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1 삼국시대의 인물

迷當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강족의 인물.

240년에 강유가 농서 땅으로 나오자 곽회가 강중까지 쫓아가서 격파했는데, 미당도 곽회에게 격파되었고 그 후에 곽회는 저족의 3천 부락을 순찰하고 위로하면서 이들을 관중으로 옮겼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미당대왕이라는 이름으로 강족의 왕이 되어 등장해서 강유와 손을 잡았는데, 미당은 진태의 거짓 항복에 속아 그에게서 곽회 군중의 허실을 안다면서 영채를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당은 아하소과에게 5만의 군사를 줘서 위군을 공격하게 했는데, 결국 진태의 계략에 속은 아하소과는 패하고 자결했다.

미당대왕은 곽회와 진태의 군사가 영채를 공격하자 붙잡혀 곽회의 설득에 따라 귀순해서 길 안내를 담당했는데, 앞장서서 철롱산으로 가서 강유에게 소식을 알린 후에 만나고자 청하게 해서 촉군이 위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도록 했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미당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대체적으로 그다지 좋지 않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9/69/15/32/48 로 좋지 못하다. 강족병이 따로 있는 시리즈가 아니라 재야상태로 돌기병을 들고 나오는데 8000~10000정도 들고나오고, 삼국지 10에서 돌기병은 돌기편제소가 있어야 생산할 수 있으며, 자체로 매우 좋은 병과이기 때문에 등용하고 버리던지 후방에 짱박아두면 된다.

삼국지 12의 경우 PK에서 이민족이 추가되면서 등장한다.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촉진영으로 뜬금없이 참전하였다. 일본어 기준으로 한자는 迷当. 촉 후반 스토리에서 강유가 연합을 결성할 강족의 대장급으로 참전하는 듯하다. 등급은 레어, 무기는 쌍모이다. 일러스트부터 이민족같이 생겼다.

2 후한의 인물

迷唐

생몰년도 미상

강족의 수령. 미오의 아들.

아버지 미오가 한나라의 계략으로 살해당하고 미오는 여러 종족들과 과거의 원한을 풀어 결혼하고 인질을 교환했으며, 대유곡, 소유곡을 점거해 한나라를 공격했고 이들의 종족 수가 많고 원한이 사무쳐서 장우는 이를 제압할 수 없었다.

88년에 1만 기병을 인솔해 요새 아래에 이르렀지만 등훈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해 소월지의 호족을 협박하려고 했지만 등훈이 이를 보호해 소월지의 호족을 협박하지 못했다. 등훈이 황중의 호족들을 위로하면서 달래고 여러 강족들에게 뇌물을 주는 등 회유했는데, 등훈이 황중의 진 지역 사람, 호인, 강인 등 4천명을 이끌고 사곡에서 기습하자 미당은 패배해 대유곡, 소유곡을 떠나 파암곡에 거주하고 무리는 흩어졌다.

89년 봄에 미당은 옛 땅에 복귀하고자 했지만 등훈이 보낸 임상에게 격파되어 1천 8백여 명이 죽거나 2천 명이 사로잡히고 말, 소, 양 등이 3만여 마리를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미당이 나머지 무리를 거느려 서쪽으로 1천여 리를 옮겼지만 미당에게 귀부했던 여러 부락의 작은 종족들이 미당을 배반했다.

93년에 한나라에서 섭상이 은혜를 베풀겠다면서 미당을 초대했는데, 미당은 이에 응했고 대유곡, 소유곡으로 돌아와 살 수 있게 되었다. 미당은 돌아온 후에 조모 비결을 보냈으며, 비결이 돌아온 후에는 미당은 봉기해 비결과 함께 온 한나라 사람 다섯 명을 여러 종족과 함께 산 채로 찢어죽였다.

피로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금성의 요새를 노략질했으며, 관우[1]가 여러 강족들을 이간시키고 재화로 유혹해 무리들을 흩어지게 한 후에 관우가 파견한 군사로부터 대유곡, 소유곡에서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

이 때 8백여 명이 포로가 되었고 보리 수만 곡을 빼앗겻으며, 한나라의 군사가 큰 배를 만들고 황하에 다리를 만들어 병사들이 건너가게 해서 미당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미당은 부락민을 인솔해 멀리 도망가 사지하곡에 의지해 살았으며, 97년에 무리 8천 명을 인솔하고 농서를 침입해서 요새 안쪽에 살던 여러 강족을 협박해 보병, 기병 3만 명을 모아 농서 지역의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대하의 현장을 죽였다.

유상, 조세 등이 3만 명을 이끌고 공격하자 미당은 두려워 노약자들을 버리고 달아나 임조의 남쪽으로 들어갔지만 추격을 받아 죽거나 포로가 된 자가 1천여 명이 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미당은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 100년에 한나라의 조정으로 들어와 조현했고 그 무리는 2천 명을 넘지 못했으며, 배고프고 궁색해 자립하지 못하게 되면서 금성에 거주했다.

화제가 대유곡, 소유곡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한나라에서 황하에 다리[2]를 놓아 군사들이 그 곳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없기에 그 땅에서는 다시 거주할 수 없고 자기 족속들을 굶주려 먼 곳[3]으로 갈 수 없다고 했으며, 한나라에서 많은 돈, 비단을 내리면서 곡식, 가축을 사들이게 해 요새를 나가도록 재촉했다.

결국 미당은 다시 봉기해 황중에 사는 여러 흉노족을 협박해 노략질을 했으며, 101년에 사지하곡으로 돌아가 병사를 거느려 요새로 향했지만 주유[4], 후패 등에게 격파되어 종족이 와해되고 6천 명이 항복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당은 약해져 사지하의 위쪽으로 넘어가 강족의 지파인 분강에 의지해 살았으며, 오래 있다가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이 한나라에 항복했고 이 때 그 호수는 수십 가구를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1. 삼국지의 관우와는 동명이인으로 후한의 화제 때 호강교위를 지낸 인물이다.
  2. 93년에 관우가 황하의 봉류대하에 다리를 놓았다.
  3. 금성에서 대소유곡까지 가는 사이에 산이 매우 많다.
  4. 삼국지의 주유와는 다른 인물로 화제 때 호강교위를 지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