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자화상」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귀촉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한국 이름: 서정주(徐廷柱)
일본식 이름: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静雄, たつしろ しずお)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


1 소개

한국어가 지닌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뛰어난 시인

그러나 친일에 군사정권까지 옹호한 반민족행위자, 기회주의자!!

한국문학계(특히 현대시)의 거목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호는 미당(未堂).[1]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전통 소재의 활발한 활용으로 한국 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꼽히나[2], 상술되었듯이 친일, 친 군부적 행동 때문에 기회주의적 어용문인의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이 있다.

2 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리 에서 태어났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소작농의 중간관리자)이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았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의 "애비는 종이었다." 부분은 이 점을 의식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3] 서정주는 부안군 줄포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생시절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되어 빈민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풀려나온다. 복원한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에 들렀다가 뒤로 돌아서 가보면 (차로 10분 거리) 딱 좋은 곳. 아무래도 선운사를 찾는 김에 찾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한 때는 이 곳에서 시 낭송대회도 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하지 않는 듯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달리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있어 그의 발자취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좋은 곳. 그곳에서 다시 더 가보면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나온다 . 어째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김성수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후손들이 이에 불복하여 2번이나 소송을 내었으나, 두번 모두 친일행적이 법원에서 확정된 케이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라는 시로 등단, 1941년 〈화사〉, 〈자화상〉, 〈문둥이〉 등의 시가 포함된 〈화사집〉을 출간했다.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망했어요 참고로 오장환과 이용악의 시는 월북을 이유로 금서취급을 받으며 모두에게 잊혀져갔다. 서정주와 절친한 사이였던 오장환은 일제의 압력이 심해지자 변절하는 대신 붓을 꺾었고 친일한 서정주와는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후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총 10편. 해서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 소환되었다. 이 때 적어도 일제 치하에 몇 백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우리 민족 절대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회고한다는 변명하는 발언을 남겼다.

이후 〈귀촉도〉, 〈국화 옆에서〉, 〈춘향의 말〉(연작), 〈질마재 신화〉 등을 발표한다.

이까지는 그래도 '나약한 지식인' 수준으로 볼 만하다. 변명하면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 논란은 당시 예술가 상당수도 하였고, 이에 대한 옹호 여론도 있긴 하기 때문에... 문제는 권력층에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후기와는 달리 이 시기는 문학인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참여 시인'으로 활동했던 것과 대조된다.

이승만 정권 초에는 이승만을 기리는 이승만 박사 전기를 완성하였으나 이것을 본 이승만이 자신의 이름에 호 "우남"을 붙이지 않았다 하여 모두 파쇄(...)된 적이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4] 본격적으로 친군부적 색채를 확연히 드러냈는데 1986년에는 전두환의 56세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전두환 또한 서정주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7년 4.13 호헌조치때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건 카더라도 아니고 4.13 호언조치에 대한 각계인사들의 반응이라고 해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서정주는 당연히 학생운동을 비난하였고, 이는 운동권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2000년 10월에 아내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졌으며 곡기를 거부한 체 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다가 11월에 "잘 봐달라고 말씀하더라고 해."라는 최후의 인터뷰를 남겼으며 12월 22일부터 혼수상태에 빠졌고,그해 12월 24일에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사망. 사망 전까지 1000여 편에 달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정주/작품 목록 항목 참조.

서정주는 문학 작품을 쓸 때 현재도 따라갈 이가 없는 수준의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이 되는 시기 이외의 작품에서는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소재로 전통적 요소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처녀 시집인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은 몸부림치는 생명력을 시적인 표현으로 적절하게 소화해내었다는 평을 듣는다. 아래는 서정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맥하>의 전문이다. 이문열의 봉인 소설 "사로잡힌 악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가감만 하면 서정주의 시라는게 확연히 드러나는 능력이 있다.

黃土 담 넘어 돌개울이 타

罪 있을듯 보리 누른 더위 -
날카론 왜낫(鎌) 시렁우에 거러노코
오매는 몰래 어듸로 갔나

바윗속 山되야지 식 식 어리며
피 흘리고 간 두럭길 두럭길에
붉은옷 닙은 문둥이가 우러

땅에 누어서 배암같은 게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ㄹ 업드리었다.

