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샤를 8세 | ← | 루이 12세 | → | 프랑수아 1세 |
이름 | 루이 12세(Louis XII) |
생몰년도 | 1462년 6월 27일 ~ 1515년 1월 1일 (52세) |
재위기간 | 1498년 4월 7일 ~ 1515년 1월 1일 |
출생지 | 프랑스 블루아 |
사망지 | 프랑스 투르넬 |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드 발루아의 손자이며 그를 계승한 샤를 도를레앙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샤를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에게 포로로 잡혀 1140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때까지 25년 동안 잉글랜드의 포로로 있었다. 왕이 될 가능성은 없는 사람이었지만 14살 때 루이 11세의 차녀 잔 드 프랑스와 결혼하고 칠촌 조카 샤를 8세의 매형이 되면서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샤를 8세 제위 원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투옥되었다가 1491년 풀려났으며 이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하여 제노바를 점령하고 밀라노를 위협하였다.
샤를 8세의 아들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자 살리카법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잔 드 프랑스와 이혼하고 샤를 8세의 미망인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였다[1][2]. 이때 이혼을 허락받기 위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를 후원했으나 교황 사후 이를 철회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2차 이탈리아 전쟁과 3차 이탈리아 전쟁을 벌였다[3].이 전쟁이 프랑스에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이끌어오는데 영향을 주기도 하였고 후임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치세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전쟁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비군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수리시설 개선, 농민 보호, 관료조직의 확충, 지방관습법 편찬, 소송제도의 개선을 단행함으로써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 칭호를 얻게 되었다[4]. 1514년 왕비 안이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여동생이자 헨리 7세의 딸 메리 튜더와 결혼했다.
52살의 루이 12세는 18살이었던 메리 튜더와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꼭 낳으려고 했다. 이미 이전에 두 번이나 결혼했음에도 두 딸 외에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한지 3개월 만인 1515년, 그는 침실에서 격심한 활동을 하다가 복상사(...)했다. 이에 왕위는 루이 12세의 사촌조카이자 사위가 되는 프랑수아 1세에게 가게 되었다.- ↑ 안 드 브르타뉴에게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이 청혼한 것이 루이가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안과 결혼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브르타뉴가 신성로마제국에게 넘어갈 경우,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동부의 플랑드르와 서부의 브르타뉴 양 측면에서 포위되기 때문이다.
- ↑ 한편 또다른 이유로는, 안이 임신을 못 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샤를 8세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루이 11세는 지방 각지의 봉건귀족들을 제압하며 서유럽 최초로 중앙집권을 수립했는데, 제아무리 왕족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귀족인 루이 12세 집안이 탐탁치 않게 보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딸이기는 하지만 임신을 못 하는 여자와 결혼시켜서 자연스럽게 대가 끊어지게 하려 한 것. 이후 안은 수녀가 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 ↑ 시기로 치면 1499~1504년, 1508~1516년. 다만 루이 자신은 1515년에 죽었고, 뒤를 이은 프랑수아 1세가 전쟁을 계속했다.
-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제 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에서, 이런 루이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전쟁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튼튼해진 것이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한편 루이 자신이 근검절약했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