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연의 역대 군주 | ||||
2대 열종 혜민제 | ← | 3대 중종 소무제 | → | 4대 소문제 |
모용보 | ← | 모용성 | → | 모용희 |
생몰년도 | 373년 ~ 401년 음8월(29세)[1] |
재위기간 | 398년 음6월 ~ 401년 음8월(3년)[2] |
묘호 | 중종(中宗) |
시호 | 소무황제(昭武皇帝) |
연호 | 건평(建平) 398.6~399.1 장락(長樂) 399.1~401.8 |
부모관계 | 아버지: 모용보 / 어머니: 정씨 |
1 개요
후연의 3대 군주. 휘는 성(盛), 자는 도운(道運), 시호는 소무(昭武)이다.
모용보의 서장자로,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민첩하며 모략을 꾸미는 데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북위가 성장함에 따라 후연의 판도는 요서로 축소되고 정치적으로도 내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는데, 모용성은 정권을 찬탈한 난한을 타도하여 모용씨의 몰락을 막아내고 공포 정치로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공포 정치는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모용성은 단기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2 일생
385년, 서연의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고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가 반기를 꾀하자, 전진의 부견은 장안 내에 있는 모용 가문 사람들을 살해한다. 이 때 모용성은 성을 탈출해 살아남았고, 당숙이 되는 모용충(慕容沖)이 다스리는 서연으로 간다. 1년 뒤에 서연을 나와 후연으로 향한다. 387년, 후연에 도착한 그는 장락왕(長樂王)으로 임명된다.
398년, 단속골의 난이 일어나자 후연의 황제인 아버지 모용보와 함께 각지를 떠돌았는데, 아버지가 정서 난한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반대하다가 설득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세력과 함께 이탈한다. 얼마 후 난한이 모용보를 살해하자, 모용성은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고 충성하는 척을 한다. 마침 난한은 모용성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난한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니까 지금 사돈을 죽인 장인에게 충성을 했다는..
모용성은 난한의 형들과 난한의 사이를 계속 이간질시켰고, 은밀히 모용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한다. 결국 모용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한의 형 난제가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났다. 난형난제 난한의 아들 난목이 난제의 반란을 진압하자 모용성은 그를 암살했고, 군대를 시켜 난한도 살해하고서 정권을 잡는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몫![3]
그 후 모용성은 난한에 의해 요동공이 된 숙부 모용희를 다시 하간공으로 되돌리고[4] 시중·거기장군·중령군·사예교위로 삼았다.
모용성은 398년 10월에 비로소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399년에 스스로 지위를 낮춰 서인천왕(庶人天王)이란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말만 황제가 아닐 뿐,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권력 강화는 연이은 숙청으로 나타게 되었고, 이에 모용성은 작은 혐의가 있어도 잡아들이거나, 심지어 취조 없이 사건을 판결할 정도로 시종 공포 정치를 유지하였다. 이에 신하들의 반발은 날로 커져서, 401년 모용성은 전장군 단기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입은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서자 출신에도 불구하고 두차례나 목숨을 건지며 끝장이 날 뻔한 모용씨 가문을 구하고 난한을 역관광시킬 만큼 재주 있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공포 정치로 몰락한 인물. 난중에는 유능했으나 잦은 옥사로 폐위된 광해군에 빗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