이렇듯 순수하게 문학적 업적만보면 한국 현대시의 거목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지만 문학 외의 전적이 너무 화려해서 천하에 둘도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의 사망 이후로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많이 빠졌다고 하며, 서울 관악구에 있던 서정주의 생가는 폐가로 방치되었다가 2011년 복원되어 개방했다.

그러나 아직 한국 문단에서는 서정주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여론은 알게 모르게 묻힌다. 현재 한국 문단의 기성 세대들은 대개 서정주의 제자들이며, 이들은 스승을 모욕하는 행위 내지 서정주가 이룩한 문학적인 성취를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묵살한다.[5]

그를 비판할 때 쓰이는 '말당(末堂)'이라는 멸칭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부부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 전두환(혹은 당시 영부인 이순자)이 서정주를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 서정주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의 호인 '미당(未堂)'을 잘못 읽어 말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6] 또 그의 시 자화상(1937)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 는 구절을 가지고 '종놈의 자식' 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다. 위에도 나오듯이 서정주 집안은 김성수 집안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서정주의 아버지가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름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으로, 소작농들 앞에서는 지주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렸다. 동백꽃의 점순이도 바로 이 마름 집안 딸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건 그의 친일 행각을 감안하더라도 좀 인신공격성 발언이긴 하지만 그의 경력이 경력인지라 '말당'과 함께 서정주를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자주 언급된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의 친일행각과 친군부행위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이들이 많았으며 서정주의 제자인 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각과 친군부 행위에 대해 '수십 년을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했다. 사실 조정래 시인은 서정주 생전 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1985년 당시 조정래는 한국문학이라는 문학지를 맡고 있었는데, 광복 40주년을 맞아 8월호에 '친일문인'을 다루는 특집기사를 기획하고, 친일전력이 있는 문인 가운데 생존자들을 찾아 그들의 행적을 스스로 지면을 빌려 이야기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조정래에게 서정주는 은사인 동시에 아내(이자 동창) 김초혜 시인과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준 사람이었으니 말하기 굉장히 어려웠던 게 당연하다. 본인은 아내와 길게 상담하고 고민고민한 끝에 찾아갔다고. 서정주는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하는 조정래에게 "니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는데, 조정래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쫓아내지는 않고 조정래 앞에서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장광설을 두 시간 동안 펼쳤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질문받자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라고 말하고 끝내 버렸다. 이걸 집에서 다시 화면으로 보던 조정래는 차라리 이때 한 마디라도 하기를 바랐다고...

조지훈의 추천으로 등단한 고은 시인도 서정주의 죽음 이후 그의 행보를 강력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사실 그는 이전까지는 친밀한 관계였으나 고은이 1970년대 이후 민주적, 반독재적 성향을 띠면서 서정주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1983년에 어느 문인회에서 서정주가 고은에게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하며 아쉬워하자 고은은 "선생님 세상 떠나가시면 오겠습니다"하며 패기있게 매몰차게 외면한 일도 있다. 그리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서정주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와 만나지 않았다. 사족이지만 2015년 6월 수능 모의평가 국어 B형에서 고은의 <성묘>와 서정주의 시를 같이 엮어 냈다고 한다.

문인 조지훈 역시 그에게 큰 굴욕감을 준 사람이다. 매해 정월, 후배 문인들이 항상 사실상 대선배인 서정주를 제쳐두고 제일 먼저 조지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고. 이유는 조지훈은 학생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시위대를 학생과 함께 이끈 지조있는 문인이었기 때문. 역시 동갑내기 문인 황순원도 그에게 크나큰 굴욕감을 주었다. 이쪽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어떠한 비판이나 칭송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켜왔었고 이에 문인들은 "역시 선생님다우십니다."라고 조지훈마저 제치고 인사드리러 갔다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런 후배 문인들의 행동에 서정주는 알게 모르게 불쾌하게 여겼다. 신경림 시인의 회고(수필집인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겨울, 서정주의 동서였던 故 김관식 시인이 신경림 시인과 함께 조지훈 시인의 집에 새해 문안 드리고 술자리도 가진 뒤, 그 다음에 서정주 시인에게 세배 드리러 갔는데, 이 때 김관식은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그만 신발을 벗고 택시를 타 버려서 눈길을 양말 바람으로 걸어와야 했다. 서정주는 그 모습을 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훈계하였다. 그러자 김관식은 술김에 화가 난 나머지, "이전의 행적을 볼 때 형님을 먼저 뵙는 것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조지훈 선생 댁에 먼저 세배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에 서정주는 몹시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 자리에서 막걸리 주전자가 김관식의 머리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 함께 찾아온 신경림 시인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런 미친놈과 어울리면 자네도 미친놈이 될테니 함께 다니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서정주의 아우인 우하 서정태가 김관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참고로 김관식은 서정주에게 '사위 같은 동서'였다. 서정주의 처제는 언니(서정주의 아내)와 나이차이가 많이 났고, 서정주는 처제를 딸처럼 키웠다고 한다. 김관식은 스무살에 낸 첫 시집에서 조지훈의 추천사를 받았는데, 결혼 전에 낸 두 번째 시집에선 서정주의 추천사를 받았으니, 어찌 보면 서정주 입장에선 서운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김관식을 매우 아껴서, 그가 몸에 아플 때에는 닭고기와 과일을 마련하고는 몸소 병문안가서 몸보신을 시켜 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해양경찰가와 재능교육 사가(#)[7]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3 논란

