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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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NC 다이노스넥센 히어로즈LG 트윈스
KIA 타이거즈SK 와이번스한화 이글스롯데 자이언츠
과거에 참가했던 구단 보기 ➡
삼성 라이온즈kt wiz
200px240px
엠블럼마스코트
호돌이
KIA 타이거즈
KIA Tigers
창단1982년 1월 30일
법인 설립1982년 5월 29일
팀명 변경2001년 8월 1일
구단 법인명㈜기아타이거즈
영문명칭KIA TIGERS CO.,LTD
업종명스포츠 클럽 운영업
상장유무비상장기업
기업규모대기업
연고지광주광역시[1][2]
구단 연고지 변천광주광역시 (1982~)
구단명 변천해태 타이거즈 (1982~2000)
KIA 타이거즈 (2001~)
구단주정의선[3]
사장박한우[4][5]
단장허영택
감독김기태
홈 구장무등 야구장 (1982~2013)
(12,500석)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14~ )
(20,500석)
제 2구장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1982~1989)
(10,000석)
월명 야구장 (2001~2013[6])
(11,000석)
2군 구장전남 야구장 (2006~2011)
(100석)
기아 챌린저스 필드 (2012~ )
(5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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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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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우승
10회[7]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 2009
역대 우승 엠블럼
1983년1986년1987년1988년1989년
1991년[8]1993년1996년1997년[9]2009년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38px-Jeonbuk_Hyundai_Motors.svg.png70px
전북 현대 모터스KIA 타이거즈울산 모비스천안 현대캐피탈
50px80px80px
수원 현대건설인천 현대제철현대제철 남자양궁단현대모비스 여자양궁단
현대글로비스 럭비단현대 모터스포츠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OB 베어스 (1982)해태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 (1984)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 (1985)해태 타이거즈LG 트윈스 (1990)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LG 트윈스 (1990)해태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 (1992)
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롯데 자이언츠 (1992)해태 타이거즈LG 트윈스 (1994)
1996년,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OB 베어스 (1995)해태 타이거즈현대 유니콘스 (1998)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SK 와이번스 (2008)KIA 타이거즈SK 와이번스 (2010)

1 개요

KBO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광주광역시. 본격 2위가 없는 팀.[10] 홍진호가 싫어합니다 물론 2위는 없지만 하위권은 넘친다

한국 시리즈 10회 진출-10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희귀한(…) 성적이다. 게다가 시즌을 2위로 끝마친 적도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1983년의 정규리그의 전후기 성적을 종합한 순위가 2위이며 단일 시즌 전에 전기리그나 혹은 후기리그에서 2위를 한 적은 있다. 또한 2002년과 2003년에는 페넌트레이스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광탈[11]

또한 2016년 현재, 한국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이다. KBO는 공식 프로야구 우승을 한국 시리즈 기준으로 하기에, 2015년 기준으로,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은 페넌트레이스 최다 우승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아닌, KIA 타이거즈가 맞다.

팀 컬러는 초기에는 야수와 투수의 조화를 지향하였으나, 선동열의 등장 이후 투수에 올인하는 투수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통산 타점 기록도 무시무시하다. 그런데 거의 꼴찌다

팀의 상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호랑이이며, 2010년 2월 2일 CI와 마스코트를 변경했다. 마스코트는 호돌이와 호순이. 호순이는 핑크색.

팀의 상징색은 빨강색이고, 세컨드 컬러로 검은색을 밀었다가, 2015년 들어서는 유니폼에 다크블루(감색)를 적용하면서 점차 다크블루 사용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응원도구 색상은 빨간색, 감색 둘 중 하나도 아닌 노란색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 악화로 인해 (구)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인수하여 2001년 8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굳이 기아라고 한글로 팀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다는 의미의 기아(飢餓)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존재한다.[12] 물론 KIA는 Killed In Action의 약어로 사용되는데 어차피 여긴 영미권 국가도 아니고 그럼 KIA가 아니라 기아여야지 애초에 내수시장을 염두한지라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거 일일히 따지면 작명자체를 못한다. 어찌되었든 한글 내지는 한문인 기아는 영문자로, 영문 기반인 'Tigers'는 한글로 적혀있는 희한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맞춤법도 틀렸다. 타이거가 아니라 타이거로 써야 한다.

참고로 기아자동차에서의 '기아'는 '아시아에서 일어나다.'(起亞)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단어인 Gear를 일본식 발음대로 옮겨적은 것이기도 하다. 왠지 후자가 먼저고 전자는 나중에 만든 의미인 것 같지만 넘어가자 자세한 사항은 기아자동차 문서 참고.

2011년 모 기업이 새 CI 통합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바뀜에 따라 팀명도 울산 현대 호랑이 현대 타이거즈로 바뀔 수도 있다는 예상이 있었으나 루머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는 모기업 이름이 아닌 모기업의 계열사명 중 하나를 딴 셈이 됐다. 두산그룹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단이 한때 두산이 아닌 OB라는 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셈. 이는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의 '1사 1구단' 정책에 따른 것이다. 모기업 중 가장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밑에 설명하겠지만, 덕분에 기아자동차가 타이거즈 구단을 맡으면서 본래 기아자동차 밑에 있었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을 같은 계열인 현대모비스에 넘겨야 했다.

2 KIA 타이거즈의 탄생

1990년대까지의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2.1 갑자기 치솟은 선수 연봉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8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창설 당시 인천·경기·강원을 연고 삼아[13] 야구단을 창단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88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한 직후라서 올림픽에 전념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거절이후 마땅한 연고가 없어서 고민했으나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그 후 프로야구단 창단의 야욕을 드러냈으나 제 9구단으로 창단하기도 모호하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아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야구단을 창단, 유망주들에게 당시로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문자 그대로 선수들을 싹쓸이 해가는 일을 벌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뿌려졌고 대다수의 유망 선수가 실업팀 쪽으로 전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통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에스컬레이터식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충분한 선수를 확보한 현대 피닉스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프로야구에 참가한다. 즉, 이젠 대놓고 선수를 비싸게 살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애초에 해태가 청와대의 압박에 의해 들어왔다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 KBO 리그 문서를 참조해보면 애초에 호남권은 금호그룹이 들어오기로 하였으나, 금호그룹의 회장이 '자녀가 내게 보고도 없이 추진했다'며 계획을 백지화해[14] 졸지에 호남권에 야구단이 없어질뻔 했다. 해태제과에서 호남 야구단을 하겠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창단된 것. 당시 해태제과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 창단했다. 이를 청와대 지시라고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청와대에서는 야구에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워낙에 축구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처음에 프로리그 계획안을 보고 받았을때 "어? 야구였어? 난 축구인 줄 알았지." 라는건 그 당시의 비화다. 축빠야빠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된 건가 --어차피 둘 다 3S 정책의 일환-* 이는 군대스리가를 생각해보면 전두환도 일단은 '군인'이므로 야구보다는 축구에 익숙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장병 체련 활동으로 가장 값싸게 먹히는 게 축구다. 전두환은 실제로 중학교때부터 축구선수였으며 육사 축구팀에서도 골키퍼였다.

아무튼 해태가 프로야구에 들어오자 부산·경남지역을 배정받은 롯데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업계 라이벌은 들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들어왔는데 롯데와 제과업계 라이벌인 해태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허나 계속 징징대면 럭키금성에게 배정받은 연고지마저 빼앗길까봐[15] 야구팀을 유지하고 싶었던 롯데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재계 순위권으로 따져도 중위권인 해태 타이거즈가 제대로 된 운영을 할 리가 만무했다.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기업이 기업의 홍보 수단으로 매년 200~300억씩 쏟아 부으며 운영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정도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기업이면 대규모의 기업집단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 해태는 그러지 못했고 그 뒤로도 그러지 못했다. 오죽하면 '브라보콘 몇 개나 팔아야 너희 연봉이 나오는 줄 아느냐'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이로 인해 매년 연봉협상에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지역위주의 신인 선발로 인해 당대 최고의 고교 야구팜중 하나인 호남팜을 모조리 휩쓸어 갈 수 있었고 김응룡 감독의 리더쉽, 그리고 열성적인 호남 지역 팬들의 응원등이 합쳐지며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 닥쳐온 경제 한파

돈싸움은 시작 되었고 마침 1997년 외환 위기가 슬슬 터지려고 해서, 구단주인 해태 그룹의 경제가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해태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IMF로 사이좋게 재정위기가 오자, GG치고 포기하였다. 그리고 대우그룹은 IMF 직격탄을 맞고 진짜로 그룹해체가 되었다.

2.3 팔고 팔고 또 판다

팀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해태가 선택한 방식은 선수의 재판매였다. 팀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동열이종범일본에 팔아[16] 스카우트 머니로 어찌어찌 일년은 버텼지만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1998년에 부도가 나버려서 있는 선수, 없는 선수 모조리 팔아치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이 시기에 선수를 대량으로 세트 덤핑구입을 하는 통에 '돈성'이란 이름을 굳히게 되었다.

2.4 제발 사가 주세요

선수를 팔아치워, 정상적인 경기운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한국 프로야구가 4팀 2리그제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대두되었다.

간단히 말해, 한 팀만 빠져도 전반적인 밸런스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것인데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리그 판이 박살난 상태였고, MLB붐으로 인한 프로야구의 상징성이 약화되어 인수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스코전라남도 광양시에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연고지 조건을 아슬아슬하게 갖추었기에 인수시도가 있었으나 포스코의 재정이 파탄난데다 포스코의 대주주들이 손해보는 행동을 하려한다며 업무상 배임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스코의 대부인 박태준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7] 프로야구 출범 시에도 대구·경북지역 연고구단으로 포스코가 거론되었으나 거부했던 역사가 있다.[18] 그리고 IMF 이후 외국 펀드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별다른 수익도 없고 생산재 기업으로 뚜렷한 홍보효과도 기대하기 힘든 프로스포츠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19]

광주 시민들은 광주를 발판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이 인수하기를 원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리그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호그룹은 호남 지역색을 지우려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KBO 창설 때도 삼양사와 함께 호남권 구단 1순위 기업이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거부했고, 1997년에 서울을 연고지로 한 프로리그 팀을 찾아보다가 관두었다고 한다. 뒤에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을 창단하지만 투자는 좆망. 결국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은 산업은행 산하 KDB생명으로 인수되어서 현재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다.

