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일어난 사건. 민씨척족의 수장인 민승호가 암살된 사건이다. 한국역사상 드문 폭탄테러로 인한 암살사건이다.
1 사건의 개요
민승호는 본래 민치구의 아들이며 그의 누이는 여흥부대부인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민승호는 대원군에게는 처남이 되는 셈. 이후 당시 이미 고인이 된 민치록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민치록의 딸이 바로 명성황후이다. 그런데 이 양자 입적은 사실 명성황후 때문이었다. 비록 이미 정치적인 이유로 고종의 왕비로 명성황후가 내정되어 있기는 했으나 형식상의 간택에는 나가야 했는데 아버지 민치록을 여의어 보호자가 될 남자 혈육이 없었던 것. 그래서 그녀의 보호자 명목으로 뒤늦게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입적을 통해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오빠이자 고종의 처남, 순종의 외숙부가 되었다.한순간에 당대 실권자인 외척으로 등극
그래서인지 민승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승진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여기에 명성황후가 왕비가 되면서 이조참의, 호조참판을 거쳐 판서에까지 직위가 올랐다. 고종은 대원군에 맞서서 민씨 척족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는데,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오빠라는 위치인지라 민씨 척족의 수장이 될 수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에는 사실상 정권의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민승호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불과 1달여도 지나지 않은 1874년 11월 28일(음력), 민승호의 집에 정체를 알수 없는 한 승려가 지방의 한 수령이 바치는 것을 가져왔다면서 특이하게 생긴 상자를 건넸다. 그리고 "이 상자 안에는 복이 들어있으니 바깥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꼭 안에서 열어보십시오"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사실상 이런식으로 민승호에게 뇌물을 갖다바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민승호는 '이 상자 안에 귀한 보물이라도 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방 안에서 특이한 상자를 열쇠로 열고 상자를 여는 순간...
민승호의 집 방 한채가 통채로 날아갈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이때 근처에 민승호의 친아버지인 민치구가 당시 10살이었던 민승호의 아들과 함께 있었는데 폭발로 선 채로 죽고말았으며, 역시 근처에 있던 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친모인 감고당 한산 이씨도 함께 사망했다. 폭탄 바로 가까이에 있던 민승호는 온몸이 시커멓게 타들어간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죽어가면서 운현궁 쪽을 두세 번 가리켰다고 한다.
2 기묘한 사건 조사
민씨 척족의 수장과 명성황후의 어머니가 숨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물론 온 나라가 발칵뒤집혔다. 그러나 그런것 치고는 고종의 태도는 상당히 미적지근했다. 고종실록에서도 이 엄청난 테러사건을 범상한 사건처럼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의혹을 안겨주었다.
세간의 이목은 대원군에게로 쏠렸다. 민승호가 죽어가면서 말도 못한채 운현궁쪽을 가리켰다는건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을 지목한 셈이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만한 이유도 없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그해 봄, 민승호의 집에 원인을 알수없는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민승호가 암살되고 나서 얼마후에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없는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민승호와 흥인군은 모두 대원군과 가까웠던 사이였으나 대원군의 실각과정에서 고종의 편에 섰고 대원군은 이들이 자신을 배신했다 여겨서 이런 사건들을 일으켜 죽이려 한게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을 수사하거나 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흥인군의 집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체포한 장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대원군과 가까운 신철균이라는 사람의 문객이었다.
이듬해인 1875년, 다시 흥인군의 집에서 화재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고종은 다시금 사건의 범인으로 장씨를 체포했으며 그 배후로 신철균도 잡아들였다. 장씨는 민승호 암살과 흥인군 집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처형되었지만 신철균은 조정의 고위직을 지냈던데다 뚜렷한 혐의가 없다는 이유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신철균은 이후 1876년, 화적떼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는데 조사 과정에서 신철균의 장모가 "내가 점을 쳐보니 모월 모일에 흥인군 집에 불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고 진짜로 장모가 말한 그 날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결국 신철균은 민승호 테러와 흥인군의 집에 두번 방화를 했다는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삼족이 멸족당하는 결말을 맞이하는걸로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3 사건의 배후는 대원군인가
사건의 범인으로 신철균이 책임을 지고 능지처참을 당했으나 객관적으로 신철균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신철균은 직접적으로 폭탄 테러를 저지른건 아니지만 관련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이유로 죄를 받아 처형된 것이었다. 신철균이 죽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장모의 흥인군 집 화재 예언도 과연 그런 말이 있었는지의 여부조차 정확하지 않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때 사건의 진짜 배후는 대원군일 가능성이 있다.
