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회

위서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만총전예견초곽회

郭淮
(? ~ 255)

1 개요

장합-곽회-진태-등애로 이어지는 위나라 황금 대촉전선 라인의 숙장.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는 백제(伯濟). 시호는 정후(貞侯). 태원군 양곡현 사람. 조카딸은 가충의 후처인 곽괴.

2 생애

2.1 초기 생애

곽회의 조부는 대사농을 지낸 곽전(郭全), 아버지는 안문태수를 지낸 곽온(郭縕)으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금수저를 위한 제도인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오관중장랑이 되었을 때, 곽회를 불러 문화적조에 임명하였다.

곽회는 승상병조의령사로 전임되었고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는 원정에 함께 수행한다.

2.2 한중 공방전

조조는 곽회를 하후연의 사마로 남겨뒀는데 유비군의 침공 때 곽회는 질병이 있어서 출병을 하지 못했다. 하후연이 유비군의 황충에게 사망한 후 군대 안의 인심이 불안하자 탕구장군 장합을 사령관으로 추천하여, 군대의 불안을 수습하였다.

그 다음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 오려고 했다. 각 장수들은 의논하여 유비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으니 물에 가까운 진을 만들어 유비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곽회가 반대하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적을 유인하여 반쯤 건넌 후에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드시 유비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곽회의 말대로 물에서 떨어진 곳에 진을 치자 유비는 의심스럽게 여겨 건너지 않았다. 이후 조조는 그를 칭찬했으며, 임시로 장합에게 부절을 주었고, 또 곽회를 사마로 임명하였다.

2.3 조비 휘하에서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곽내후의 작위가 내려지고, 진서장사로 전임되었다. 또 정강호군을 대행하고,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 양추를 감독하여, 산적 정강과 반란을 일으킨 노수의 오랑캐를 모두 토벌했다. 이는 관중에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백성들은 안심하였다.

같은 해,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 축하에 나섰으나, 그는 수도로 향하는 도중에 또 질병에 걸려, 걸리는 날짜를 계산하여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그가 입궐하였을 때 이미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비는 그를 옛날의 예를 들며 책망했다.

옛날 우가 도산으로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 때, 방풍은 뒤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소, 지금 하늘이 함께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는 오히려 가장 늦게 왔소. 무엇 때문이오?

곽회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변명하였다.

신은 오제는 교화를 우선으로 하여 백성들을 덕으로써 지도하였고, 하후의 정치가 쇠미해지자, 형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은 당우의 시대를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방풍의 죽음을 면하게 될 것 입니다.

이는 '나 용서 안하면 넌 악한 군주ㅋ'란 뜻으로 그의 잔머리(?)에 감탄한 조비는 그를 칭찬하고 발탁하여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임명했다.

안정의 강족 대사 벽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곽회가 토벌하여 투항하도록 했다. 매번 강족과 오랑캐가 투항할 때마다 곽회는 미리 상대방의 친족 관계 등을 조사하고 면회하여 마음을 이끌었고 사람들은 그를 신명이라고 칭했다.

2.4 제갈량의 1차 북벌

옹주자사가 된 곽회는 앞으로 주구장창 촉군을 상대하게 된다.

228년,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기산에서 나와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또 농서의 유명한 강족 당제를 포한에서 격파시킨 공으로 건위장군으로 승진했다.

2.5 제갈량의 3차 북벌

곽회전에는 곽회의 패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촉서를 살펴보면 곽회가 패배한 전투가 여럿 있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229년, 촉한의 무장의 진식이 무도와 음평을 공격해왔다. 곽회가 요격에 나섰으나, 제갈량이 직접 나서서 건위로 출진했기 때문에 패배하여 무도와 음평을 빼앗겼다.

2.6 제갈량의 4차 북벌

위연전과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제갈량의 4차 북벌 직전인 230년, 위연이 오의와 함께 강중(羌中)에 침공한다. 곽회와 비요는 요격에 나섰으나, 위연은 양계에서 곽회를, 오의는 남안에서 비요를 격파하고 돌아간다.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에 따르면 231년, 촉나라가 노성을 공격하자 조진을 대신하여 지휘관이 된 사마의의 지휘 아래에서 곽회, 대릉, 비요는 상규에서 제갈량을 요격했으나 패하였다.

이 당시 농우에는 식량이 없어서 병량 부족 상태였고 관중에서 대량 수송해 오도록 상의했다. 곽회는 위임과 은혜로 강족과 오랑캐들을 어루만지며 집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고, 공평하게 수송 노역을 할당하여 병량을 제공받아 군사들의 식량이 충분해졌다. 이 공으로 양무장군으로 전임되었다.