2.5 탄생, 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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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구하느라 하루하루 속을 태우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은 갑자기 나타났다.

2001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 회장이 오늘내일 할 즈음,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카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일련의 계열사를 분리시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설립하는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금융법상 사소한 절차가 무시되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OK사인을 내주어 왕자의 난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돌연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를 선언했다. 참고로 당시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아차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인수하기로 결정 내린 사항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룹 설립 과정에서 사소한 절차가 무시된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해태 타이거즈 인수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자신의 동생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접근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는 그야말로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라 인수 대금으로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던 900억원을 불렀는데, 이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현대를 쌩까버리고 비교적 싼 가격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지불한 인수 대금은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에 180억, KBO 가입기금 30억으로 총 210억원이었다. 광주광역시기아자동차 공장(구 아시아자동차 본사)[20]이 있어서 지역 연고 요건을 갖추었다.[21] 이에 따라 1사 1팀 정책 때문에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은 현대모비스로 이관되어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탈바꿈했고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만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22]현대캐피탈로 이동,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탈바꿈했다.

안티팬들의 경우 KIA 타이거즈의 출범을 놓고 어째서 KIA가 해태의 V9를 가져가려고 하는거임? KIA가 우승하면 V1 아님? 이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KIA 타이거즈의 출범 경로는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같이 해체된 의 선수들과 계약해서 신규창단한 것이 아닌 과거 LG그룹MBC 청룡인수해서 창단한 전례를 따르고 있어,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계승한다.[23] 넥센과는 다르다 넥센과는 즉 KIA 타이거즈는 해체 후 신규창단이 아닌 인수 후 창단 형식이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

그런데 창단 30주년이 되는 2011년에 구단에서는 창단 10주년이라는 드립을 쳤다. KIA로 이름이 바뀐 것만을 기념하면 10주년이 맞지만, 엄연히 해태를 계승한 구단이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아니면 기아타이거즈 직원중 한명이 안티팬 이거나 MBC를 인수하고 홈페이지 역사관에서도 전신 시절 언급을 하지만 구단사를 가리켜 23년이라고 하는 LG와 같은 식이다.

3 우승 경험

전신 해태 타이거즈 시절을 포함하여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0회 우승을 일군 팀이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은 선동열 버프로 얻었단 평을 받아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선동열 이전에도 1983년에 우승한 적이 있고, 선동열이 팀을 떠난 후에도 이종범 등 다른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1996~1997년에 다시 2연패를 달성했고, 의외로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 4세이브 72.1 이닝 1.74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보다 부진(?)했다. 미친..

한가지 확실한 건 페넌트레이스에서 선동열 버프를 쪽쪽 빨아먹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고 하니 잘 던지는 선동열을 선발로 하루 등판시켜서 며칠씩 쉬게 하느니 선발, 불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막 써먹었다는 것이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올려서 몇 이닝씩 던지게 하고 심지어 컨디션이 엉망인 날에도 상대팀 기죽이기를 위해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을 정도. 실제로 선동열은 프로 통산 367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출장한 경기는 109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당시에는 에이스 투수고 나발이고 마구잡이로 굴리는게 관례였다.

역대 우승 연도는 1983년,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1997년, 2009년이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SK 와이번스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이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바로 KIA 타이거즈가 SK의 승리를 막으며 타이거즈의 V10을 찍었다. 그러나 결국 이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연속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15 시즌은 패넌트레이스만 우승[24] 덧붙여 현재까지 인수/인계 경험이 있는 구단 중 인수 전후 모두 우승 경험이 있는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하다. 현대삼청태 시절에 우승한 적이 없고, 트윈스청룡 시절에 한 적은 없다. 베어스이글스이름만 바꿨을 뿐 모기업이 바뀐 것이 아니다.

2009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있다.[25] 즉, 우승은 무려 10번이나 했는데 희한하게도 준우승이 한 번도 없다. 홍진호이(가) 싫어합니다. 반대로 준플레이오프에선 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4 팀의 역사

4.1 연표

4.1.1 인수 초창기 (2001~2004)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선사하고 짤려버린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으로는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동명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채종범은 2008년에 KIA로 오는데..[26] 그리고 8월 7일에 KIA의 광주에서의 첫 경기 겸 이종범의 광주 복귀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광주구장이 2001시즌 첫 매진[27]되었다. 2001년 시즌은 유례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자리를 놓고 5개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거릴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가을잔치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와 3할 20-20을 바라봤던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하며 타격왕에 오른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와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이강철이 있었다. 4월부터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기며 계속 승승장구했으나 9월 들어 폭풍 연패를 하며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28] 무엇보다 투수진의 방어율이 전년 5.01에서 3.93으로 급감하였는데 이것은 무려 33승+13세이브를 올린 키퍼-리오스 원투펀치의 공이 컸다. 문제는 용병타자였는데..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이 지명타자 또는 좌익수로 리그평균정도도 못하고 워낙에 민폐를 끼쳤다. 이전년의 루이스 산토스, 아니 이해의 LG의 매니 마르티네스가 기아에서 뛰면서 김창희를 대신했어도 정규시즌 1위는 KIA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11월 01일에 열렸던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는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광주 출신의 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은퇴 파동을 일으킨 손혁과 김창희를 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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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당시 인조잔디였던 대구H빔파크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당시 승승장구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잠시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0.5게임 차로 선두를 뺏겼다. 흔히 KIA가 이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기아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29]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30] 오히려 막판에는 맹추격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반 게임차의 2위가 되어 버린 것. 2년연속 2위

그렇게 직행한 플레이오프에선 당시 신임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무패로 관광보내버리고 올라온 돌풍의 팀 SK 와이번스0승 3패로 쳐발리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몫을 했다. 김봉근 투수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조범현 감독은 짤린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했던 것. 그덕에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4년에는 FA로 풀린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삽질을 거듭했고,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31] 어수선한 시즌을 보내다 페넌트레이스 4위로 마감하고 가까스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허나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전 전패로 탈락했다.KBO리그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빵 사건이 바로 그 해의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것.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

4.1.2 타이거즈의 2차 암흑기 (2005, 2007~2008)

2005년 시즌 들어서는 팀 캐미스트리를 저해하던 박재홍SK 와이번스로 보냈고, 2003년 시즌 후반기에 활약했던 마이클 키트 존슨을 다시 데려오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소소경과 이원식을 내주고 홍현우를 다시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했는데, 이 트레이드는 훗날 KIA팬들이 LG팬들에게 사랑해요 LG라고 놀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홍현우 덤으로 껴온 선수가 바로 이용규.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영 좋지 못하더니 결국 5월에는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은 거대한 똥을 싸 버리고 말았고, 그나마 LG에서 트레이드 된 이용규와 전년도 부진(AVG 0.260)에서 벗어난 이종범이 3할-20도루를 하며 분전했지만 붕괴된 투수진은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32] 결국 유남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서정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2005년 시즌을 꾸려갔다. 이 와중에 다니엘 리오스를 두산에 넘겨주고 전병두를 받은 후 세스 그레이싱어를 새 용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33]

팀은 개박살난 상황에 그나마 얻은 수확은 우익수 자리를 꿰찬 이용규, 중간에서 노예질을 하던 윤석민이었다.

2006년 시즌엔 서정환서토라레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서정환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골칫거리였던 마해영LG 트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며[34] 10억 신인 한기주가 입단하는 등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게 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력[35] 을 투수력[36] 으로 상쇄하며 시즌 내내 4, 5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4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1승 2패로 패하며 탈락하였다.[37]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이 돌아왔으나[38], 투수진의 줄부상과 공격력 약화로 인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정환 감독의 서머리그 우승이라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한 선수 혹사 및 부상이 겹쳐, 최하위의 원인이 되었다. 대들보였던 장성호의 3할 커리어가 끊기는 등 경기 외적인 악재도 수더분하였으며, 이 당시 성난 팬들은 단장인 정재공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정재공 단장이 보낸 용역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훗날 LG 프런트들이 쌍둥이마당을 닫아버린 것처럼 호사방을 폐쇄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롯데가 4연꼴 사슬을 끊자마자 2년 간격으로 LG와 꼴찌를 나눠먹기 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엘롯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겼다. 그래도 2000년대에 엘, 롯보다는 포스트시즌을 많이 갔건만.. 역시 꼴찌 나눠먹기가 컸다. 결국 정재공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했고, 후임으로 김조호가 취임하게 되었다. 시즌 후 서정환 감독 역시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2008년 시즌에는 서재응이 팀에 합류하고, 2003년 플옵에서 기아를 관광보내버린 조범현이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찌감치 선수층이 무너져버린 터라 팬들도 좋은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나 잘 하길 기대하였다. 물론 해태 성골도 아닌데 어떻게 감독 자리를 맡겼냐며 비난하는 호사방 아재들도 있었다 출발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최희섭이 뇌진탕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으로 삽을 들었고, 장성호 역시 지난 시즌 무릎 부상의 여파로 인해 잔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상훈 역시 큰 부상을 당해 차일목이 주전포수로 써야하는 등 팀에 먹구름이 잔뜩 꼈고, 팀은 5월 초까지 쭉 꼴찌를 달렸다. 하지만 5월 중순부터 최희섭을 대신해 재주리게스이재주가 4번타자를 맡기 시작하고 윤석민이 에이스로 등극, 유망주 수준이었던 이범석이 호투를 펼치며 선발진에 진입하며 점점 순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5월 말부터는 히어로즈LG 트윈스를 제치고 5-6위권을 형성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공격력을 투수력으로 상쇄하는 야구를 펼치며 4위를 내다보나 했으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힘이 떨어졌다. 시즌 막판에는 무리한 4강 싸움 대신 1.5군을 돌리면서 경험을 주는 형태로 운영하였고 6위로 시즌을 마쳤다. KIA로 바뀐 이후 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손영민, 양현종이 급부상했고 전반기에 부진했던 대졸신인 나지완이 후반기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팀에 가세했으며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간 공백이었던 키스톤 자리[39]를 메꿀 유망주로 기대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성적은 8486. 가을야구를 했던(2004년, 2006년 시즌) 이듬해에 최하위를 찍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그 덕분에 양현종안치홍을 얻었다.[40]

4.1.3 어메이징과 잠시동안의 부흥(2009~2011)

2008년에 무리하지 않고 유망주들에게 경험을 주는 식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음, 2차 1지명으로 안치홍을 지명하고 구리본즈였던 김상현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전력이 급상승, 1997년 이후 12년, KIA 타이거즈로는 처음으로 7차전까지 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2010년에는 16연패라는 수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강을 놓고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1년에 윤석민이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지만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4위에 그치면서 SK에 1승 3패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구단은 그 책임을 물어 조범현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재앙이 찾아오는데...