- 첫째로, 민승호의 집에 처음 불이 난 시점은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시점이었는데 민승호는 이때 고종의 편에 서서 흥선대원군과 대적했다.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부인의 친동생인 민승호가 자신을 배신한걸로 여겨 괘씸했을것이고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민승호의 뒤에 있다고 여겨 민승호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대원군과 적대하던 흥인군의 집에 두번이나 화재가 일어난건 대원군의 분노로 인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 둘째로, 대원군은 고성능 폭탄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원군은 집권기간 서양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갖가지 신무기 개발에 열중했다. 특히 청나라에서 들여온 해국도지는 큰 역할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개발된 폭탄이 바로 수뢰포였다. 신헌의 주도로 개발된 이 수뢰포의 위력은 작은 배 한척을 박살내고 물기둥이 크게 솟구칠 정도의 위력이었다고 한다. 이정도 위력의 폭탄을 만들 기술이라면 대원군의 배경하에서 충분히 다른 용도로 전용할수 있는 폭탄을 만드는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 당시 민승호에게 뇌물을 위장한 폭탄을 전달한 사람이 방안에서 열어볼것을 권했다는것은 폐쇄된 공간에서 폭발의 위력이 더 커진다는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가 막 개항을 시작한 시점이라 외국에서 폭탄을 들여올수도 없었다는걸 감안하면 이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만들고 동원할수 있는건 대원군정도의 배경이 아니면 안되었다는 점은 납득이 간다.
하지만 대원군이 이런 테러를 지시했다면 과연 얻는 실익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민승호와 흥인군을 제거한다고 해서 곧바로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원군의 수하들이 대원군 실각에 분노해 민승호와 흥인군에 대한 테러를 모의하고 실행한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설령 수하들이 진행했다 하더라도 대원군이 최소한 이 사건을 알고도 묵인했을 개연성도 있다.
고종은 민승호와 명성황후 모친까지 살해된 이사건으로 충분히 대원군을 범인으로 지목해 공격할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것은 대원군 추종세력의 반란을 우려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대원군은 내버려두고 대원군의 이전 측근이자 가까운 인사인 신철균을 배후로 지목해서 그를 죽였다는것이다. 이는 대원군에게 더이상의 경거망동을 하지말라는 고종의 경고메시지였다는 추측도 있다.
4 이모저모
그당시 외국대사들도 "명성황후의 친오라버니[1]를 흥선대원군이 죽였다"고 알고있었다.
이후 1892년에 운현궁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는데 명성황후의 보복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후에 대종교 측에서 을사오적을 암살하고자 폭탄을 보냈으나, 바로 민승호가 이렇게 죽은 걸 기억해 폭탄이 든 상자를 꺼내지 않아 실패한 바 있다.
5 미디어에서
한국사상 전대미문의 폭탄테러 암살사건임에도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2002년에 방영됐던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이 에피소드가 재현되었는데 역사대로 민승호가 상자를 열자마자 집이 폭발하고 민승호는 즉사했으며 그 곁에 있던 명성황후의 모친인 감고당 한산 이씨는 중상을 입는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아와 어머니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던 명성황후(이미연 분)는 사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다. 그러나 이씨는 폭발 때문에 사지 일부가 절단되고 심한 화상을 입어서 말 그대로 즉사만 면한 중한 상태였기에 불려온 의원들이며 간호하던 사람들도 보고 고개를 저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날 밤을 못 넘기고 딸의 곁에서 임종을 맞고, 어머니마저 잃은 명성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또한 명성황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해당 사건과,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명성황후(수애 분)의 모습이 나온다.- ↑ 실제로는 양오라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