3.1 친일행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기회주의 친일 문학가.

1942년 7월 13일~1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 1일~10일자에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마쓰이 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 10월 호에 일문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에 '스무살된 벗에게'라는 수필, 11월호에 '최체부의 군속지망'이라는 소설, 12월호에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

1992년 신동아 4월호에 '일정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위엄찬 제목의 글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써온 시나 그 밖의 글 중에서 일정 말기에 쓴 몇개의 글이 '친일파'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1980년대의 한동안 우리 문단의 일각에서 새삼스럽게 문젯거리가 되더니 요즘에 와서 또 웬일인지 다시 이 나라의 신문들이 이걸 내걸고 공격을 하고 있다"라며 분개하였다. 또 친일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일문학을 한 것처럼 호도하였다. 거기다 자신이 쓴 친일시를 정연구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 알아서 찾으라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까지 하였다. 그후 다시 일본의 지배가 몇백년은 더 갈것 같아 체념하며 친일시를 썼다며 상황론으로 자신의 친일을 변명한다. 1992년 <시와 시학> 봄호에서 평론가 김재홍씨와 대담을 통해 "쓰라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라며 끝끝내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다만 최소한 당시의 정보에 어두웠던 사람들 가운데서는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일리있는 주장으로 일제 말기에 이르면 국내 독립운동의 기반이 사실상 고사하고 지배 체제가 더욱 탄탄해지면서, 독립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널리 퍼졌고 [8]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제 독립은 어려우니 일본의 지배는 인정하되 대신 그 테두리 안에서 조선민족의 권익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노선으로 변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정주는 현실에 '어쩔수 없이' 순응한 지식인이 아니라 20대 초보시인때 부터 자발적으로 친일에 나선 단순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일 뿐이고, 아래 시를 보면 알겠지만 평범한(?) 기회주의적인 친일파와는 급이 다른 인간이였다.

마쓰이 오장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9]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카미카제와 그 피해자를 대놓고 미화하고 있다. 이건 친일을 넘어서 국가에 의해 벌어진 반인권 범죄를 옹호하고 있다. 게다가 인재웅(印在雄) 씨, 시의 마쓰이 오장은 실존인물이다. 서정주뿐만 아니라 노천명도 마쓰이 오장 친일시를 내기도 했다. [10]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레이테 만 해전카미카제가 첫 등장한 전투이기도 하니... 진정한 고인드립.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렇게 일제를 찬양하고도 얻은 것이 없다는 점인데 옹호론에선 이점을 들어 친일파라고 하는 건 지나치다고 하나 관점을 달리하면 일제도 외면할 정도로 정도가 지나친 아부를 떤 기회주의자란 소리밖에 안 된다.

근데 여담으로 홍성담이 이걸 조롱하고자 여기서 영감을 얻어 <야스쿠니와 마쓰이 히데오 오장>이라는 야스쿠니와 일본 우경화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다.

3.2 친독재행위

형님, 굳이 이렇게 쓸 필요가 있나요?

