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1 개요

한국의 전통 음악 종류 중 하나. 보통, 노래를 부르는 '소리꾼'과, 장단을 맞추고 북을 치는 '고수' 2명이 진행한다.

춘향가 같은 경우 완창 시간이 최장 8시간 30분(8분 30초가 아니다!)[1]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외교관이 멋모르고 춘향전 완창을 주문했다가 8시간 내리 지속되는 공연에 차마 지친 내색도 못 하고 진땀을 뺐다는 일화가 있다. 사족이지만 관극시(觀劇詩)라고 해서 당시 판소리를 감상한 느낌이나 작품의 내용을 양반이 한시로 써놓은 것도 있다.

특히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비슷하다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주로 민중의 정서를 노래하였으며, 특유의 한이 서린 슬픈 멜로디나 창법 등이 많이 비슷하다는 평.[2] 때문에 판소리와 플라멩코를 접목한 공연들이 많이 상영되는 등, 여러모로 자주 크로스오버가 되기도 한다.

200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 역사

2.1 17~18세기

판소리의 등장 시점은 조선조 17세기경이다. 처음에는 하층민, 평민 중심으로 구연되던 판소리는 이윽고 양반들의 향유물로 성격이 바뀌게 되는데, 높으신 분들의 취향에 맞추어 음담패설 등은 제거하고 한자어와 고사를 다수 포함시키는 등 내용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고,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양반들이 안방에 앉아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성량 대신 기교가 발전하는 창법이 발달(소위 안방소리)했으나, 그렇다고 창법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고 여전히 소리꾼으로서 폭포와 같이 우량한 성량을 갖는 것은 최대의 수련 과제였다. 그러한 발성적 지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성립 초기의 명창으로는 우춘대, 하한담(하은담), 최선달 등이 꼽히는데 뭘 불렀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18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략적이나마 스토리가 있는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의 명창을 흔히 '전기 8명창'으로 종합해 말하곤 하는데 여기서 '8명창'이라는 건 실제로 8명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마치 무협소설에서 9파1방의 9파가 몇몇 문파를 제외하고는 이리저리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

이 시기에 활약한 명창들을 꼽자면 권삼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송흥록, 송광록[3], 신만엽, 주덕기, 황해천 등을 들 수 있다.

2.2 개화기

신재효의 활약으로 현대 판소리와 유사한 방향의 판소리 형태가 정립되었다. 그는 전국을 돌면서 구전으로만 전래되던 판소리를 수집한 뒤, 자신의 사설적 지향점을 담아 글로 옮겨서 일종의 정본을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시기의 명창들은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또 '후기 8명창'으로 압축, 종합되곤 하는데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4], 김세종[5], 송우룡[6], 정춘풍[7], 김창록, 장자백, 이창윤 등이 거론된다.

개화기 때의 잘 알려진 판소리 애호가로는 흥선 대원군이 있다. 고종도 아버지에 가려져서 그렇지 나름대로 이쪽에 관심이 있었다.

2.3 일제강점기

판소리가 전국적으로 유행한 시기. 일반인들이 판소리 하면 떠올리는 계면조 서편제 형식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또한 녹음 시설이 유입되면서 많은 명인들이 레코드판을 취입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임방울의 '쑥대머리' 등이 이때 녹음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사람 가운데 직접적으로 전, 후기 8명창과 연결되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 그러니까 전통적인 틀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로는 박기홍, 전도성,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유성준 등이 꼽히는데 이 중,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을 '근대 5명창'이라고 칭하며, 현대 판소리사에서 초창기 인간문화재들 대다수가 이들의 제자이거나 손제자들이다.[8] 여기에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손꼽히는 진채선도 이 시기의 인물로 본다.