4.1.4 타이거즈의 3차 암흑기 멍게 강점기 (2012~2014)

조범현 감독이 16연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롯데와 4강을 두고 다투는 뒷심을 발휘한 반면, 선동열은 선수단을 아예 새로 짜는 수준의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암흑군주라는 평만 듣고 말았고, 재계약을 확정지었다가 팬덤에 밀려 3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후임으로 김기태감독이 취임하였으나 2015년 3월 특별지명으로 이대형 지명, 연습경기 9경기 103실점 등으로 분위기는 좋지 않다.
2015년에도 포스트시즌 탈락을 하여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의 4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 기록(5-7-6-5)과 타이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4.1.5 김기태 부임 (2015~)

588이라는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재계약을 추진하자 결국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퇴임하고, 그 자리에 김기태 전 LG 감독을 선임하였다. 첫해에는 7위를 기록하는데 리빌딩 시즌이라고 해서 순위는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41] 그리고 2016시즌은 구단에서 이범호 잡아준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이고[42] 2017시즌은 양현종 등 거물급의 FA가 기다리기 때문에 어차피 외부 FA를 못잡는 관계로 김기태 감독을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인 드래프트에서 삽질을 거듭한데다 '합리적인 선' 운운하며 스토브 리그에서 손을 놔버린 프런트에 대한 팬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근접한 상황이다.[43]

그나마 다행인건 FA시장에서 철수하고 수준급 투수용병 영입에 집중한다는 약속은 지켰다. 물론 2016시즌이 시작되어봐야 새로 영입한 외국인선수들의 진가를 알겠지만 시즌전 선발진 전력은 어느팀에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선발진을 제외한 모든전력이 리그 하위권 수준이며 그나마 타자진은 15시즌 최악의 성적을 남긴만큼 올해는 작년보다는 못할 수 없어 상승할거라는 예상을 하고있다.

투수진도 양현종-지크-헥터로 이어지는 원투쓰리펀치는 충분히 믿을 만 하고, 4~5선발과 불펜은 비록 불안하지만 홍건희, 김윤동 등 젊은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는 점이 고무적. 여기에 7월부터 가세한 임창용은 비록 41세의 나이지만 여전한 뱀직구를 선보이며 앞으로 1~2년 정도는 끄떡 없을 것으로 보이며 최영필, 김광수 등도 베테랑으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는 만큼 타선 만큼이나 투수진도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 2016년 시즌은 절반 정도 남아있으며 타선은 원래 기복이 있기 마련이고 투수진은 엄밀히 말해 잘쳐줘야 리그 중위권이므로 최종 결과는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옳은 방향으로 성공적인 리빌딩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다.

2016년 8월 31일, 4위로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잔여경기가 30경기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남은 경기에서 5할 승률만 유지해도 높은 확률로 가을야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5일, 타지인 대구에서 삼성을 잡아내며 5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비록 와일드카드에서는 5위 핸디캡 때문에 1승 1패를 하고도 LG에게 밀려 탈락했지만, 히 드랍 더 볼로 한 경기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작년 와일드카드와는 달리 1차전을 잡아내며 KBO리그 첫 와일드카드 2차전을 열었고, 두 경기 내내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주며 팬들을 설레게 했다. 엠팍, 디씨 등 주요 야구 커뮤니티의 팬들 반응은 그야말로 장밋빛 물결. 서정환 감독 시절이나 조범현 감독 시절에도 하위권 팀이 다음년도에 바로 가을야구(심지어 09년엔 무려 우승을 했다)에 진출했던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나 2군 선수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제공하면서 두터운 선수층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전임 감독들 시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올 시즌보다 내년 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팀이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태감독과 코칭스텝 + 프런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또한 2020년까지 최고의 명문구단이 되자는 TEAM 2020이라는 계획을 선언했는데 당시 팬들은 비웃었지만 실제로 현대-KIA 자동차그룹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고 있다느 사실이 알려지며 재평가 받기도 했다. 나유리 기자의 말에 따르면 모기업 지원이 엄청나서 현장에서 부담을 느낄 정도라고. 실제로 2015년에 1,2군 경기장에만 110억을 투자했으며, 기아 챌린저스 필드에 최첨단 재활센터도 건설했으며, 야간 경기가 가능한 신축 2군 경기장을 신설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4.2 관련 기록들

4.2.1 역대 성적

­우승
­준우승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팀이름경기수승률
19824위/6팀[44]4위해태 타이거즈80384200.475
19832위/6팀[45]우승100554410.556
19845위/6팀[46]5위100435430.443
19853위/6팀[47]3위110575210.523
19862위/7팀[48]우승108673740.644
19872위/7팀[49]우승108554850.532
19881위/7팀[50]우승108683820.639
19892위/7팀우승120655140.558
19902위/7팀3위120684930.579
19911위/8팀우승126794250.647
19922위/8팀3위126715410.567
19931위/8팀우승126814230.655
19943위[51]/8팀4위126655920.524
19954위/8팀4위[52]126645840.524
19961위/8팀우승126735120.587
19971위/8팀우승126755010.599
19985위/8팀5위126616410.488
19997위/8팀[53]7위132606930.465
20006위/8팀[54]6위133577240.442
연도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팀이름경기수승률
20015위/8팀5위KIA 타이거즈133606850.469
20022위/8팀3위133785140.605
20032위/8팀3위133785050.609
20044위/8팀4위133676150.523
20058위/8팀8위126497610.392
20064위/8팀4위126645930.520
20078위/8팀8위126517410.408
20086위/8팀6위126576900.452
20091위/8팀우승133814840.609
20105위/8팀5위133597400.444
20114위/8팀4위133706300.526
20125위/8팀5위133626560.488
20138위/9팀8위128517430.408
20148위/9팀8위128547400.422
20157위/10팀7위144677700.465
20165위/10팀5위144707310.490
KBO 통산 35시즌V10 433922202032870.522

그외 사항은 KBO 리그/역대 팀 스탯 문서 참조.

4.2.2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LG 트윈스83KS : 4승 1무
97KS : 4승 1패
02PO : 2승 3패
16WC : 1승 1패
WC 1패, PO 1패, KS 2승
개별 경기 총 전적 11승 1무 5패
삼성 라이온즈86KS : 4승 1패
87KS : 4승
90PO : 3패
93KS : 4승 1무 2패
PO 1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12승 1무 6패
두산 베어스87PO : 3승 2패
04준PO : 2패
준PO 1패, PO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3승 4패
한화 이글스88KS : 4승 2패
89KS : 4승 1패
91KS : 4승
94준PO : 2패
06준PO : 1승 2패
준PO 2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13승 7패
현대 유니콘스89PO : 3승
96KS : 4승 2패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7승 2패
롯데 자이언츠92PO : 2승 3패
PO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2승 3패
SK 와이번스03PO : 3패
09KS : 4승 3패
11준PO : 1승 3패
준PO 1패, PO 1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5승 9패

4.2.3 역대 감독

KIA 타이거즈
순서이름재임기간성적
초대김동엽1982년[55]5승 8패
2대김응용1983년 ~ 2000년[56][57]1164승 934패 51무
3대김성한2001년 ~ 2004년[58]257승 212패 18무
4대유남호2005년[59]60승 67패 2무
5대서정환2006년 ~ 2007년130승 159패 4무
6대조범현[60]2008년 ~ 2011년267승 254패 4무
7대선동열2012년 ~ 2014년167승 213패 9무
8대김기태2015년 ~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정식 감독이 될 때까지 그 사이의 전적도 포함.
  •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코치나 2군 감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코치와 2군 감독을 꽤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간에 한 감독이 징하게 오래한 건 사실이다.

4.2.4 역대 단장

KIA 타이거즈
순서이름기간
초대정재공2001년 ~ 2007년
2대김조호2008년 ~ 2013년
3대허영택2014년 ~ 현재

정재공 단장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하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시기에 모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많이 얻어내고 FA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친 현장 개입으로 김성한 전 감독이 알력다툼 끝에 옷을 벗는 일이 있었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먹튀가 되면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 2007년에 팬들과의 충돌로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조호 단장의 경우, 정재공과는 달리 현장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내부 행정에만 신경쓰는 스타일이라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FA 영입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한다면 과감히 영입하고 있다. 오히려 FA에 너무 소극적이라며 김조호구라고 놀림받는다 다만 2013년 전라북도 연고지 문제[61]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상근 자문직을 맡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 관리직에 있었다 단장으로 들어온 허영택 기아자동차 상무는 2005년 10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타이거즈 부단장으로 있었던 임직원. 선동열 감독의 2014년 시즌 이후 재신임 관련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발언으로 KIA 팬들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부단장 시절 정재공 단장에게 안 좋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 거세다. 게다가 정재공 단장 밑에서 배웠다면 적극적인 트레이드 시도나 FA 영입을 시도할 만 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조호 단장처럼 조용히 있다가 과감히 한 번씩 데려오는 스타일도 아니라 아무 것도 안하는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어서 팬들의 불만이 많다.

