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보

후연의 역대 군주
1대 세조 성무제2대 열종 혜민제3대 중종 소무제
모용수모용보모용성
묘호열종(烈宗)
시호영제(靈帝)
혜민황제(惠愍皇帝)
연호영강(永康) 396.4~398.3
부모관계아버지: 모용수 / 어머니: 단씨
생몰년도355년 ~ 398년 음3월(44세)[1]
재위기간396년 음4월 ~ 398년 음3월(3년)[2]

1 개요

후연의 2대 군주. 휘는 보(寶), 자는 도우(道祐), 시호는 혜민(惠愍)이다.

모용수의 4남으로, 좋게 말하자면 문인의 기질이 있었지만 거꾸로 보면 답답한 꼰대의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난세의 한가운데에서 이러한 모습은 이내 후연의 몰락을 불러왔다. 이미 북위의 위협이 가시화된 마당에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여 반발이 일어났고, 마침내 북위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요서로 달아나게 되었다. 요서에서 다시 중원으로 나오려던 와중에 단속골의 반란으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며, 단속골을 죽인 난한이 모용보를 받들겠다고 하자 이를 믿고 용성으로 들어갔다가 난한에게 죽임당했다.

태자이자 황제로서 고작 3년만에 나라를 잘 말아먹었다. 아들을 잘 둔게 그나마 다행이었을 듯.

2 일생

장남 모용전, 5남 모용주와 함께 전처 단씨의 소생이다. 그의 형들은 모용수가 전진에 있을 때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서장자인 모용성은 부견이 몰락 한 후 있었던 장안의 복수극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온다.

북위 건국자 탁발규가 강성해지자 태자로서 아버지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서지만, 도리어 탁발규의 계책에 낚여 회군하다가 합피에서 하여 결과적으로 아버지도 분사하게 만든다. 모용수 항목 참조. 모용수가 죽은 뒤 탁발규는 , , 세 땅만 남겨놓고 후연 전역을 유린했으며, 모용보는 그나마도 항복할 경우 무조건 죽이는 탁발씨의 잔혹함이 아니었으면 민심을 수습하지 못해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탁발규도 정책을 투항우대로 전환하면서 신만을 함락시켰다(397년). 탁발규는 회군해 다음 해 황제로 즉위했고, 이후 후진과 영토갈등을 벌였다.

398년 탁발규의 군대가 돌아가자, 모용보가 영토 수복에 나서서 대군을 이끌고 용성 서쪽의 을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위군 장상이던 단속골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수의 7남 모용륭의 아들인 모용숭을 추대하였다(단속골의 난). 이에 모용보는 모용수의 6남 모용농[3]의 군영으로 달아나 아들 모용성의 군대와 합세하여 용성으로 들어갔고, 단속골은 모용보의 동복동생 모용주를 비롯한 종실의 여러 왕들을 죽인다.

이어서 모용숭을 추대한 단속골이 상서 난한과 함께 용성을 공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농마저도 난한의 꼬임에 넘어가자 한동안 수성전을 벌이던 모용보와 모용성은 남쪽으로 달아났고, 모용농은 모용숭의 부하들에게 죽임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난한이 다시 단속골을 죽인 뒤 모용보를 보위한다는 말로 꾀어들여서 죽이고 난한 자신이 대선우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모용씨 가문은 거의 모용성, 그리고 모용수의 막내아들 모용희 정도만 빼고는 몰락해버렸다..

그리고 아내인 왕후 정씨는 후에 태후가 되어 모용희와 막장 행각을 펼치는데... 꼰대 남편이라서 별로였나보다

희대의 막장사극 광개토태왕 초반부에 등장한다. 배우는 임호. 막장사극답게 근거도 없이 찌질거리다가 박살나는 역이다. 배우가 아까울 정도.
  1.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향년을 적용.
  2.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재위기간을 적용.
  3. 고구려 고국원왕의 요동,현도 공격을 되막아낸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