이 시기에는 권번에서도 소리를 가르치게 되면서 여류 명창[9]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화중선이 대표적이며 이 외에 임소향, 문련향, 신금홍, 오비취, 신숙, 권금주, 김초향 등의 이름이 보이고, 해방 후에도 활동한 박록주나 김소희도 이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들. 이화중선은 '추월만정', '소상팔경' 등의 소리로 임방울과 더불어 당대 판소리 음반으로는 공전의 히트를 친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적 요소가 포함된 '창극'이 연행되었는데, 정정렬이 특히 이쪽으로 많이 관여하였고, 현대 판소리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창극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3 현대의 판소리

현대의 판소리는 아직 명맥을 잇고는 있지만 배우려는 사람도 줄고,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령자들이라서 전승이 시급하다. 현재 판소리 유지의 노력의 일환으로 판소리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노력은 하고 있지만 부족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현대 한국에서 판소리는 대중으로부터 지루하고 고루한 음악이라는 평이 박혀 그렇게 우호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다. 전통문화니 보존은 필요하다고 여기나 음악 자체는 좋아하지 않는 편. 이는 현대 한국인들이 국악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12음도 등 서양식을 기반으로 한 대중음악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것도 있지만 사실 듣기도 싫은 머리아프고 시끄럽기만 꽥꽥대는 소리가 싫어서이다.

국립극장이 발행하고 있는 '미르'의 2016년 5월호 기사에는 '유네스코에 등재과정에 유럽에서 연창된 판소리 5바탕 완창 공연으로 유럽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줬으며, 이후 거듭 판소리 및 국악이 유럽에서 공연됐다. 2000년 넘어서 소리꾼 이자람이 프랑스에서 공연한 판소리 공연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으며, 한 연극인은 판소리를 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연극'을 다시 생각해보아야겠다"고 했다. 2016년 4월에는 국립창극단이 다시 프랑스에서 창극 '점 찍고 옹녀'를 공연하여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줬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외국의 반응이 좋지 않다는 것은 오류.[10][11]

20년 전에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라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일반에게 조금은 알려진 모양... 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판소리 하면 무조건 서편제란 편견을 유포하기도 했다.[12] 하지만 지금의 판소리 자체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창법은 안습되고 계면조 위주의 서편제만 남은 상태이므로...[13]

뭐 그래도 계룡산의 구룡폭포 가는 길에 보면 판소리를 계승할 청소년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연 판소리 수련은 폭포.

현재의 판소리는 경제나 중고제가 완전히 소실되고, 남아있는 동-서 편제 중에서도 그나마 제대로 남아있는 게 서편제의 한 분파인 보성소리[14] 뿐이다.[15] 이 중 경제를 제외한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는 모두 지금의 충청남도 이남, 전라도 일대에서 전승되었던 소릿제였는데, 이 때문에 특성상 서남 방언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판소리 명인 중 호남 출신이 유난히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부러 서남 방언을 터득하는 건 이 때문.[16][17]

약간 다른 내용이지만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김지하 시인이 창작판소리[18]라고 오적이란 시를 써서 당시 한국의 고위공무원들을 싸잡아 까내렸다가 투옥된 일화가 있다.[19]

참고로 북한에서는 1960-70년대에 소실되었다. 1940~50년대 판소리 명창들이 제법 월북했음에도[20] 불구하고 김일성이 판소리를 지주층이 민중을 노예처럼 부릴 때 생겨난 착취예술이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개소리를 하며 탄압했다.[21] 여기에는 북한내에서 알력다툼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개인적으로 쐑소리라면서 싫어했던것도 있고해서 북부출신 지역 국악가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이후로는 판소리에 대한 지원이 뚝 끊어지고 판소리 명창들과 연구가들이 줄줄히 평양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판소리를 배울 사람이 없어지게 되자 당연히 오래가지 않아 소멸하였다.

정통 판소리라 볼 수는 없지만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은 판소리를 베이스로 한 창법을 쓴다고 한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드보컬 이자람은 판소리 계승자로 더 유명하다. 본래 어린 시절 작곡가인 아버지와 함께 "내 이름"이란 노래('할아버지께서 부르셔~ 네, 하고 대답하면~' 라고 모든 아이들이 들어봤을 동요)를 부른 이로, TV 프로에서 판소리를 배우게 되면서 흥미를 가져 전공하고 전수까지 받게 되었다고. 춘향가와 적벽가 이수자이자 최연소 완창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자람은 2007년 독일 소설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착한 사람'이라는 소설에서 착안한 "사천가"를, '억척어멈과 자식들'에서 착안한 "억척가"를 국내에서 창작 판소리로 공연하였다. 이후 국내 단편소설을 판소리화한 "추물"도 있다. 글로만 보면 이게 뭐 대단한 건가 싶을 수도 있지만 판소리에서 소리꾼이 이야깃꾼을 포함하여 모든 역할을 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혼자서 몇 시간동안 다른 역할을 왔다갔다 하면서 노래하며 하나의 연극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해보자. 그와중에 관객과 소통도 한다. 직접 보게 되면 더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유럽에서까지 성공적으로 공연을 하는 등, 구습적인 전통문화라고만 여겨졌던 판소리를 세계화하고 현대적으로 이식시키는 동시에 대중에게 다가서게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16년에는 4년 만에 "이방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남미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을 다시금 판소리로 옮겨 공연하였다.