4.2.5 역대 주장

KIA 타이거즈
기간이름
2001년이호성[62]
2002년 ~ 2004년이종범
2005년김종국
2006년이종범
2007년이종범장성호[63]
2008년장성호김상훈[64]
2009년김상훈
2010년최희섭김상훈[65]
2011년김상훈
2012년차일목
2013년김상훈
2014년 ~이범호[66]
  • 이종범이 주장을 제일 길게 했으며 특수 포지션인 포수 김상훈도 특기할만 하다. 그 외에도 이적생 출신으로 구단 최초 주장을 맡은 이범호도 주장을 길게 한 편. 이름에 '이'와 '범'이 들어가면 주장을 길게 한다고 카더라

4.2.6 역대 유니폼

4.2.7 역대 등번호 리스트 (해태 시절 포함)

4.2.8 역대 응원단장

KIA 타이거즈
순서이름기간
초대임갑교[67][68]1982년 ~ 1995년
2대김창규[69]1996년 ~ 2001년
3대조지훈[70]2002년 ~ 2003년
4대김주일[71]2004년 ~ 2014년
5대나윤승[72] 2015년 ~ 2016년 6월 4일[73]
6대서한국2016년 6월 28일 ~ 현재

5 선수단

6 응원가

7 유니폼

8 영구결번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이종범선동열

영구결번에는 7번과 18번이 있는데 이종범이 달고 뛰었던 7번은 영구결번이 확실하나, 18번의 경우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8번은 해태 타이거즈의 영구결번이었으나 구단이 KIA에 매각되면서 눈치 없는 KIA의 프런트진이 해태 색체 없애기의 일환으로 영구결번을 무효화하고 당시 유망주이자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주려고 했던 것.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면서 결국 KIA에서도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18번을 잠깐 받았던 김진우도 구단이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부담이 되었던 눈치. 선동열 본인이 KIA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구결번의 취지를 살리고자 감독 선동열에겐 90번이 갔다. 이후 선동열의 KIA 감독 행보를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할 수 있다. 안 그랬으면 영구결번 18번이 더럽혀질 뻔 했으니까

다만 영구결번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74]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처지. 선동열이종범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나오기 힘든 어머어마한 선수들이다보니... 특히 선동열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분업화가 자리잡기 전인 8~90년대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기록한 성적이라 더더욱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도 김응용. 김봉연, 김성한, 조계현, 이강철 등의 레전드들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꽤나 득세하고 있지만, 이쪽도 전혀 낮은 것 같지 않은데 구단에서는 딱히 영구결번을 늘리거나 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프런트가 해태 시절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쪽이 중론인데, 가뜩이나 해태색 지우기에 이골이 난 기존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데서까지 해태색 지우기냐며 성화.

9 외국인 선수 선발

9.1 투수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였던 투수 위주의 팀 컬러답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투수 용병을 잘 뽑기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을 포함, 투수 용병에 있어서는 게리 레스[75], 약쟁이다니엘 리오스, 변화구 구사가 뛰어났던 마크 키퍼, 캐나다 국가대표 마이클 키트 존슨, 일본으로 건너가 더 좋은 활약을 한 세스 그레이싱어, 2009년 KIA 타이거즈의 V10을 이끌었던 아킬리노 로페즈릭 구톰슨 등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야구계의 용병농사가 외국인 투수에 집중되면서 더욱 돋보인다. 타선이 시망이라서 그렇지 매년 10승급 외국인 선수를 데리고 올 정도.

2012년에 아킬리노 로페즈를 포기하면서까지 데려온 앤서니 르루호라시오 라미레즈가 시즌 초반 부진하고, 결국 호라시오 라미레즈헨리 소사로 교체되면서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앤서니와 소사 모두 선발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주면서 어느 정도 우려는 불식되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시망... 2013년에는 희대의 설레발 디버프로 본인들 성적마저 수직하락했다.[76]

2014년에는 NPB 다승왕 경력이 있는 데니스 홀튼을 선발 투수로, 마이너리그에서 수년간 마무리로 경험을 쌓았던 하이로 어센시오를 영입하였다. 홀튼은 시즌 초부터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루며 좋은 성적을 낸 반면, 어센시오는 마무리로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보다는 불안한 피칭 내용을 보이며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래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제대로 망한 2013년을 제외하면 그래도 외국인 투수를 보는 스카우터의 능력은 좋다고 평가받나 싶었으나.. 데니스 홀튼은 7월이후 무릎연골이 찢어져 구위저하의 원인이 되었고 수술이 불가피해 방출통보를 받았다. KIA구단은 어센시오를 경험한뒤 마무리투수 용병은 뽑으면 안된다는 인식의 흑역사를 가져다주었고 당시 활약하고 있던 타자용병인 브렛 필의 출전이 많이 되지않았다..[77] 결국 팬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투수용병쪽에선 실패한 스카우트 사례로 남게되었다

그리고 2012~2013년을 KIA에서 뛴 헨리 소사는 2014년 넥센에서 뛰다가 2015년 부터 LG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뛰고있다.

다만 2012년 이후로는 투수 픽이 예전같지 않아졌다. 2009년 한국시리즈의 영향으로 타 팀에서도 수준급의 외인 선발투수를 오버페이까지 해오면서까지 데려오게 되었고, 선 감독의 고집으로 인해서 뽑아온 투수들은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4년 타자 잔혹사를 끊음과 동시에 투수 픽은 흉작이 되어가는 현실. 2015년 외인 투수인 조쉬 스틴슨필립 험버 역시 피장타율이 높아서 2009년의 외인 콤비를 봐온 KIA 팬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지 못했다. 그나마 스틴슨이 나아졌지만 험버는 역대 KIA 외인투수 중에서 역대 최악의 투수가 되어버렸다. 조쉬 스틴슨은 2015년 9월 이전까지 10승투수가 되어 다음시즌 재계약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9월 이후 어깨부상으로 1승밖에 추가하지 못했고 어꺠부상 이후 구위저하와 제구난조가 찾아와 재계약에 적신호가 켜져 다음시즌 재계약에 실패했다. 험버대신 대체용병으로 영입한 에반 믹은 초기엔 불펜의 핵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팔통증과 부상으로 저조한성적을 남겨 결국 이번시즌도 투수용병 뽑기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2016년 시즌에는 프런트가 각성하였는지 헥터 노에시, 지크 스프루일이란 최상급의 용병을 영입하였다. 헥터 노에시는 마이너리그에서 9시즌, MLB에서 5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23G 98선발출전에 584.1이닝, 35승 28패 ERA 3.71 WHIP 1.16을 기록하였는데, 주목할만한 기록은 삼진/볼넷 비율이다. 584.1이닝동안 삼진은 537개, 볼넷 126개를 던졌다. MLB 5시즌 동안 총 4개의 팀(양키스, 매리너스, 레인저스, 화이트삭스)을 거치며 107G 53선발출전 395.1이닝 12승 31패 ERA 5.30 WHIP 1.46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크 스프루일은 프리미어 12에서 미국전 선발대표로 나섰다. 한국 vs 미국 예선전에서 6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여주어 KBO 스카우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이너리그에서 8시즌, MLB에서 2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91G 143선발출전에, 903.0이닝, 52승 60패 ERA 3.86 WHIP 1.30을 기록하였다. 승보다 패가 많지만 통산 ERA가 3점대로 준수하며, 이닝당 출루 허용률도 1점대로 굉장히 훌륭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땅볼 대비 플라이볼 수치도 1점대로 수비요정들이 즐비한(?) 기아에서 땅볼요정 스틴슨의 뒤를 이어갈지 궁금해진다. 수비의 도움을 받지만 성적까지 따라가게 되는데.. MLB에서 2시즌동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활약하였는데 통산 12G 3선발출전 1승 3패 ERA 4.24 WHIP 1.56으로 크게 뛰어난 활약을 하지는 못하였다. 단순 MLB기록으로만 보면 위력적인 투수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수차례 팀을 옮긴것으로 보아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은 투수로 평가 된것으로 보인다.

9.2 타자

투수 쪽에서는 꾸준히 평타 이상을 쳐주는 반면 타자 용병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뽑기운이 없었는데, 그나마 해태-KIA 역사상 제 몫을 해줬던 타자 용병이라면 1999년 해태에서 뛰었던 트레이시 샌더스, 윌리엄 브릭스, 2000년에 대체 용병으로 들어와 쏠쏠한 활약을 했던 준족의 똑딱이 헤수스 타바레스[78], 3할에 20홈런을 넘겼던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201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소유자인 2014년 외국인 타자 브렛 필 정도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름이 로 끝나는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면 성공한다고 말했지만 밑에 서술된 윌슨 발데가 그 전통을 깨뜨리고 말았다.(…)

해태-KIA 타이거즈의 타자용병 잔혹사를 설명하자면, 실력 외에 애초에 해태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잘할수가 없던 숀 헤어는 일단 논외로 두고, 2000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던 호세 말래브와 에디 피어슨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다. 호세 말래브는 입국 당시 총기를 소지하였던 것이 들통난 데다 실력마저 신통치 못해 시즌 시작도 전에 짐을 쌌으며 에디 피어슨은 1999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면서 실력은 검증받았지만 당시 해태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대우에 실망해 자기 스스로 짐을 싸서 나왔다.(…) 그 대체 용병으로 제이슨 배스와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뛰었던 내야수 아르키메데스 포조를 데려왔으나 제이슨 배스는 좀 하다 싶더니 부상으로 짐을 쌌고, 포조는 시즌 초반 부진하자 곧바로 쫓아냈다. 여담으로 포조는 해태에서 쫓겨난 후, 해태의 열악한 대우에 대해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다.