2.7 제갈량의 5차 북벌

234년,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침공한다. 사곡(斜谷)으로 공격해 온 제갈량은 난항에서 둔전을 시작한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의 유인책을 간파하여 제갈량이 반드시 장안 방면인 북원을 공격할테니 거기를 점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곽회의 의견을 따랐고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다다르니 곽회는 그들을 공격해 막았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한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서위를 공격할 것이라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군의 병력을 서쪽에 방비시키게 하려는 제갈량의 낚시이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곽회의 말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위군이 방비를 하고 있어서 촉군은 성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했다.

2.8 계속되는 촉군과의 밀당

명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위서에 따르면 238년 9월, 촉의 요화가 수선강후 석심(宕蕈)의 진영을 공격하자 옹주자사 곽회는 광위태수 왕윤(王贇), 남안태수 유혁(遊奕)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요화를 협공하게 했다. 곽회가 조예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왕빈, 유혁이 군사를 나누어 산의 동서를 둘러쌌고 포위하여 적의 외면을 함락시켰으니, 이제 적을 격파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의 일입니다.

위나라의 황제 조예는 군대는 분산을 피해야 한다며 별동대 중 필요 없는 자들은 돌아가 수비에 힘쓰도록 유혁에게 전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그러나 칙명이 도착하기 전에 요화는 유혁군을 물리쳤고, 왕윤은 화살에 맞아 숨졌다.

240년에 농서로 진격해 온 강유에 대항하여 강중까지 추격했다. 강유군이 물러나자 이번에도 강족 미당 등을 토벌하고, 저족 3천 부락을 회유하고 이주시키는 등의 공적을 세워 좌장군으로 승진했다.

양주의 이민족 휴도, 호양, 원벽 등이 부락 2천여 가구를 이끌고 옹주로 귀속하자 곽회는 상주하여 그들을 안정군의 고평에서 거주하는 주민이 되도록 요청했고 후에 그들을 위하여 서주도위를 설치했다. 곽회는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이전처럼 옹주를 관리했다.

2.9 낙곡대전

244년, 조상이 촉한 정벌군을 일으키자, 곽회도 선봉으로 종군하였으나 불리한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는 않았다. 돌아오자, 곽회에게 절이 주어졌다.

여기서 본진 놔두고 선봉이 퇴각해도 괜찮은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더불어 대패를 당한 조상은 물론 하다못해 사마소까지 의랑으로 강등되었던 참패임에도 불구하고 조상보다 먼저 후퇴했던 곽회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2.10 강족에게 패배하다?

244년부터 246년 사이에 장완이 올린 조서에는 '곽회 걔 우리가 강족에게 갔을 때 처발렸다(...)'라는 말이 나온다(!)

또 과거 한 부대가 강족을 침입했을 때, 위의 옹주자사 곽회가 패배하여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 장완전

이건 오로지 장완전에서만 나오는 언급으로 무슨 전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2.11 강유강족의 연합 공격

247년, 농서, 남안, 금성, 서평의 각 강족들인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서로 결탁하여 봉기하자 강유는 기회라고 여겨 이에 호응한다.

하후패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위시에 주둔했다. 곽회의 군대가 막 적도에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먼저 포한을 공격하라고 했으나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해 올 것이라 여겨서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후패와 만나기로 한다. 곽회의 예상대로 강유는 하후패가 주둔 중인 위시로 공격해 왔는데, 마침 곽회의 군대를 만나자 강유는 퇴각했다. 곽회는 모반한 강족 사람들을 토벌하여 아하와 소과를 베었는데 이때, 항복한 자가 1만여 부락이나 되었다.

248년, 아차새 등은 하과와 백토의 옛 성에 주둔하면서 황하를 거점으로 하여 위나라 군대에 항거했다. 곽회는 상류의 형세를 보고 비밀리에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백토성을 점거하고,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치무대의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었다. 곽회는 군대를 서해로 전진시켜 그들의 물자와 귀중품을 약탈하려 했는데 마침 돌아오는 치무대와 마주치게 된다. 곽회와 치무대는 용이의 북쪽에서 교전했고 격파당한 치무대는 달아난다.

한편 석두산의 서쪽에 있는 영거라는 흉악한 오랑캐가 큰 길을 끊어버려 왕의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곽회는 마침 돌아가는 길에 영거를 토벌하여 대파했다.

강유는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서 서쪽으로 도망쳐 온 치무대를 맞이하고, 음평태수 요화를 석중산에 남겨 두어 성을 쌓게 하였고, 패배한 강족들을 거두어 인질로 삼았다.

곽회가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을 공격하려 했는데 다른 장수들은 강유가 강력한 서쪽 야만족과 연합했고 요화가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 편의 군대를 두 방향으로 나누는 것은 소용없다며 반대한다. 그러자 곽회가 말했다.