4 분류

조선 후기~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여러 분파가 함께 존재했으나, 현재는 중고제와 경제는 소실되고 동편제와 서편제의 양분 구도를 띠고 있다. 현재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은 의미가 없으며, 크게 보성소리와 동초제, 그리고 명창의 이름으로 전수되는 정정렬제, 박동진제 등의 판제가 전승되고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분류는 판소리 초창기에는 전라도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 서쪽으로 나뉘어 지역별 판소리 명인들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명인들이 자주 이사를 다니는 등(...) 지역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점차 유파의 특성을 이르는 용어가 되었다. 특성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들을 참조.

4.1 동편제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인 구례남원 등지에서 주로 불린 유파다. 비유하자면 '담백한 채소를 먹는 맛' 혹은 '동산 위에 달이 슬그머니 떠오르는 광경'의 느낌이라고 한다. 경쾌하게 올리며 짧게 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소리를 힘 있게 올리므로 비교적 톤이 높다. 서편제와 비교해서 기교를 거의 쓰지 않고 담백한 느낌[22]의 창법으로 노래 부른다.

전라도의 판소리 하면 서편제가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가끔씩 동편제를 '한반도의 동부'인 영남 지역의 판소리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동·서편제의 구분은 한반도의 동서가 아닌 섬진강의 동·서안이다.

구례에 가면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이 있다. 보성의 어느 것과는 달리 상당히 뽀대가 난다

매년 10월마다 구례에서 동편제 소리 축제도 열리니 관심 있으면 가보도록 하자.#

4.2 서편제/강산제

서편제는 박유전이 창시하였으며, 섬진강의 서쪽인 보성, 광주, 나주 등지에서 주로 불린 유파다. '쫀득쫀득한 고기를 먹는 맛' 혹은 '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광경'에 비유된다. 끝소리를 끊어주는 동편제와는 달리 화려한 기교를 사용하며 끝소리를 길게 뺀다. 현재 우리가 판소리라고 듣는 노래들은 거의 서편제. 특히, TV에서 흔히 듣는 것처럼 끝부분을 '어어어어어어어어~~~' 하면서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준다면 그냥 서편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편제의 일종으로 강산제가 있는데, 이는 서편제를 만들었던 박유전이 서편제가 너무 애절하고 울먹거린다고 해서 그것을 최대한 지양하기 위해[23] 말년에 한양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내려와서 서편제와 동편제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24] 강산제의 이름은 박유전이 생전에 살았던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에서 따온 것이며, 강산은 또한 박유전의 호이기도 하다.[25] 강산제의 특징은 서편제를 계면조가 아닌 동편제에서 주로 쓰는 조성인 우조로 노래하는 것 부르면서도 동편제의 특징적 조성인 우조를 대폭 수용하였다는 것.[26]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 인물 중 하나가 박유전의 제자인 정재근으로 이 사람이 김찬업에게서 동편제 춘향가를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동편제의 소리 지향이 일부 수용되었다. 정재근의 아들인 정응민의 경우, 거기에 이동백의 소릿제를 일부 수용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논문이 하나 있긴 한데 정황증거다.