2002년 KIA 타이거즈로 바뀌고 첫 풀시즌을 치렀을 땐 멕시칸리그 홈런왕 출신 워렌 뉴선을 데려왔는데, 이 선수는 키는 엄청 작은데 거포스윙을 남발하다 폭삼만 당하며 결국 퇴출. 후임이었던 루디 펨버튼도 마땅한 수비 포지션이 없어 지명타자로만 나왔으나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2007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홈런왕을 했던 래리 서튼을 영입했다. 나이가 많고 무릎이 좋지 않아 전년도엔 지명타자로 뛰었으나 KIA로 오면서 좌익수 수비에 들어갔고, 그나마 타율은 괜찮았으나 득점권 타율이 처참했고 장타력마저 떨어지면서 최희섭이 KIA에 입단하자마자 퇴출되었다. 서튼은 KIA 타이거즈를 끝으로 은퇴했는데, 2008년 시즌 종료 후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던 KIA 타이거즈에 이 선수를 추천해줬다.

2008년에는 유격수 홍세완의 공백 때문에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했다. 시범경기만 해도 빠른 발과 쏠쏠한 타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똑딱이인 주제에 큰 스윙을 가져가고 수비마저 정줄 놓은 수비를 보여주며 일찌감치 퇴출되고 말았다. 이 선수는 KIA에서 퇴출된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체 용병으로 입단하였으나 거기서도 퇴출.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거쳐 신시내티 레즈에서 활약하였다.(…) 그냥 동양 야구와 안 맞았던 모양.

그런데, 2014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3명 보유 2명 출장 및 타자용병 의무 영입으로 늘어나면서, 6년만에 타자 용병을 영입했다. 그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던 브렛 필. 이전까지의 타자 외국인 잔혹사 때문에 의혹을 가지기도 했고 실제로 시범경기까지는 매우 부진했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 되자 OPS 0.894를 찍었다. 득점권 타율은 낮았지만 이것은 매 시즌 편차가 심하니 선수의 능력으로 볼수는 없다. 중요한 시점마다 영양가 넘치는 홈런을 때려내며 말라 죽어가는 기아 타선에서 돋보이는 타격능력을 보여주었고, 삼성 배영수의 공에 손등을 맞아 경기수가 부족해서 누적 기록은 마땅치 않았다.
재계약에 성공한 2015년에는 KIA의 소년가장(...) 역할을 하였다. 예상 대로 득점권 타율이 평균으로 돌아오는지 아주 좋아졌다. 인성 좋고 성실하고 사고 위험이 없으며 잘생기고 잘하자 팬들 사이에서는 타리그로 다시 갈까봐 전전긍긍. 필은 이렇게 타이거즈 타자 잔혹사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다만 2014~2015년도가 엄청난 타고시즌이라 1루수인데다가 외인타자들과 비교해서는 아주 특출나지 않다는게 문제. 나쁜공에도 스윙이 나가는 배드볼 히터라 출루율이 타율 감안하면 낮은 편. 미국에서도 항상 스타일이 비슷해서 이게 한계가 아닌가 하고 교체하자와 3번째 시즌을 같이하자는 의견이 충돌했지만 브렛필은 이번에도 재계약에 성공하며 타이거즈 역사상 최장수 타자용병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브렛 필 본인도 자신을 보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는 듯 비시즌 기간 동안 웨이트로 몸을 키웠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2016 시즌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15년 종종 보여주던 팬들을 환장하게 하는 클러치히터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건실하던 수비마저 지나친 웨이트로 몸이 무거워졌나무너지면서 다른 의미로 환장하게 했다. 포털 사이트 등에서 '필까충 VS 필맘충' 이라며 팬들끼리 서로 비난해대며 싸우는 씁쓸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고, 이곳 위키에서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사상 최악의 용병', '90만달러 거품' 이란 표현도 쉽게 볼 수 있었다.

6월 중순부터 잠시 살아나는 듯 했으나 다시 추락을 거듭하며 최종성적 20홈런 OPS .868로 마무리했다. 시즌 내내 1루만 전담했음에도 시즌 초 무상 트레이드로 영입된 OPS .882를 기록한 2루수 서동욱보다도 OPS가 낮다.이와 더불어 두자릿수 병살-실책을 기록했으니 지크와 함께 사실상 퇴출 확정이다.

10 이모저모

10.1 선수 육성 체계

일단은 KIA 타이거즈는 2010년부터 8개 구단 최초로 3군 체제를 시작한 팀이다. 하지만 창설 초기에는 무늬만 3군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했다.(...) 일단 2군 시설부터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이니 막 생긴 3군 시스템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2년 말에 완공된 함평 육성전용구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함평 전남야구장#을 임대하여 2군 구장으로 사용하였던 기아 타이거즈 2군은 그야말로 이었으며(...) 전용구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함평군의 훈련시설이 아직 완공 전이라 육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2012년까지는 잔류군 및 재활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체제 이후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들을 많이 뽑고 신고선수들도 많이 영입하여 3군 체계를 강화시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면서 경쟁을 통해 훌륭한 팜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 2의 이준호나, 넥센의 서건창 등을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시즌 후반기에 고양 원더스 소속의 외야수 강하승을 신고선수로 영입한 것[79]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군 총괄코치가 3군까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또한, KIA는 코칭스태프 체계에서 2군 감독이 따로 없고 1군 감독이 2군, 3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따른다. 대신 2군 총괄코치라는 일종의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을 두어 관리하는 체계. 그만큼 1군 감독이 2군과 3군까지 세밀히 점검을 하면서 모든 선수단의 운영을 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선동열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선수 육성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면서 경쟁 시스템 구축이 가속화 될 전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함평에 좋은 시설이 들어서고 무한 경쟁체제가 확립되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야지만, 그리고 선동열 감독 이후의 코칭스탭진이 2군 및 3군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시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선 감독이었지만, 그의 부임 이후 육성군 체질 개선으로 2군이 좋은 성적은 얻은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단 최초로 3군이라는 단어를 도입하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산물이었던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완공되면서 선수 육성의 하드웨어는 갖춰진 상태이다. 다만 그 선수를 발굴하는 스카우터가 좋지 않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챌린저스 필드 클럽하우스 완공이 늦어진 상태에서 2군 코치진들이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한 결과 2013년 시즌의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과거 2군 시스템과 인프라는 어느정도 개선은 된 편이지만 별개로 재활시스템은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다.[80]아직 갈 길이 멀다... 2015년 12월 7일 홈구장인 챔피언스 필드 부지내에 재활센터를 만들계획이라고 한다. 완공이된다면 구단 자체 재활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KIA, 인프라 대확충...프리미엄 좌석, 3군 구장, 재활센터 건립 그리고 2016년 7월 13일 2군 경기장인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 옆 부지에 재활센터 개소식을 가졌고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던 재활시스템은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10.2 인기도

한국 프로야구 최고 인기 구단의 양대산맥.

인기가 가히 어마무시하다.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된다면 최근 KIA의 성적과 팬 수를 보라. 저조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인근 지역으로 원정올 때마다 아무리 못해도 절반이 넘게 붉은 유니폼과 노란 막대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면 KIA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실감할 수 있다. 국내 최고 인기구단 엘롯기의 일원이자 전국구 인기구단.

프로야구가 태동한 1980년대에 5번의 우승을 거머쥐면서 성적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쥔 구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 최초의 어린이 야구단 사업을 시작하는 등 철저한 팬 관리 활동도 했다. 여기에 전국 각지로 진출한 연고지 출신 인사들이 대거 타이거즈 팬으로 유입되면서 전성기에는 원정가서 결코 꿀리지 않는 관중버프를 등에 업고 경기를 펼친 팀이었다.[81]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몰락과 더불어 성적이 예년만 못해지자 예전에 비해 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아니 이정도가 많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거면 대체... 그렇지만 여전히 전국구 인기구단이며, 잠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엄청난 관중 동원을 보장하고 있다. 오랜만에 승승장구하며 1위를 달렸던 2009년에는 잠실, 문학, 목동 가릴거 없이 엄청난 관중이 모여들었다.

잠실의 경우 농담삼아 제2의 홈구장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고 그 외에 목동, 문학에서도 공격 때 응원소리 응집력이 커서 그 소리가 홈팬들 못지 않게 크게 들린다. 그리고 2015년과 2016년부터 추가된 수원, 고척 원정 역시 마찬가지. 한마디로 수도권에서 경기할 때는 말이 원정이지 최소한 중립 경기나 다름없으며, 2009년처럼 성적이 좋을 때는 사실상 홈 경기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그 해 후반기에 1위를 달리며 정규 리그 우승 가능성이 모락모락 가시권에 들어올 즈음 잠실은 도리어 KIA 관중이 홈팀인 LG/두산 관중의 2배 가까이 될 정도였으며 한국시리즈 잠실 중립 경기 때도 SK팬보다 최소 2~3배는 훌쩍 넘겼다. (...)

오히려 홈 구장 관중 동원이 원정보다 적어 이것을 떡밥으로 물은 안티들이 홈도 못 채우는 주제에 무슨 인기구단이냐? 라는 이야기를 한다.[82] 어마어마한 원정 관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홈 구장 관중이 적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적은 광주광역시 인구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83] 그리고 원정 KIA팬들이 잠실이나 문학구장을 잔뜩 채울 경우 이 관중수는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죄다 홈팀 관중으로 집계되는 문제도 있어 관중 집계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원정관중 동원은 2011년1위로 나타났다. 2016년에 진행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서울에서 두산, LG 다음가는 인기를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박동희 기자가 쓴 기사라든가 여타 을 보면 기아가 프로야구 중계 시청률 1위를 달린다는 집계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근거를 내놓아도 몇몇 어그로나 안티팬들이 여전히 상황을 부정하는 탓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스스로 비인기구단 드립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인기가 없잖아요 그래도 최근엔 안티팬들도 기아팬들이 많다는건 인정하고 들어간다. 대신 다른걸로 까지만...

