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불린

메리 불린(Mary Boleyn).
(1499?1508?-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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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불린의 언니이자 한때 헨리 8세의 정부.


1 생애

파란만장한 여동생의 삶에 가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필리파 그레고리의 (매우 부정확한) 역사소설 <천일의 스캔들The Other Boleyn Girl>의 주인공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불린 가문의 히버 성(Hever Castle)에서 유능한 외교관 토머스 불린과 잉글랜드의 명문 귀족 하워드 가문의 영애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딸로 태어났다. 누이인 앤과 남동생 조지가 있다. 정확하게 누가 첫째, 둘째, 셋째인지를 명시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증거로 미루어 메리가 장녀, 앤이 차녀, 조지가 막내라고 보는 설이 대세이지만 메리가 차녀라고 하는 설도 남아 있다. 정확한 출생시기 기록이 없다. 메리가 첫째인 경우 생년은 1499-1500년으로, 차녀인 경우 생년을 1508년 정도로 추정한다. 메리를 장녀로 보는 경우 메리의 아들이 외조부 토머스의 상속권을 주장한 것을 증거로 보기도 한다. 메리가 차녀였다면 당시 귀족사회의 특성상 토머스의 상속권은 당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돌아가고 그녀의 자손이 상속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1]

메리는 금발에 흰 피부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앤과 달리 당시 미인의 기준에 부함하는 외모였다.

1514년,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가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결혼했다. 토머스 불린은 딸 메리를 메리 튜더의 시녀로 딸려보내 프랑스에서 유학시켰다. 1515년 메리 튜더가 남편이던 왕이 승하하고 잉글랜드에 돌아갔을 때, 메리는 새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의 끌로드 왕비의 시녀로서 프랑스에 남았다. 이 때 10대였던 메리가 프랑수아 1세의 정부가 되었고 한편으론 상당히 난잡한 성생활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프랑수아 1세는 그녀를 두고 "가장 수치스런 창녀", "나의 전용마차"("a great slag, infamous above all", "my hackney")라고 하기도 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메리가 누구나 올라탈 수 있는 "잉글랜드산 암말"("The English Mare")이었다고 하기도.

어쨌거나 이런 추문으로 인해 1519년에 아버지에 의해 잉글랜드로 귀환한 메리는, 1520년에 24세의 청년이자 헨리 8세를 가까이서 모시던 윌리엄 캐리와 결혼했다. 캐리는 땅이 있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왕을 가까이서 수행했으므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궁정에서 근무하는 캐리와의 결혼으로 메리 또한 왕궁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522년에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자매 앤과 함께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저택 요크 플레이스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가한다. 궁정의 여성 중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뽑아 여러 미덕 중 하나의 역할을 시키는 행사였는데, 여기서 앤은 "인내Perseverence"였고 메리는 "상냥함Kindness" 역할을 맡았다.

아마도 이 무렵에 메리가 헨리 8세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된 듯 하다. 1528년 왕이 추진하던 앤 불린과의 결혼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의회의 의원이 왕에게 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자매 메리 불린과도 정을 통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자, 왕은 얼굴을 붉히면서 "한 번도 어머니랑은 자지 않았다"라고 부인했다. 1532년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는 칼레에 방문한 헨리 8세와 앤을 따라온 메리에게 헨리 8세와 동침하지 않았느냐고 발언했다. 정확하게 헨리 8세가 메리에게 관심을 잃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525년 중반 정도로 추정한다.

1524년에는 장녀인 캐서린을 낳았고, 1526년에는 아들 헨리를 낳는다. 헨리는 헨리 8세의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는데, 왕과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다른 정부 베시 블라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는 왕의 사생아에게 하사하는 성 "피츠로이"를 붙여 주고 공식적으로 서자라 인정했지만, 헨리 캐리에게는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1526년에는 이미 헨리가 메리의 여동생 앤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1528년 메리의 남편 윌리엄 캐리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직후 헨리 8세는 메리의 두살배기 아들 헨리 캐리의 양육권을 앤 불린에게 주었다. 1532년 헨리 8세와 앤 불린이 왕과 (사실상) 왕비로서 프랑스의 칼레에 방문하였을 때 메리는 앤을 수행했다. 칼레에서 메리는 윌리엄 스태포드라는 병사를 만나게 된다.

1533년 헨리 8세는 드디어 앤 불린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메리는 칼레에서 만난 평민 병사인 윌리엄 스태포드와 비밀리에 결혼했고, 스태포드와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출산했다. 윌리엄 스태포드는 돈도, 명예도 없고 귀족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연애결혼으로 보인다.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된 불린 가문에서는 가문의 명예에 손상을 입힌 메리의 비밀 결혼에 분노했으며, 메리와 윌리엄 스태포드는 궁정에서 쫓겨나 불린 가문의 영지엔 에섹스의 로치포드 홀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메리는 곧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토머스 크롬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후에는 스태포드가 여러 저택을 하사 받으면서 경제적인 사정은 약간 나아졌다.

1536년, 유산을 거듭하며 아들을 낳지 못했던 앤 불린과 남동생 조지 불린이 처형을 당한다. 궁정에서 떨어져 살고 있었던 메리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다. 그로부터 8년 후, 메리는 숨을 거두었다.

이후 메리의 자녀들의 삶은 순조롭게 풀렸다. 메리의 장녀 캐서린 캐리는 헨리 8세의 4번째 부인 클레페의 앤의 시녀로 입궁했고, 유망한 젊은이 프란시스 놀리스 경과 결혼했으며, 이후 엘리자베스 1세로 즉위하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아들 헨리 캐리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 받았다.

2 매체에서의 메리 불린

2.1 천일의 스캔들에서의 메리 불린

2008년 영화인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이 역할을 맡았다. 앤 불린역은 나탈리 포트만

필리파 그레고리의 동명 역사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헨리 8세의 정부로서 메리 불린에 주목해 왕을 유혹하려는 두 자매간의 미묘한 질투와 경쟁을 그려냈다.

2.2 울프 홀에서의 메리 불린

배우는 채리티 웨이크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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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왕의 정부였지만 동생 앤에게 밀려 팽당했고, 집에서도 천덕꾸러기인 퍽 딱한 신세로 묘사된다. 자신 말마따나 "악명 높은 처녀"인 동생 앤과 달리 남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한 편. 자신을 무시하는 불린 가문에 대한 복수를 할 겸 토머스 크롬웰에게 자기와 결혼하지 않겠냐는 은근한 유혹을 흘리기도 한다. 어안이 벙벙한 크롬웰의 표정이 압권.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지옥의 처가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신분도 낮고 가난한 윌리엄 스태포드와 결혼을 한 것이 발각되어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녀의 선택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우리 남편은 적어도 나를 사랑해!" 라고 한 마디 퍼부어주고 나간다.
  1. 또 사실이건 아니건 후일 프랑스 궁정에서의 추문이 나올 정도였고 프랑수아 1세의 정부였다면 이를 고려해 봤을때 적어도 당시 10대 중후반의 나이는 되었어야 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