보성에 가면 서편제 판소리 전수관이 있다. 하지만 보성 사람들에게는 공설운동장 주차장 구석에 관리도 안하고 방치하며 1달에 한 번 영화나 틀어주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마저도 보성군에서 문화예술회관을 완공하면서 거기로 바뀌었다. 지못미. 매년 10월마다 보성에서 서편제 소리 축제도 열리니 관심 있으면 가보도록 하자. 판소리 경연대회가 열려 대통령상까지도 수상되지만, 판소리 이외의 부대행사의 질은 보장 못 하니(장사치들만 가득 와있다) 정말 판소리에 관심 있는 사람한테만 추천한다.#

4.3 중고제

동편제와 서편제, 두 유파와 모두 구분되는 판소리 창법을 지녔다. 유식한 말로 '비동비서'. 주로 충청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했다고 추정된다. 중고제의 한자를 中古로 쓰는지, 重高로 쓰는지는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 논란거리다. 현재 전해지지 않으므로 소리가 정확히 어떠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27]

다만 녹음 자료로는 일제시대 중고제 명창인 김창룡과 이동백의 소리가 남아있어서 그를 통해서 추정하는 정도다. 어떤 명창은 "중고제는 쉽게 소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녹음을 들어보면 안 그런 경우도 많고, 기록에 따라서는 한쪽에서는 '성량이 대단하여 촉석루에서 소리하니 10리 밖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쪽에서든 독서하듯 음의 굴곡이 많지 않고, 성량이 많이 들지 않는 소리라는 식으로 평하는 경우도 있다. 뭔 말이냐면, 같은 중고제 소리의 '성량'에 관련된 글이라도 한쪽에서는 마이크 빵빵 터뜨리는 성량이라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그냥 책 읽는 정도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단편적인 기록으로 원형을 파악한다는 게 불가능한 거긴 하다만...