같은 호남이지만 의외로 전북에서는 KIA, 아니 야구 인기 자체가 뜨뜨미지근하다. 전북지역은 오히려 KBO보다는 K리그가 강세인데 전주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전북 현대 모터스의 2015년 평균관중은 170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 야구의 인기는 미지근한편이다.[84] 그나마 월명야구장에서 KIA 경기를 유치하던 군산이 전북에서 KIA 인기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2014년부터 1차 연고지명권이 저쪽 경상도에 있는 모 게임회사 구단으로 넘어가서 그런건지, 아니면 새로 지은 야구장이 너무 좋아서 굳이 딴데서 홈 경기인듯 홈 경기 아닌 홈 경기를 치르기가 싫은건지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다.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완공된 후 평균관중수 1위를 기록중. 성적도 좋지 않지만 팬들이 이정도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따름. 그간 열악했던 경기장 시설 때문에 팬들이 경기장을 안 찾은 것일 뿐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성적 하락에 가속화가 붙은 6월부터는 관중수 감속화 역시 가속화 되었지만 66만으로 총 관중수 5위를 기록. 성적만 좋으면 80~90만도 가능할 듯. 지역특성상 100(평관 14,000명)만은 인구수나 원정관중 버프가 없기 때문에 힘들듯 싶다. 구도라고 불리우는 부산도 인구 350만에서 100만 넘길려면 4강 싸움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우승권 들어가면 200만도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홈관중 전경기 매진시켜도 200만은 안된다는게 함정 아닌 함정) 150만 인구에 광주가 100만을 넘긴다면 뭐 더이상 할말이 없다.

10.3 라이벌 팀

1980년대 중후반은 번번히 한국시리즈에서 붙어서 승리한 삼성 라이온즈가 라이벌팀이었다. 삼성으로서는 정규 시즌에서 1위를 하고도 항상 한국시리즈에서 물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억울했을 듯.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비슷한 콩라인으로 전락한 빙그레 이글스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85] 같은 제과업계 맞수였던 롯데 자이언츠 역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 에는 90년대 급격히 떠오른 LG 트윈스와 라이벌 관계가 섰다. 특히 이 시기 잠실구장에서 LG와 해태의 대결에는 주중에도 매진이 될 때가 많았다.

다만 SK 와이번스가 4연속 한국시리즈 제패할 뻔 했던 것을 막았던 2009년에 사제 간의 대결로 라이벌 플래그가 생성된 적은 있었다.[86]

10.4 신인왕 잔혹사

의외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1982년 리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우수 신인왕과 연이 지지리도 없는 팀이다. 1985년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순철이 배출된 이후 2015년까지 30년동안 타이거즈에서 신인왕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10번의 우승을 거머쥐는 동안에도 빼어난 신인이 나오지 못하거나, 그 해에 신인왕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음에도 그 해에 더 괴물같은 선수들이 타 팀에서 나오면서 인연을 맺지 못했다.

  • 1990년에 1차지명으로 입단한 이호성의 경우 그 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그 해 신인왕은 김동수의 차지였다.
  •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종범의 케이스로, 1993년에는 걸출한 스타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한 해였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교타자 양준혁과의 라이벌 구도가 그려졌다. 결국 신인왕 투표에서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 이종범은 그 해 한국시리즈 MVP와 이듬해 리그 MVP로 신인왕의 설움을 풀기는 했다.
  • 2006년 최고 계약금 10억을 쥐고 입단한 한기주의 경우에도 데뷔후 선발 및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해에 혜성처럼 나타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괴물급 투수의 등장으로 묻혔다.
  • 2009년 최연소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던 안치홍 역시 그 해에 유일한 순수 신인으로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어 약점이 노출되어 삽질을 거둔 끝에 0.235라는 멘도사 라인 급의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중고 신인인 이용찬에게 자리를 내줬다.
  • 2012년에도 박지훈이 순수신인 출신 신인왕으로 도전했으나 서건창이 등장하면서 그대로 망했어요...

10.5 군기 및 강력한 내부 자체징계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2000년대 초반까지 KIA 타이거즈 군기는 악명 높았다. KIA로 트레이드 될 바에는 은퇴하는게 낫겠다고 옷 벗은 선수들도 있을 정도였는데[87]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대진과 함께 앞장서서 똥군기들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종범 본인도 이 부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런데 여전히 군기는 다른 9개 구단에 비해 강한 편인데, 김주찬의 경우 FA로 KIA로 이적한후 한 인터뷰에서 "군기가 다른 팀에 비해서 센 편인거 같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것과 연관되어서 만일 구단 내의 선수가 사생활이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경우 내부 자체 징계를 세게 때리는 편이기도 하다. 무단 이탈을 한 김진우나 음주운전을 한 손영민, 구단물품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겼던 한성구의 경우 임의탈퇴라는 강수를 거는 한편 SNS에서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여 팬들의 분노를 산 윤완주의 경우에도 KBO에서는 경고 정도로 끝난 부분을 구단 자체적으로 3개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 바 있다.[88] 이는 훗날 최진행약물 복용 문제에 따른 징계가 KBO 차원에서 30경기 출장 정지 정도로 그친 부분과 비교되기도 했다.유창식이 징계를 얼마나 더 받을지 기대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10.6 선수들의 충성심

강한 군기와는 별개로 타이거즈에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보통 해태 시절에 활약했거나 연고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대표적으로 임창용의 경우 삼성으로 떠난 뒤에도 몇 번이나 타이거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 정성훈은 현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을 듣자 팀을 떠나기 싫다며 울었고, 신종길은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KIA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10.7 노란 응원막대(일명 단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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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기사)
중간에 껴있는 엘지 트윈스 팬 지못미

각 팀마다 팀 컬러를 반영한 응원막대를 판매하고 있지만, 빨간색과 감색을 팀 컬러로 내세우고 있는 타이거즈는 뜻밖에도 노란색 막대풍선을 쓰고 있다. 일부 KIA 팬들은 노란색 응원막대를 단무지라고 부르기도. KIA 타이거즈의 BI나 CI에서도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노란색을 찾기 힘들고 CI 변경 전에도 노란색 계열을 쓴 부분은 마찬가지로 호랑이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란 막대풍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LG 트윈스가 19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막대풍선을 이용한 응원을 시작한 뒤 다른 프로야구 구단에서도 응원 막대풍선을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KIA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막대풍선 색상으로 고려할 때 빨간색도 써봤지만 잘 보이지 않아서 시각적으로 빨간색보다 잘 보이고 부피도 커보이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이 바뀌면서 2004년까지 빨간 응원막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은 다시 노란막대로 회귀했다. KIA가 한 번 쓰다가 버린(?) 붉은색 응원막대는 훗날 팀 상징 컬러가 바뀐 SK 와이번스에서 쓰고 있다.버린거 재활용 환경을 생각하는 SK 어떤 의미에서는 좀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해태 로고 중에도 노란색이 일부 있기도 하고 나름대로 호랑이 캐릭터에 노란색 계열이 들어가는 만큼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응원 막대풍선 색깔이 되었고, 노란 막대풍선은 타이거즈만의 상징물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호남에서 노란색이 정치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상징하는 만큼 타이거즈의 응원색으로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한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대에 이끌었던 평화민주당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고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생한 열린우리당도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썼다. 모두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정당들이다.

현재에는 일반적인 긴 모양의 막대풍선 외에도 호랑이발을 형상화시킨 막대풍선이나 탬버린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고 있다.

11 홈 구장

KIA의 홈 구장으로 사용중인 곳은 다음과 같다.

12 지역 연고 학교

13 출입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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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진화 전남매일 차장, 김종국 코치, 김여울 광주일보 기자
  • 이선호 OSEN 기자 - 타이거즈 밖에 모르는 바보, 타이거즈를 빠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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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각종 이야깃거리