- 남동생 우하 서정태[11]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방 이후 이승만을 기리는 이승만 전기를 썼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베트남 파병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아무래도 친일하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몸에 좋다는 걸 깨달았는지 기회포착 능력이 상승했던 것 같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위의 '마쓰이 오장 송가'를 읽고 이 시 중간의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을 이기게 하시고' 부분을 읽으면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이러한 친전두환 행위에 대한 반론도 놀랍게도 존재하는데, 친일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행위라는 주장. 이들은 위에 서술된 전두환 축하시가 '전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고 표현력도 낮다'(...) 라며 서정주를 옹호하나, 애초에 전두환의 호(일해)를 지어준게 서정주[12] 이니... 망했어요 [13]

3.2.1 옹호

서정주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와 친일행위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는 "서정주는 시인이었다. 즉, 서정주는 시로써 평가를 받아야 하지 친일행위로써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라고 한다.

또한 서정주를 옹호하는 사람중, 평론가 이남호의 말에 따르면 "미당의 삶에서 시인 고은과 달리 정치적 삶의 비중은 작았다. 미당의 시 너편을 인용하면서 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태생과 분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서정주의 친일 활동이 현실보다 지나치게 부각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실제로 1943년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그의 처녀시집 <화사집>에 <바다>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시를 남겨왔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고등학교 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까지 갔다왔던 적이 있는 등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나 그가 조선일보 폐간사에 싣기 위해 썼었던 작품 <행진곡>은 후에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를 받아 1944년 그가 친일파로 전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때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다.[14] 아래는 <행진곡>의 전문.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실재로 다른 친일 문학가들에 비해 오히려 적은 기간동안 친일 활동을 해온데다 친일로 인한 이렇다할 혜택도 받지 못했던 미당의 친일이 부각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첫째, 그가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발표했던 <항공일에>가 일본 문학인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여린 숨을 폭폭 내쉬며

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가
일곱 살 서투른 고향 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

마늘이랑 파랑 고추를 먹고
기름때 절은 하이얀 옷을 입은
뜨겁디뜨거운 가슴을 안은 이들이
산비둘기 울던 노오란 길을
가고 가던 진초록
바로 그 하늘이구나

아아 애달퍼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꽤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
여기 있는 건 내 덧없는 몸짓과 말뿐
메아리와 파도소리와

해맑은 좁은 마당엔
꽃축제 올리는
쇠가죽 북소리만 은은해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람 ! - 서정주 <항공일에> 번역

실제로 일본의 노리타케 미츠오는 서정주의 이 작품을 보고 40년대에 발표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라 칭하며 시인 미당이 일본 문학가들에게는 없는 묘한 유통력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한다. 이것을 고려했을 때, 서정주의 친일파로서의 명성은 일본 문학가들의 지지로 인한 것임을 추측해 낼 수 있다.

둘째, 그가 친군부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서정주 시인을 반대하는 인물들 중에서 그의 친군부 행적을 친일 행적과 엮어 그를 비난하는 과정으로 인해 더욱 친일 행적이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찍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반민특위에서.

특히 그가 했던 말인 '일제 치하가 이백년을 갈 줄 알았다.'라는 말은 그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부끄러운 일이라 언급하며 자신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못 파악했고 어리석었다고 고백하며 했던 말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서정주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기는 커녕 당연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짓이라는 이야기이다.[15]

3.2.2 비판

문학자는 문학의 의미와 그 영향력을 잘 알고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의도로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것은 그 행동의 의미 또한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에 빼도박도 못한 친일(친일파라는 단어보다는 민족반역자라는 말을 써야한다)행적임에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득을 취했느냐는 별개의 문제.

만약 서정주가 시인이라서 오직 시로만 평가받아야 한다면, 아돌프 아이히만이 학살에 가담한 것도 뛰어난 공무원으로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완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행한 악행에 면죄부가 주어져야 한다.

서정주의 친일행위를 두고 일각에서는 춘원 이광수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평가도 내린다. 이광수나 김성수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 전쟁을 찬양, 미화하고 참전을 독려한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범죄에 동조한 것으로서, 도쿄전범재판 이후의 현 동북아 체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죄로 지적된다. 어찌보면 이광수보다 더 악질이라 할소도 있겠다. 이광수나 최린같은 일반(?) 친일 문인들은 일본의 폭력이나 사기를 도와준 공범이지만 서정주는 일제가 직접 저지른 초대형 연쇄살인를 도운 공범이기 때문이다. 다른 친일 문인들은 일제의 전쟁에만 동조했지 그 속의 범죄행위들까지 지지하는 행동은 하지않았지만 서정주 노천명 등은 일제의 범죄행위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운 전형적인 전범의 행보를 보여줬다. 권력만 없다 뿐이지 전형적으로 지구 반대편의 괴벨스가 보여준 행보와 일치한다