5 대표적인 판소리

5.1 판소리 12마당

5.1.1 현재까지 전하는 6마당

5.1.2 현재 소실된 7마당

6 관련인물

  • 송만갑 : 1865∼1939.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 당시 다섯 명창[28] 중의 한 사람이었다.
  • 김연수 #
  • 김소희 : 1917~1995, 전라북도 고창 출신. 호는 만정(晚汀).
  • 박봉술 : 1922∼1989.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동편제를 계승한 흥보가, 적벽가로 유명하였다. 제자로 송순섭, 김일구 명창이 활동 중. 그 외에 안숙선이나 왕기석, 왕기철 등 80년대 국립창극단의 스타들 역시 그에게서 적벽가를 배웠다.
  • 안향련 : 1944∼1981. 30대에 요절한 천재 명창.
  • 임방울 : 1904~1961 : 일제강점기~해방 직후까지 판소리의 아이콘. 광주 출신으로 '쑥대머리'가 유명[29]한데 정작 그 특기는 수궁가와 적벽가.[30] 현재 광주에서 그를 기념한 임방울 국악제가 열린다. #
  • 임진택 : 1950~ , 전라북도 김제 출신. 창작 판소리의 대가. 군사독재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되었다가 불기소 처분되어 풀려난 적이 있으며, 김지하와 더불어 만든 오적, 똥바다 등 창작판소리 작품으로 유명하다.
  • 조통달 : 1945~ , 전라북도 익산 출신,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명창. 그의 이모 또한 명창으로 유명한 故 박초월(1917년 2월 20일 - 1983년 11월 26일)이다.[31] 과거에는 남진, 이선희 등 내로라 하는 가수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IMF 시절 최연소 흥보가 완창 기록을 세운 유태평양의 스승이기도 하다. 근래에는 대중 가수인 아들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저런 방송에서 출연이 잦은 편이라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얼굴이기도 하다.
  • 안숙선 : 1949~ ,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가장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명창 중 한 사람이며, 현재 생존해 있는 여류 명창으로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두루 연창할 수 있으며, 창극적인 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현재는 가야금 병창의 예능보유자인데 한국 무형문화재 지정 제도의 모순을 논의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32]
  • 김현정 : 1976~ ,국악인은 아니지만 판소리를 배운 경험을 자신의 음반에 고스란히 녹여 가수로 활동했다. 그 결과 1집부터 그녀와의 이별, 혼자한 사랑이 대박을 쳤다.
  1. 유파에 따라서 좀 달라지기는 하는데, 그래도 최소 5시간의 완창 시간을 자랑한다. ㄷㄷㄷ. 그래서 요즘엔 춘향가 완창 한 번 하려면 한 번이나 두 번의 인터미션이 주어진다. 보는 관객도 힘들다
  2. 여기에 추임새가 들어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한국의 얼쑤에 해당되는 플라멩코의 올레 등.
  3. 송흥록의 동생이다. 다만 족보나 가전문서에 의하면 이들 송씨 형제들은 이름이 다 다르다. 심지어 근대까지 활약했던 5명창 '송만갑'도 다르다! 송만갑은 심지어 당대 자료에서도 '송만갑'이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4. 새소리를 냈더니 진짜 새들이 몰려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흠좀무
  5. 신재효에게서 판소리 이론을 전수 받았다고 하며, 김세종의 소리는 또...
  6. 대다수 자료에는 전기 8명창 송광록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 송만갑 일가의 일제시대 호적 자료를 보면 송흥록의 아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송흥록의 아들 중 하나가 송광록 집안의 양자로 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와전된 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7. 양반 출신 광대였다고 전한다. 그의 더늠이라는 '천봉만학가'나 '소상팔경' 등에 한자 사설들이 많은게 그 때문이라고. 그 외에도 적벽가 가운데 공명 기풍(=동남풍) 장면에서 축문이 그가 짠 소릿제라고 한다(박동진 증언). 단, 공명의 축문은 김연수의 창본에서도 보이고, 김연수는 이 대목을 정정렬에게서 배웠다고 하므로 이 경우와는 다른 계열로 보인다.
  8. 사실 범주를 그렇게 해서 그렇지 이 세대까지는 흥선대원군 시대의 문화적 취향에 일정 부분 수혜를 받은 이들이다.
  9. 이때 권번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친 것 가운데에는 시조, 가곡, 가사와 같은 '정가'가 있는데, 현대의 여창가곡에서도 보이는 우아한 느낌의 발성들이 현대 판소리에도 영향을 많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소희와 김여란이 당시 정가풍 창법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인물들. 물론 정가풍 창법이 남창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정권진 등에게서 보이는 정가풍 발성은 우아하면서도 굳센 느낌의 발성이다. 전혀 다르다.
  10. 라고는 하지만 현재 판소리 전승과 공연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소속된 국립극장의 글만으로는 조금의 객관성은 떨어지지 않나 생각된다.
  11. 다만, 몇몇 방송에서 보이고 있는 판소리 사설의 번역 문제, 특히 프랑스에서 나타난 불역 판소리 창본과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세계적인 반응이 '좋지 않다'는 소리가 오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2. 그도 그렇지만, 애초에 학자들이 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소릿제는 서편제의 한 분파인 '보성소리'였다. 그러니까 애호가는 물론 학계에서도 판을 좁히는 데 일조한 셈.
  13. 엄밀히 말하면 지금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편제의 한 변형인 '보성소리'의 변주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주인공인 오정해부터 정응민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소희의 제자다. 더불어 김소희의 경우, 기교와 힘을 동시에 활용해서 내는 보성소리의 음악어법 가운데 힘을 제거한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리'를 중심으로 소리를 짰던 인물이다. 그런 더 슬픈 선율의 계면조가 유행하게 된 것. 한승호나 정광수 등이 하는 소리에 남아있는 고제 서편제의 흔적을 보면 생각보다 거친 측면이 있다. 약간 가시나무 같은 그런 느낌.