지금 가서 요화를 취하고, 적이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동하면 강유는 반드시 낭패할 것이요. 그리고 강유로 하여금 명령에 따라 분주히 돌아다녀 피곤하게 하는 것이오. 군대는 멀리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호인과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나를 들어 둘을 온전하게 하는 계략이요.

곽회는 하후패 등을 파견하여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화군을 공격했다. 강유는 과연 달려 돌아와 요화를 구원하다 패주하고 말았다. 이 공으로 곽회는 도향후로 승진한다.

2.12 강유의 1차 북벌

249년, 곽회는 하후현을 대신하여 정서장군, 도독옹량제군사가 되어 대촉 방면 총사령관의 정점에 도달했다. 하후연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가 하후현을 소환하고 곽회가 정서장군에 임명되니 곽회와 이전부터 불화했던 하후패는 불안을 느끼고 촉한으로 망명한다.

같은 해, 강유가 침공하자 곽회는 옹주자사 진태의 계책을 받아들여 촉나라 아문장군 구안 등을 항복시켰다.

30년 간 관중에서 이민족과 촉군을 꾸준히 물리치고 정치를 잘한 공으로 250년에 조서가 내려와 곽회는 거기장군, 의동삼사까지 승진하고 양고후로 봉해졌다. 또한 식읍이 2780호가 되었는데 300호를 분할하여 한 아들을 정후(亭侯)로 봉했다.

2.13 왕릉의 난

곽회의 부인은 왕릉의 누이였는데 왕릉이 난을 일으켜서 사마의에게 토벌당하자 삼족이 멸족되게 되어 곽회의 부인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시어사가 그녀를 체포하러 오자 독장 및 강족과 호족의 우두머리 수천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곽회에게 부인을 놓아달라는 상주문을 올리라고 청했으나 곽회는 따르지 않았다.

곽회의 부인이 압송되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면서 그녀가 압송되는 길을 막으려 했다. 곽회의 다섯 아들이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면서 곽회에게 청원하자, 곽회는 차마 이를 볼 수가 없어서 마침내 부인을 뒤쫓아 가라고 명했다. 이에 수천 명의 기병이 추격하여 부인을 다시 모시고 돌아왔다. 곽회는 곧 사마의에게 서찰을 보냈다.

다섯 아들이 어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니, 만일 그 어미가 죽는다면 다섯 아들은 살 수 없을 것이고, 다섯 아들이 죽는다면 저 또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급히 뒤쫓아 가서 다시 데려온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오니 군주로부터 죄받음이 마땅합니다.

서찰이 도착하자 사마의는 그녀를 사면해 주었고 곽회의 부인, 즉 왕릉의 누이만은 유일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2.14 죽음

삼국지연의에서는 강유의 2차 북벌 때, 철롱산에 포위된 사마소를 구출하려다 자기가 쏜 화살강유되돌려 받아쳐 맞고 사망하지만 이는 허구이다.

255년에 곽회는 세상을 떠났고, 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하고 아들 곽통(郭嗣)이 후사를 이었다. 관구검전에 따르면 문흠은 곽회에게 서신을 보내 관구검의 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곽회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헛일이 되었다. 곽회 사후인 함희 연간에 다섯 등급 작위를 세웠는데, 곽회가 공훈이 많았으니 부양자(汾陽子)로 바꾸어 봉했다.

3 평가

한중 공방전부터 제갈량의 북벌, 강유의 북벌까지 서부전선 방어를 훌륭히 수행하고 좋은 계책을 많이 낸 장수. 특히 제갈량의 5차 북벌에서 사마의 및 이하 제장들의 논의와 홀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며 제갈량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나 이후 강유가 강인들과 호응해 침공한 것을 막아낸 것을 보면 괜찮은 통찰력을 가진 견실한 타입의 무장.

패배가 없는 무장은 아니었지만 사실 좀 패배가 많지만 촉한의 북벌을 잘 막아낸 장수로 평가된다.

강유는 곽회가 옹주자사이던 시절 강인들과 호응해 북벌할 당시 비의달랑 1만명 이내로 군사를 운용하게 하는 한계를 걸었다는 점(...)은 있었지만 곽회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 이렇게 촉의 명장들과는 혈투를 벌여가며 대촉전선을 지켜내었다 볼 수 있다.

이렇게 전략적 안목도 훌륭하고 예측력도 좋은 장수로 대촉전 및 관서 이민족 스페셜리스트였으며 후방을 추스르고 이민족들의 관리하는 등의 전투 보조적인 일에도 뛰어났던 장수다. 사마의도 중용할 뛰어난 전략적 식견으로 하여금 진태, 등애 등을 기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최적의 전술을 찾아내는 능력도 뛰어나 강유와 요화 등 촉장들의 북벌을 여러번 좌절시키기도 했다. 화려한 장수라기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장수같은 느낌.

4 미디어 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