여기에 더해 서정주는 지독한 권력지향적 인물이였는데 이것을 계속해서 합리화하려고 했다는 문제가 있다. 친일을 거부하고 사라져갔던 동료 문인들을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닐텐데, 해방 직후는 고사하고 그 이후에도 군부세력을 옹호하며 권력지향적인 행태를 보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은 커녕 언급조차 불쾌해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뻔뻔스럽게 서정주는 자신이 배신했던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소재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서정주의 문학은 기만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실제로 언론 등에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소탈한 문학인(혹은 노인) 이미지를 자주 차용했다.[16][17]

단 서정주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감안해야 할 점은 있다. 서정주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으며 불완전한 존재이자 양면적인 특성을 가진 인간은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살면서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도 가질 수밖에 없으니... 어두운 면으로만 평가한다면 영국을 구한 구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주문한 전함들을 몽땅 강탈한 날강도놈이자 무대뽀 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를 펼쳐 애꿎은 영연방 젊은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냉혈한이자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할려 했던 살인마에 지독한 인종차별사상까지 갖고 있었으니 인간 쓰레기라는 단면적인 결과밖에 안 나오며,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 프랑스장 자크 루소는 육아의 교육성을 강조하면서 막상 자기 자신의 다섯 자식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 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으며, 자본론의 저자 마르크스는 절친 앵겔스의 후원으로 흥청망청 쓰는 것도 모잘라 앵겔스의 아내가 죽었는데도 조의는 커녕 돈 내놓으라는 편지를 보낸 흡혈귀였으며 질소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만들어 맬서스 트랩을 끊어버린 대단한 업적을 남긴 프리츠 하버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가스를 개발하여 스스로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을 남겨 버렸다. 즉 이런식으로 어두운 면만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위인들도 전부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내놓는 문제가 발생하며, 따라서 서정주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정리하자면 그 인물의 모순적인 태도는 잠시 접어두고 업적을 인정하는 말이다.[18]

물론 서정주의 업적을 인정한다고 해서 서정주의 과오를 잊자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서정주에 대한 비판은 서정주 자신이 초래하였다. 한국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문학인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어떨지...... [19] 시대의 압박에 못 견뎌 변절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수도 있지만 자신이 자청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철처한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왔으니 빛도 강하지만 그림자가 너무나도 깊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자로서의 업적은 인정해야 하지만 이런 면은 냉정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3.3 관련 평론

하지만 학연으로 묶인많은 시인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상당수 문인들이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서정주의 매국행위와 친독재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나마 비판하는 문학가들도 대부분은 그의 범죄행위에 관해서 비판하지 않고 김우창처럼 서정주의 후기작품이 가지는 퇴행성을 비판할 뿐이다. 더한 경우 위에서 범죄행위를 묻어두자는 측부터 최악의 경우는 그가 일제에 구속된 점을 들어 저항시인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일단 서정주를 숭배하는 측도, 서정주의 후기작품을 비판하는 측도, 서정주를 싫어하는 측도 서정주의 시가 보여준 표현능력만큼은 높이 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를 쓴 사람이 한없이 저열했고 그 좋은 능력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게 문제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오명도 남겼다는 점에서 김활란과의 유사성도 찾을 수 있다.

