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

전진의 역대 황제
2대 여왕 부생3대 세조 선소제 부견4대 애평제 부비
묘호세조(世祖)
시호선소황제(宣昭皇帝)
연호영흥(永興, 357년 6월 ~ 359년 5월)
감로(甘露, 359년 6월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7월)
부(苻)
견(堅)
생몰기간338년 ~ 385년 10월 16일
재위기간357년 7월 ~ 385년 10월 16일

苻堅

원나라 쿠빌라이 칸보다 천년 앞서 전 중국을 통일할 뻔했던 북방민족의 황제
전진을 최고 전성기로 올려놓았다가 순식간에 모두 말아먹은[1] 북방의 양무제[2]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이자 전진의 전성기를 스스로 열고 닫은 저족의 황제. 자는 영고(永固).영원히 고통받는

전진의 초대 황제인 부건의 동생인 부웅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했다. 학문을 즐겨해 조부 부홍[3]에게 총애를 받았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언제나 앞장 서서 진군하여 많은 신망을 얻었고, 뛰어난 인재들(강왕, 왕맹, 양평로, 여파루 등)을 얻었다.

부건의 뒤를 이은 부생이 폭정을 휘두르며[4] 부법, 부견 형제를 죽이려고 하자[5] 쿠데타를 일으켜 부생을 몰아내고 357년 전진의 황제에 올랐다.

부견은 우선 황권을 강화하러 힘을 기울였다. 당시 전진은 소수 저족 유력가문의 힘이 강력해 황권이 약했다. 하지만 한족을 유력 자리에 대거 진출시키면서 소수 유력가문을 견제해갔다. 이에 저족 출신 공신 번세가 부견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등[6] 하극상이 심해가자, 부견은 이를 빌미로 저족 20여 명을 숙청해 황권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농경에 부합하는 덕치로 국력을 키워갔다. 나이 든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양식과 전을 차등없이 줬고, 거지가 많이 나온 곳에 조세를 절반 이상 걷지 못하게 하며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그 이후 화북지방의 여러 나라들(전연, 전량, 대 등)을 모두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화북을 통합했다. 부자 사이도 일상으로 죽고 죽이게 막장이던 오호십육국 시대의 인물이었지만 적들에게 아주 관대해서 복속한 적들을 수도인 장안 근처에 이주시키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래서, 전진의 백성들은 5호16국 답지 않게 잇따른 전란을 피하고 몇십년이나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왕맹이 375년 병사하자 슬슬 막장 트리를 탔다. 이제 중국대륙에 남은 적수는 동진 뿐이었다. 왕맹은 무리하게 동진을 점령하는 대신 국가의 내실을 채우는 데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천하통일에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부견은 하라는 내정은 안하고 동진의 익주 지방과 회수, 양자강 일대를 점령해서 간을 보다가 결국은 말리던 신하, 친척, 황족, 측근들의 반대론을 모조리 뿌리치고 부견의 동진 정벌론에 부견을 망치고 들고 일어나서 자립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전연의 후예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의 족장 요장만 찬성했다.[7] 383년 완전한 천하통일을 위하여 여광에게 10만 대군을 딸려 서역을 정벌하려 파병하고 부견 자신은 96만 명[8]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동진 점령에 나서지만, 수적으로 1/10이던 동진군에게 참패했다. 자세한 사항은 비수대전 참조.

비수대전 패배 후, 전진은 순식간에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과거 살려주었던 적수들과 부하들이 줄을 이어 배반하면서 기껏 통일했던 화북도 갈갈이 캐발살났다. 그 과정에서 서연에게 장안을 털리고 도주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마음편하게 그냥 전진 황제나 내놓으면 편히 살게 해준다는 요구를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부견은 거절했다. 그래서 요장은 코웃음치면서 이젠 그 때와 다른데 이런 고집을 부린다고 아까워할 줄 아느냐며 졸병 하나를 불러왔다. 그리고 비웃으면서 이 졸병은 일자무식에 백정 일도 하던 이였으니 그저 멍청한 자존심이나 내세우는 네놈 목이나 벨 때 딱이라며 그 졸병에게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여 부견의 목을 자르고 시신도 대충 파묻은 요장이, 장렬하게 죽었다는 찬양하는 듯하지만 비하하는 의도를 담아 장렬천왕(壯烈天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견은 오호십육국 시대 초기에 누구보다도 천하통일에 가까이 다가선 인물이었다.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가지고 내실을 다졌다면, 최소한 남북조 시대가 빨리 나타났겠고,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동진의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천하를 통일했을 수도 있다. 전진이 무너지면서 화북은 60년 뒤인 서기 439년에야 북위가 재통일했고[9] 천하통일은 수가 진을 멸망시킨 589년에야 나타났다. 이후 북방민족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는 것은 천여년 뒤에 원나라 쿠빌라이 칸 때의 일이다.

  1. 사실 비수대전은 부견이 삽질만 안했어도 동진(東晉)의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수대전 이전에 이렇다 할 실정도 없었다. 유능했으면 유능했지.
  2. 생전에 유능했다는 것과 말년의 실책이 다 말아먹었다는 공통점들이 있다.
  3. 저족의 추장. 유요를 섬겼지만,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자 후조에 귀부했다. 그의 휘하 장수 중 관내후로 임명받은 사람이 2천 명 남짓일 정도로 엄청난 군공을 세웠다. 후조 멸망 이후 동진에 귀부하는 척하며 많은 한인들을 휘하로 받아들이고 352년 황제를 칭했다.
  4. 하지만 부견 측에서 부생을 일부러 폄하했을 수도 있다. 조일의 '낙양가람기' 에 따르면, 부생은 용맹했지만 어질며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현왕을 자처한 부견 측 사가들이 멋대로 폭군으로 몰았다라 말한다. 각종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진서》와는 반대의 시각.
  5. 부생의 시녀가 그들에게 전달했다.
  6. 부견의 딸을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고 하자 폭발하여 이에 반발하는 왕맹을 부견이 보는 앞에서 때리려고까지 했다.그러다 끔살
  7. 왕맹이 동진 신경쓰지 말고 가장 경계하라고 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인간들을 믿고 그대로 전쟁을 한 부견도 부견이다.
  8. 자칭 100만 대군
  9. 그러나 북위는 534년 북제북주로 나뉘었고 577년에 북주가 재통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