  • 2012년 시즌 들어서 롯데 자이언츠넥센 히어로즈 등 각 팀의 여성 경기보조요원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야구의 인기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지면서 또 다른 화제거리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구단의 인기요소가 되기 때문인데, KIA는 그런 거 없다. KIA의 경우에는 경기 보조요원을 지역의 유소년 야구 선수들을 활용하는데, 구단 측에서는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경기에 보조로 참여함으로써 선수가 되기 전 프로야구 경험을 축적하여 선수 생활의 바탕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명한 야구 선수들을 직접 그라운드 안에서 보면서 선수로써의 꿈을 키우는 경험을 해준다는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실속있는(?) 방침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보조요원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소속 학교에 일 수당 5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하지만 2015년 시즌에서는 유소년야구선수 대신 다른구단들처럼 배트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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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1년 올드 유니폼 데이 당시의 이종범.)
  • 2005년 이래로 시즌 개막전에서 전패를 기록하면서 2012년까지 8연패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보니 초반에 팀 분위기가 꼬이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그 분위기가 계속 진행되면 팀 운영에 차질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KIA 타이거즈의 개막전 승률이 2012년까지는 0.393으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이 때누구의 가장 높은 타율과 같다 # 그러나 2013,2014,2015 시즌 개막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하며 개막전 승률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 예전에는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감독을 뽑을때 해태 타이거즈 출신을 선호하는 일명 해태순혈주의를 고집하였다.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들은 현재 김기태 감독, 조범현 전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태출신이였다.[90] 하지만... 2009 시즌을 우승시킨 비해태출신 조범현감독은 2011년 전반기 1위에서 후반기 16연패에 따른 빗발치는 팬들의 원성. 결국 정규리그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결국 패배로 이어진 결과는 팬들의 원성에 조감독은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를 한다. 자진사퇴라 쓰고 경질이라 읽는다 그러나 구단과 팬들에게 이를 깨게 만든 장본인이 있었으니 2012~2014년 3시즌 감독을 맡은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해태출신인 선동열. 일명 감동님 하지만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과 처참한 성적은 감독 출신이 꼭 해태출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해태순혈주의를 깨는 표본이 됐다.
  •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성이 좋고 실력이 좋은 선수라면 용병이든 누구든간에 차별하지 않고 섭섭하지 않게 대우를 잘해준다는 구단으로 정평이 나있는편. 이를 증명하는게 2015년 7월 27일 외국인 타자 브렛 필의 딸 킨리의 돌잔치가 열렸는데.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외국인선수가 돌잔치를 열게된건 처음이고 여는과정에서 구단은 이를 위해 많은 신경을 써주고 또한 선수단,코칭스텝,구단직원까지 참여를 하였다. 또한 2015년 시즌 전반기에는 필의 가족을 초청하여 시구를 하는 시구자가 되었고 이후 경기를 관람할수 있게 신경써주는 뛰어난 복지를 보여주었다.
  • 지방 연고 구단인 만큼 시구행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간혹 시구를 할 때 일부러 구단이 유명인사를 섭외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비해서 KIA는 그 반대로 시구를 원하는 쪽에 돈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인지 유독 광주/전남/[91] 산하 기초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시구가 잦은 편이다.(단체장의 시구 때 해당 지역의 단체관람객들의 동원은 덤) 그러면서 구단 한 켠에(특히 외야 출입구 부 울타리) 해당 지자체의 지역 행사를 홍보하는 현수막이 걸리는 등 홍보의 장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KIA가 시구행사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브 투게더 행사 등 자선단체 기부에 쓰인다.
  • 하도 선수들이 다치다보니 짜낸김기태 감독이 2015년 시즌을 위해 감독 자리에 오른 후, 선수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홈팀 덕아웃인 3루 쪽에 고사를 지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선수들의 부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눕갈량의 지혜. 물론 유리구슬김주찬 덕에 효과가 미미해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북어는 현재까지 걸려있다고 한다타이거즈는 어떻게 덕아웃에 북어를 달았나.
  • 구단 프런트가 야알못이라고 오랫동안 까였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방침상 사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한화 이글스 사장이 대신 결정권을 행사하며 오는 단장들 역시 순수하게 돈과 인프라 지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재공 이후 프런트가 구단 운영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현장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야말로 지갑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조금식 개선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현장의 요청이 있기 전에 박한우 사장을 필두로한 구단 고위층이 202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 재활센터를 건립하는 등[92] 구단 인프라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 KIA 협력병원에 안과병원이 있는데, 이 곳이 나름대로 시력교정 수술이 유명해서 KIA 소속 선수들이나 KIA를 거쳤던 선수들 중에서 이 곳을 통해서 안경에서 벗어난 선수들이 몇몇 있다. 양현종이나 김종국, 노수광 등이 그 예이고, 장성호는 롯데 시절에 했음에도 KIA와의 연을 통해 안경에서 해방되었고 조영훈 역시 삼성 시절에 시력 문제로 고생했다가 KIA 이적 후에 안경에서 해방된 뒤 NC로 이적되었다.

14.1 사건 사고

그 외에도 롯데, LG와 더불어 팬 많기로 유명한 구단이기에 그만큼 얘기거리도 많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문서 참조.

14.2 유명 타이거즈 팬

추가바람

유난히 KIA 팬들 중에서 코미디언이 많이 눈에 띄는 편이다. 일부 호남 출신 연예인 및 유명인사들이 KIA 팬일 가능성은 있지만 너무 못해서 별도로 KIA 팬임을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그냥 항목분리를 요망한다. 정치인사들 중에서도 기아팬이 삼성팬 못지 않게 많다. 다만 유명삼성팬 태반이 정치인사들이라는거....

