일간 살릴 수 있는 금황구침을 맞고 좀비인 상태에서 살아나면서 엔란과 함께 나머지 금황구침 8개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한세충과 함께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로부터 의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의술, 명성을 흠모해 속가제자가 되었고 진회와도 동문이라고 한다.

청나라 시대 소설 설악전전(説岳全傳)을 각색하[12]여 만든 사극 정충악비가 있다.

소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설악전전이 제일 유명하지만 퀼리티는 기대하지 말자. 스토리 라인은 판타지 급으로 아주 역사와는 거리가 멀고[13] 파워 밸런스도 엉망이라 전쟁의 승부는 우주급 맹장이 아니면 법술을 쓰는 종교인들이 좌우지한다. 그래도 800근짜리 무기가 날아다니고 혼자서 백만대군을 쓸어버리는 수당 관련 소설보다는 낫다.

3.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나온다. 일러스트도 39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미청년으로 나왔다. 물론 삼국지한정으로 미래무장이다. 능력치는 정치빼고 삼국지 무장들과 고대무장들, 심지어 삼국지 시리즈에 잠시 등장했던 노부나가의 야망의 무장들보다 능력치가 매우 좋다. 위에 보다시피 악비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대놓고 먼치킨형 능력치다. 11편에서부터 지력이 78으로 내려가나 12편 80대 중반으로 늘어났다. 완전체가 되었다. 그리고 12편부터 미래무장(고숙, 양대안, 진경지, 위정국, 진경, 이세적, 진양옥, 정성공)이 대거 삭제가 되었는데 악비만 나온다.

삼국지 9에서는 통솔 95/무력 91/지력 87/정치 56 보병, 기병, 궁병은 2개 이상에 궁기, 지식, 모략, 책략 1개인 완전체 무장이다. 의리과 지력이 높으니 이간지랄과 허보도 안 통한다.

삼국지 10에서는 지력 80, 정치 37으로 내려가고 매력 97이 추가되었다. 특기 수는 14개이며 주로 장합조운과 비슷한 편이다. 여기서도 먼치킨지만 비교적으로 주호가 있어서 인맥외에는 별 특징이 없다.

삼국지11에서는 95/91/78/31/98의 능력치이다. 지력이 70대 후반으로 너프되나 장수치곤 높은 편이지만 지력이 아주 높지는 않은데, 특기가 통찰이기 때문에 계략이 먹히지 않는다. 말그대로 개사기 무장이다.역시 코에이도 악비를 인정하는군 다만 병종적성은 창적성 S외에는 병기빼고 올A이란 점으로 밸런스가 어느정도 맞는편이다.(...) 아무리 창적성이 S지만 창장이 아니면 거의 방어력이 약한 부대에 불과하고 가능한다면 지도를 가진 무장과 조합하여 병과적성(극병, 노병, 기병)를 키워주는게 좋다. 친한무장은 관우강유. 혐오무장은 초주이다.

삼국지 12에서도 젊은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보다 상승하여 99/91/86/31이고 병종은 기병. 전법은 의용병으로 무시무시한 성능을 자랑한다. 또 내정 특기는 연병, 병심, 감시, 보수에 신무장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호걸과 귀모 특기를 동시에 가진 무장이다. 게다가 기병이라 신속도 있다. 매력 삭제로 인한 보상책인지 지력이 꽤 높아져서 군사 특기를 얻으면 군사로 사용해도 좋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12편 시절의 통솔 99, 무력 91, 지력 86, 정치 31. 특기는 훈련 9, 순찰 9, 위풍 7, 신속 8, 분전 9, 연전 9, 공성 5, 수영 7, 일기 8, 호걸 8, 귀모 4에 병과적성은 창병과 궁병이 S이며 기병이 A다. 전법은 사자분진이며 중신특성은 창술조련.

4 기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이지란/퉁두란,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와는 먼 친척뻘이다. 족보상으로 따지면 악비 쪽이 한참 조상님이 된다. 청해 이씨 족보에서는 남송의 명장 악비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다섯째 아들인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또한 그 이지란의 여진족 사촌의 후손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라고 한다. 정확히는 이지란의 출신이 여진족중에서도 건주여진 출신인데, 종형제중 하나가 같은 부족의 맹가첩목아(猛哥帖木耳)이고, 그의 6대손이 누르하치. 본격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명문가 클래스. 하지만 머나먼 후손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가 금나라의 명목상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가 되고 말았으니(...) 영원히 고통받는 악비...

  1.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로 개정.
  2. 나라에 공이 큰 무관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 촉한의 제갈량, 조선의 이순신 장군도 같은 시호를 받았다.
  3. 당연히 수호전의 철규자 악화는 아니다.
  4. 万俟卨,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 진회를 도와준 간신. 후에 일을 잘못해 쫒겨나 유배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고향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그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
  5. 원래 항전파였으나 나중에 악비를 배신했다.
  6. 그 때문인지 진회와 왕씨 사이에서는 자손이 없었다. 나름의 업보.
  7. 진회가 비록 간신이었긴 했지만 나름 노력을 했던 흔적은 보인다. 적어도 나라를 금나라에 팔아 넘기려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8. 실질적으로도 악비가 영웅시 된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악비가 본격적으로 영웅시된 시대적 상황은 한족이 이민족은 여진족에게 120년간 중국 절반이 억압당했고 몽고족인 원나라 시대에는 한족 전체가 비참한 노예시대인 만큼 한족들의 영웅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시대였다.
  9. 宗澤. 1059 ~ 1128. 북송 말의 장군으로, 악비 또한 당시 그에게 발탁받아 휘하에서 활동했다. 유언/실존인물 항목에 실린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란 유언으로 유명하다. 다나카 요시키창룡전에서 해당 고사를 얘기하면서 "제갈량과 더불어 '한 사람의 죽음에 전군이 통곡한' 사례"라며 극찬한 바 있다.
  10. 단 여기서 원문 언급은 악왕묘가 아닌 악묘로 악비가 아닌 오악(태산, 화산, 숭산, 형산, 항산)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11. 여담이지만, 조선시대에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김여물과 관련해서도 이 비슷한 야사가 전한다
  12. ...였다고는 하나 소설 자체에 병맛스런 전개가 많은편이라 오히려 정사를 뼈대로 하고 적당한 오리지널 요소와 소설의 요소들을 아주 약간 섞었다고 하는게 다 타당하다.
  13. 칭기즈 칸이 타임워프로 한세충과 대결을 벌리는데 신분 설정이 훗날 황제가 될 쿠빌라이 칸의 아버지라서 쉴드가 자동으로 쳐지는가 하면, 악비가 죽자 금나라가 침공하는데 악비의 아들의 반격으로 금나라 본토까지 쳐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낸다는 등등 초월적인 전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