4 수상 경력

  1. 나중에 궁발(窮髮)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대머리(…)라는 뜻. 하지만 이마가 넓어서 그렇지 같은 나이대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머리숱이 꽤 있는 편이다.
  2. 친일문학가의 글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가급적 싣지 않는데 서정주의 글은 너무 잘 썼고 중요성이 높다보니 여전히 간간히 볼 수 있고 모의고사에도 출제된다.
  3. 친일 여부와 별개로 김성수는 소작인들에게도 예의를 차리고 깍듯하게 대해 동네 사람들에게는 민심을 많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마름의 위치였던 서정주의 아버지가 진짜 종 취급을 받았을 확률은 낮으며, 실제 선운리 사람들에는 서정주쪽이 인간성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나쁘다. 선운리 미당문학관에 몇 번 방문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워낙 악평이 많아 동네 주민들이 표지판들을 낫으로 찍는 바람에(...) 교체를 한 적이 있다 한다.
  4. 재미있는건 3-4공 당시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했던 인사들이 5공 정권에는 친군부를 넘어서 아부에 가까운 병크를 벌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만 해도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절대로 쓴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생을 마쳤고, 서정주 역시 후술하게 될 여러 행각을 벌인다. 뭐니뭐니해도 혁신계 혐의로 10년 징역을 선고 받았고 그해 5월등의 소설이나 여러 에세이등을 통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혐오를 보였던 이병주는 대통령들의 초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전두환을 상당히 찬양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아마 그 분 머리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멀어 그런 것 아닐까
  5. 그리고 대중이나 젊은 학생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 평가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차이가 꽤 크다. 서정주와 대비시켜 높게 평가받는 윤동주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좋은면이 많아서 그렇지 문학적 성취에선 서정주나 백석보다 분명히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다.
  6.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로 '토관과 신토'가 있다. 이 외에도 김수정의 만화 'O달자의 봄'에서도 이 '말당' 얘기가 나오지만, 이건 그냥 호의 '미'(未)와 '말'(末)의 모양을 이용한 말장난 개그. 하지만 어떻게 보면 고도의 풍자.
  7. 참고 자료.
  8.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일본이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은 2차대전 이전에 이미 잡지에서 토론이 벌어진 주제였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이 연결된다는 확신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처음 공식적으로 제시되었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외부에 줄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만 문인들의 상당수는 지식인이라는 일반적 생각과 달리 정보에 어두웠던 것은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인 같은 블랙코메디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9. 현대 대한민국 국군으로 치면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 오장은 구일본군 육군에서만 쓰이던 계급임을 감안하면 밑에 언급될 육항대 소속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일본군 해군에서는 삼등병조가 오장과 비슷한 위치였다.
  10. 저 시의 모티브가 된 인재웅 씨가 사실 전후에도 살아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 해방 후 당시 신문기사와 대조한 것.
  11. 이 양반은 전두환이 축하시를 부탁하자 단호하게 "저는 시를 쓰는 시인이지, 서커스 광대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다. 그 때문에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 까지 무려 27년이 걸렸다. 전형적인 갈모형제.
  12. 다만 이 '일해'라는 호는 원래 호 쓰는 예법에서 크게 어긋난 사례라 많이 까인다. 원래 호는 자기 자신을 태양이니 어쩌니 하는 거창한 것에 빗대는 게 아니다. 퇴계가 괜히 퇴계가 아니고 율곡이 괜히 율곡이 아니다. 겸손하고 소박하게 짓기 위해 고향의 지명을 쓴 것이다. 서정주의 아부가 과했던 듯
  13. 이걸 가장 정확하게 반박할 수 있는 게 바로 그의 동갑내기 친구였던 황순원. 정말 농담이 아니고 "생신 축하드립니다. 대통령 각하."라고만 적었다.
  14.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어폐가 있는 것이 물론 기간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얼마나 열정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는가가 중요한데 서정주는 이 기준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골수 친일파이다. 당장 위의 형식적인 미는 뛰어난, 그러나 아주 섬뜩하기 짝이 없는 카미카제를 찬양하는 시를 보자.어지간한 일본인도 이렇게는 못 쓸 것이다 만일 일제시대가 좀 더 길었다면 서정주는 이광수를 능가하고 이완용과 맞먹는 아주 골수 친일파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15.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려면 서정주 자신이 말로만 아닌 행적으로서 보였어야 했는데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신군부에게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으니 후세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면피성 발언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다.
  16. 심지어 친구였던 황순원은 이것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전두환과 척을 졌으니..... 더더욱 차이가 나는 수밖에.
  17. 냉정하게 말하면 이효석하고도 비교가 심하다. 이쪽은 아예 부인과 차남이 생계곤란으로 세상을 떴다. 이런 연유로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챙기고자 친일파가 되었다. 심지어 이분은 생전에 자신의 행각을 사죄했다.
  18. 또한 이렇게 어두운 면만 바라보고 비판하는 형식이 가지는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이런 논점을 뒤집으면 악인들도 "성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내놓는다는 데에 있다... 악인들이라고 해서 인간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니고 훈훈한 면 역시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하인리히 히믈러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유태인 학살을 주도했으나 막상 자기자신의 가족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으며 특히 딸사랑에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19.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이런 위선적인 모습을 철저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