15 팬 커뮤니티

16 관련 문서

  1. 도시연고로는 광주광역시지만 광역연고로 보게된다면 호남 지방 전체가 KIA의 연고다. 과거 유니폼 한쪽 팔 부분에 지역명을 표기하던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역명에 '광주' 대신 '호남'을 표기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2. 연고 학교 또한 호남 지방 전체에 퍼져 있다. 단 전북 지역 연고 학교 중 군산상고전주고NC 다이노스 산하로 편입되었다.
  3. 현대자동차그룹의 부회장.
  4. 구단주 대행 겸임. 기아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KIA 타이거즈의 사장도 겸한다. 같은 산하 스포츠 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의 경우도 현대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구단 대표이사도 겸하고, 나머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구단은 계열사 CEO가 구단주를 맡고 있다. 여담으로 이 부분에서 '사장=구단주'라고 표기돼 있었는데 배구단의 구단주는 배구와 마니아로 유명한, 그리고 정몽구 회장의 사위인 정태영 부회장이다.
  5. 현대차그룹은 계열사 대표이사가 구단 대표이사직을 겸임하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사 업무만으로도 업무량이 막중한 회사 대표이사 입장에서 회사 산하 스포츠구단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과 관련해서 이사회에 2번 연속으로 KIA 사장이 불참한 것을 놓고 억측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KBO 윈터미팅 등 오래전부터 KBO 이사회 관련해서는 한화 이글스 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화 이글스 구단의 의견 = 기아 타이거즈의 의견인 셈.
  6. 사실상 제2 홈구장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7.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다 기록. 2위는 삼성 라이온즈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8회.
  8. V6이니까 별이 여섯 개여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별이 일곱 개다. 모기업이 KIA로 바뀌면서 엠블렘을 재정리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 말이 맞다면 엠블렘을 다시 그리다가 우승을 너무 많이 해서 실수로 별 개수를 착각한 듯하다. 자세한 경황을 아시는 분 추가바람.그리고 자세히 보면 Series가 아니라 Serise라고 써있다(…) 세리세
  9. 여기서도 series가 아니라 serise라고 써있다. 해태 직원은 영어를 잘 모르나보다. 조상님이 반미운동 하셨나?
  10. 한국시리즈를 기준으로 잡았을 때의 이야기다. 패넌트레이스만으로 제한하면(해태 시절을 포함하여) 2위 시즌이 몇 번 있다.
  11. 2002년에는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아쉽게 패했고 이듬해에는 SK 와이번스에 완패로 끔살당했다. 2002년은 광탈이 아니다.
  12. 이 소문의 가장 큰 배경은 해태 타이거즈의 말년과도 연계된다. IMF 한파 당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았던 해태 타이거즈는 영광스러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하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는데 후신 팀이 '굶어 죽는다'는 뜻의 구단명을 쓸 경우 부잣집으로 팀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전신 팀의 가난 DNA가 전수됐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는 '해태와의 단절'을 추진했던 초창기 기아 프런트의 업무 마인드와도 맥이 통한다.
  13.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 통천군.
  14. 다만 이건 공식적인 발표이고, 실제로는 금호그룹이 프로 스포츠 자체에 관심이 덜한 점이 더 크다. 이후에도 금호그룹이 프로 스포츠에 직접 관여한 건 여자프로농구의 금호생명 팰컨스를 운영한게 전부이다. (이후의 구리 KDB생명 위너스)
  15. 일전에 롯데는 서울 연고 달라고 떼쓰다가 안되자 구단 수뇌부들이 판을 엎자 청와대에서 LG쪽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신격호 회장이 이를 말렸다.
  16.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의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
  17. 박태준 회장은 역시 군인 출신답게 축구를 선호했다.
  18. 이때 포항제철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업무대에 남았다.
  19. 실제로 60%에 달하는 외국펀드 주주의 제동으로 포항 스틸러스에 점점 지원금이 줄어들고 행정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더블을 달성한 황선대원군이 놀라울 따름.
  20. 아시아자동차는 1965년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76년에 기아가 인수한 이후에도 줄곧 본사를 광주광역시로 적어왔다. 오히려 모기업이 된 기아자동차 본사를 서울사무소 취급할 정도였다.
  21. 기아는 광주에 공장과 출고사무소를 두고 있다. 특히 공장의 영향이 크다.
  22. 옛 현대차서비스 배구단.
  23. 실제로 LG 트윈스의 1700승 기념 행사 역시 MBC 청룡의 역사를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
  24. 농담이 아니고 저 해태의 4연속 우승은 삼성 라이온즈가 큰 지분을 담당했다. 86년87년에 모두 해태에게 셧아웃 당했던 것. 뿐만 아니라 빙그레 이글스도 마찬가지로 1988, 1989년에 해태에게 연속으로 패했다. 4연속 우승 이후에도 삼성은 93년에 다시 한번 패하여 준우승, 빙그레도 91년에 패하여 준우승, 알고 보면 해태 왕조 건설은 이 두 팀의 희생이 컸다고 볼 수 있다.
  25. 7차전까지 가더라도 꼭 마지막에 이겼다. 2009년 한국시리즈 참조.
  26. 2010년까지 뛴 뒤 은퇴했다. 다만 소속은 2011년까지.
  27. 참고로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만큼 광주 야구팬들의 기아에 대한 기대감이 확실히 드러났던 경기였다.
  28.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그야말로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
  29.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5-0으로 끌려다니며 현대의 투수진에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2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현대를 잠시 제친 것이었고, 그 뒤 연승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1위를 내준 제일 큰 원인이다.
  30. 당시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융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 참고
  31.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캐발린것 때문에 뜬금없이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고 방동민을 줄창 올려서 불바다를 만든 것.(…) 당시 KIA팬들은 진필중 만큼이나 방동민이 올라오면 뒷목을 잡아야했다. 거기다 김지영폭행한 사건때문에 대외 이미지도 안좋았던 상황이였다.
  32. 시즌 초에 유남호 감독의 구상은 리오스-김진우-존슨-강철민-최상덕 순의 선발진이었으나, 김진우가 스프링캠프에서 지나치게 체중감량에만 신경을 쓴탓에 훈련량 부족으로 1군에 오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자 유남호 감독은 리오스-존슨-강철민-최상덕의 4선발 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다가 선발진이 와르르 무너진 것. 5선발로 이동현을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펜 난조로 이강철-조규제 듀오는 노쇠화와 부상으로 일찌감치 물러나고 신용운은 한남자의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클로져를 못하게 돼버리는 총체적 난국이 도래했다. 상황이 이리되자 유남호 감독은 신인 투수 2명을 필승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윤석민이었다.
  33. 당시 리오스가 KIA에서의 마지막 선발 등판 후 포수 김상훈과 포옹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34. 사실상 양 팀 전부 폐품 처리 트레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트레이드였다. 마해영과 최상덕은 2006년 시즌 후 전력 외가 되었으며, 그 때 낑겨간 유망주 서동욱은 백업으로 활동하다 2013년 최경철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16년 11년만에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KIA로 넘어온 장문석은 2006년 시즌 초반 마무리를 맡았으나 똥줄 세이브를 계속 보여주며 중반 이후 윤석민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방황하던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주며 김진우가 팀을 이탈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 장문석과 함께 KIA로 넘어온 한규식, 손상정 역시 별 활약 없이 조용히 팀을 떠났다.
  35. 극단적인 상하위타선이 분리된 공격을 하였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이재주가 버틴 상위타선은 2006년 시즌의 미친 투고타저를 감안할 때 리그 최상급 상위타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5번을 맡아주거나 이재주를 밀어내고 4번을 차지했어야 할 용병이 전부 망했고, 이종범은 커리어 멸망의 신호탄을 쏘았으며, 그나마 손지환이현곤은 포지션 및 타순 대비 감내할 만한 수준의 성적을 냈다.
  36. 2006년 시즌 기아의 젊은 투수진이 커리어가 폭발한 결과로, 그레이싱어와 장문석을 제외하면 30살이 넘는 투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아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대들보들은 바로 다음 해에 감독의 혹사 및 무분별한 기용이 겹쳐 윤석민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가 박살이 난다.
  37. 한기주의 10억 보크 사건이 바로 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
  38. 여담으로, 홈 복귀전이 522 대첩으로 기억되고 있다. 9:10으로 KIA 승리.
  39. 당시 홍세완은 부상병동을 들락거렸고 김종국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지환이나 이현곤 등이 키스톤 알바를 뛰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유격수 용병이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역시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40. 양현종과 안치홍 둘 다 2차 1지명. 양현종은 2005년, 안치홍은 2007년에 최하위를 기록한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41. 애초에 기대도 안했는데 후반기 5위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팀을 이끈 것은 대단한 것이다.
  42. 정우람박석민은 워낙 거액이어서 이부분은 팬들이 이해를 많이 하고있다. 그런데 이번 FA시장에서 구단이 가만히 있었던건 아니다. 손승락을 잡아주라는 김기태 감독의 요청으로 손승락에게 60억배팅을 하였지만 그이상을 원하는 손승락이 거절하여 구단에서 그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건 다른 FA선수들인 윤길현유한준조차 안 잡았다.
  43. 다만 2016년 밝혀지길 FA 투자 대신 선수 육성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중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부담스러워 할정도로 투자되고 있다고.
  44.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
  45.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
  46.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
  47.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
  48.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49.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
  50.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
  51.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
  52.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이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53. 드림리그 4위/4팀
  54. 드림리그 4위/4팀
  55. 중도사퇴 후 조창수 코치 감독대행.
  56. 무려 18년동안이나 했다. 그중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
  57. 2000년 시즌 도중 사퇴로 잔여 경기는 김성한 감독대행.
  58. 중도사퇴 후 유남호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
  59. 중도사퇴 후 서정환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
  60. 김응용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 해태출신 감독. 2007년 시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KIA 감독으로의 데뷔전은 2007년 시즌에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61. 1차지명이 부활하면서 지역연고 고교 5개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시기 타이거즈의 뿌리와도 같은 군산상고가 빠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KIA에서 선정한 고등학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프런트 측에서는 어떻게든 군산상고의 지명권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군산상고는 NC 다이노스가 가져갔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차지명 권한 행사와 제2구장 홈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KIA는 신생 야구단이 있는 전북 정읍의 인상고를 가져갔다.
  62. 해태의 임시주장직을 맡았다가 결국 주장이 되어서 해태의 마지막 주장직을 맡았고, 2001년 8월 1일부터 기아 타이거즈로 팀이 인수 된 후에도 주장을 맡다가 2001년 시즌 후 은퇴. 은퇴 이후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생략
  63.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해 시즌 도중 주장 교체.
  64. 조범현 감독 지시로 시즌 도중 주장 교체.
  65. 최희섭에게 주장을 시켰으나 엄하게 군기잡는 스타일이라 후배들의 반발이 있어서 시즌 도중 주장이 교체되었다.
  66. 타이거즈 역대 주장 중 최초로 이적생 출신 주장이다.
  67.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구단에서 공식으로 임명한 응원단장. 원래는 해태제과 직원이었고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롯데의 원년 개막전에서 활동한게 시작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68. 프로야구 역사 상 최장기간 응원단장을 했다. 13년.
  69. 당시 팬들에게는 붐붐 아저씨 내지는 붐붐 단장으로 불렸다. 응원단장으로 있을 당시 원래 생업은 식당 운영. 광주지방법원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해태 타이거즈의 최후를 지킨 응원단장으로 2000년대 초 해태 살리기 운동에도 나선 바 있다.
  70. 지금이야 약 10년간 롯데 자이언츠 응원단장으로 일하다보니 롯데 이미지가 아예 고정된 사람이지만 기아에서도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이종범장성호, 홍세완 등 2000년대 초반부터 기아에서 뛰던 선수들의 응원가는 다 이 사람이 만들었다. 그야말로 응원가 제조 측면에서는 신계에 도달할 수준. 기아 응원단장직을 내려놓고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롯데 응원단장으로 옮겼다.
  71. 현재 기아타이거즈의 응원 체계를 구축한 사람. 조지훈 단장에 비견할 만큼 응원가도 잘 만드는 편. 그 덕에 10년간 한 팀에서 장수 응원단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다만 응원단장이라는 직업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고, 결국 추후 은퇴 후 계열사 정규직 취업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kt 위즈 응원단장으로 옮겼다.
  72. 2016년 잠실 야구장 폭력 사태의 책임을 물어 결국 2016년 6월 4일 응원단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73. 응원단장 대행 호돌이&치어리더(2016년 6월 5일~27일)
  74. MLB, NPB 최다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모두 소속 리그에서 가장 많은 영구결번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거기에 순혈에 골몰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조차 영구결번에는 순혈을 따지지 않는다.
  75. 2001년에 대체 용병으로 해태에 입단했으나 정작 해태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다음 시즌 두산으로 이적해서 확 터졌다.
  76. 앤서니 르루는 팀 사정상 마무리로 전환했다가 무너졌고(결국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헨리 소사는 2012년에 비해 자주 난타를 당하였다.
  77. 선발 투수용병이 등판하는 날이면 브렛필은 강제휴식이었다. 경기에 외국인선수는 2명만 출전할 수 있었다.
  78. 2000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에도 재계약을 맺었는데, 발바닥 부상을 당해 퇴출되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계약 내용 중 부상을 당해 퇴출되어도 잔금을 받지 못한다는 노예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역시 대우가 개판인 해태 아니랄까봐..
  79. 그러나 강하승은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이후 방출되었다.
  80. 당장 기아시절에 혹사에 허덕이며 재활군에 있던 신용운이 삼성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선수생활 하는것을 보면 어느정도인지 실감간다. 오죽하면 팬들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기아 나가서 천만다행이란 말을 할정도니.
  81. 앞서도 언급했고 후술하겠지만 잠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원정이 아닌 홈팀에 가까운 열기를 자랑했다.
  82. 해태 시절부터 홈구장인 무등야구장 관중 동원은 어디까지나 원정에 비해서는 좋지 못한 편이었다.
  83. 단적으로 비교해봐도 광주시 인구는 2016년 기준으로 약 147만명 정도. 게다가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수도권에 비해 광주·전남지역은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이다. 반대로 서울과 수도권 인구는 2천만명이 넘어가니 그 중에 KIA 원정팬이 많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84. 전주의 인구는 광주의 절반보다도 적은 정도이고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는 시내쪽에 있지만 전주워드컵경기장은 시의 가장 구석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
  85. 실제로 포스트시즌 횟수를 보면 클래식 라이벌이라는 삼성보다 빙그레/한화이글스전이 더 많다. 한국시리즈 횟수도 삼성전과 같은 3번이고..
  86. 당시 에스케이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당시 기아감독 조범현이 충암고 재학당시 감독이었다.
  87.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대표적으로 손혁이 트레이드 이후 입단을 거부하다가 임의탈퇴로 은퇴했다.
  88. 물론 팀이 이 지역을 연고지로 삼고 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89. 군산상고와 전주고는 NC 다이노스의 지역연고학교로 편입되었다.
  90. 그나마 김기태도 광주 출신이라 사실상 비연고 감독은 조범현이 유일하다
  91. 다만 전북의 경우 전술한 것처럼 경기도 열리지 않고 그룹 계열사가 스폰하는 축구팀이 리그를 탈탈 털고 있는 형편이라 이지역 지자체장들은 전주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92. 현장의 요청 때문에 만든게 아니라 그룹 고위층의 지시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93. 부산 출신임에도 본인의 히트곡 남행열차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국민 응원가로 등극하자 자신도 그 덕에 타이거즈 팬이 되었다고 한다.
  94. 과거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 인증한 적이 있다. 김유식 문서 참고.
  95. 해당 문서의 인물 맞다.
  96. 사회인 야구도 할 만큼 야구를 좋아한다고 전해진다.
  97. 정확히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고. 타이거즈의 연고지나 변희재의 고향이나 현재 성향으로 볼 때는 믿기지는 않지만... 다만 최근의 라이온즈처럼 과거 80~90년대 해태는 잘 이기고 우승 많이해서 생긴 팬덤까지 더해져 전국구 인기를 자랑하긴 했다
  98. 바로 그 로페즈 맞다. 로페즈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로페즈는 자기 집 대문에도 타이거즈 로고를 붙여놓고 있으며 헥터 노에시가 기아에 온다고 하자 직접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그 외에도 직접 스카우터들이 도미니카로 가면 직접 2-3시간 운전해서 에스코트한다.
  99. 스스로 기아 타이거즈 팬이라고 팬미팅 자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100.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KIA 타이거즈 김선빈과 화순초-화순고1년 후배 사이로 둘이 어렸을 때 같이 배드민턴과 야구를 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