  14. 보성소리는 서편제의 시조라고 알려진 박유전이 어전광대로 활동하다 보성 강산리에 내려와서 제자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 첫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김찬업이 정재근에게 전한 동편제 계열의 김세종판 춘향가가 더해지면서 동편제의 부가적인 요소를 갖추게 되었다.
  15. 이전 서술에서 보성소리를 동편제 춘향가와 서편제 심청가를 아우르는 소리로, 대차고 굵직하고 우렁찬 소리를 지향한다는 측면을 들면서 '서편제의 한 분파'라는 말을 반박하였지만, 오류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데 (1) 발성의 차이는 유파를 구분하는 큰 틀이긴 하지만, 역시 발성의 차이만이 유파 구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2) 보성소리는 굵직하고 우렁찬 발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창의 첫 도입부부터 꺾는 목, 굴리는 목, 끌어 올리는 목 등의 기교를 다양하게 사용하며, 끝을 내리고 올리는 점 또한 다양해 정교한 시김새를 활용하는 소릿제라는 점이다. (3) 서편제의 큰 틀 중 하나가 다양한 붙임새의 활용인데 보성소리 역시 잉어걸이, 완자걸이, 엇붙임 등 이 외에도 수많은 붙임새를 활용해 소리를 짠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소를 볼 때, 보성소리는 엄연히 서편제를 모태로 하여 동편제의 요소를 일부 차용한 소리로 보아야 한다. 거기다 이전 서술자는 '현대 판소리에 동서편제의 구분을 대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는데, 애초에 보성소리는 학계에서나 귀명창들이나 '고제를 간직한 소리'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걸 단순히 '현대 판소리'로만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말 엄밀한 의미의 '현대 판소리'는 이전 서술자도 언급했듯 '동초제'다.
  16. 덧붙여서 사실 판소리의 기원부터가 호남 지역에서 시작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서편제 뿐만 아니라 동편제도 호남에서 나오기도 했고.
  17. 충남이 기원이라는 학설도 배연형 등에 의해 지적된 바 있긴 하다.
  18. 사실 '창작판소리'라고 하기엔 애매한 게 원래 이건 완전히 판소리 사설의 어법을 활용한 '담시'로 발표된 작품이다.
  19. 김지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 기생관광과 한국 오피니언 리더 사회의 부조리 등을 소재로 한 '똥바다'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김지하는 이것들 자체를 '담시'라고 표현한다. '이야기 시'라는 것. 여튼 오적과 똥바다는 임진택이 작창해서 녹음한 바가 있다. 요새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20. 정남희, 박동실 등 현대 민속음악 전승 관련 구술 자료에서 수없이 언급되는 인물들이 다수 월북했다.
  21. 여기에 서도창 중심의 창법을 '과학적'으로, 나머지는 '비과학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렇다고 현대 북한의 예술에서 서도 음악이 남아있느냐면 글쎄(...)
  22. 그보다는 '굳센 느낌'이 좀 더 강하긴 하다.
  23. 카더라에 가까운 소리. 다만 90년대까지도 통설처럼 알려져서 두산백과 같은 곳에는 이런 설이 실려있었다. 현재도 네이버에서 제공하고 있는 두산백과 '강산제' 항목에도 유사한 설명이 남아있다.
  24. 그렇다고 해도 소리의 골격은 박유전이 본래 부르던 '서편제'일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동편제 소리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김찬업의 김세종제 춘향가가 수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게 좀 더 합당할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사설이나 소리풍 자체를 우아하게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박유전의 공이라고들 인정은 한다.
  25. 혹은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 대원군이 '네 소리가 천하제일 강산이다'라고 했다는 소리 때문에 별칭처럼 따라 붙었단 말도 있다.
  26. 계면, 그것도 진계면으로 부르는 소리는 아직도 강산제 소리에서 넘쳐난다.
  27. 중고제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이다. 중고제의 '중고'를 시간적 의미로 인식하느냐와 공간적인 의미로 인식하느냐에 대한 논쟁인데, 시간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중고제'는 오래된 판소리로 초창기 판소리를 의미하게 된다. 반대로 공간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경기, 충청 지역의 판소리를 의미한다.
  28. 나머지는 정정렬,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29.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현행 '쑥대머리'는 그가 장단을 정하고 소리를 새로 짠 소리다. 즉 그의 '더늠'. 원래 '쑥대머리' 사설 자체는 김창환 계열 춘향가에 있었다고 하는데, 임방울이 김창환의 제자 정광수에게 사설을 받아서 소리를 새로 짰다고 한다(정광수 증언).
  30. 제자들은 물론 관련 인사들의 증언도 그렇고 그의 녹음 중에 춘향가보다 수궁가와 적벽가 쪽이 더 많기도 하다. 아예 해방 직후에 가졌던 몇 차례의 완창이 모두 적벽가와 수궁가이기도 했고.
  31. 아예 양어머니로 모셨다고.
  32. '가야금 병창을 잘 하긴 하지만, 엄연히 판소리 명창으로 보다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병창 능력 뿐 아니라 판소리 능력도 뛰어난데 어째서 중복 지정을 해주지 않느냐?' 라는 논리. 실제로 한영숙이나 이매방 같은 무용가들이 2개 종목(한영숙은 학춤과 승무, 이매방은 살풀이와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었던 실례가 있어서 지정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