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峴宮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기거했던 사가(私家). 고종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며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지내왔던 곳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당시의 한양 공덕리)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고종의 형이자 대원군의 장남인 흥친왕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부 왕족이나 양반에 의해 알려진 곳이기도 하였지만 1863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대원군이 섭정하게 되면서 조선 임금의 생가(生家)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사적 제257호. 이름은 조선시대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峴)라는 의미에서 '운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단, 고종의 잠저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고종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의 운현궁이 아니다. 사실 고종이 태어나서 자란 집은 운현궁의 북동쪽 뒷편에 있었는데 1966년에 그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들어서 있다. 물론 고종이 실제 태어난 집 역시 운현궁이 한창 넓었을 때는 운현궁 구역에 들어갔기 때문에 고종은 어찌 되었든 운현궁에서 태어난 것은 맞다.
그러나 운현궁 역시 사연이 많은 곳이기도 한데, 서울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옛 궁들도 그렇듯 운현궁 역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막강했을 때는 그 권세에 비례해서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운현궁 양관'[1]을 포함해 운현초등학교와 일본문화원까지 포함하여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운현궁의 크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 이하응이 그 터를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위 담장이 수 리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여 궁궐처럼 엄숙하게 하였다.
이렇게 크기가 커서 운현궁에는 대원군의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도 이곳에서 살았으며 천하장안으로 대표되는 종자들이나 그 식솔들까지 살아서 광복 무렵까지도 백여명이 넘는 대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의 주도적 인물인 전봉준도 여기서 2년 정도 식객 생활을 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대원군 본인부터 당대의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판소리나 그림 등의 예술활동 애호가여서 당시의 화가들이나 신재효의 지도를 받은 판소리꾼들, 심지어는 남사당패들까지 운현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대원군은 섭정을 하였던 와중에도 주로 이곳에서 집무를 봐왔으며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의 지휘를 맡아왔다가 후에 공덕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장남인 이재면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대원군이 주로 사용했던 아재당,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별당채인 이로당이 있으며 한때 고종과 대원군이 창덕궁과 운현궁을 왕래할 수 있는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으로 사용했던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영로당' 이라는 안채도 있었으나 지금은 운현궁과는 독립된 곳으로 개인 소유의 건물로 바뀌었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운현궁 전각에는 노(老)자 들어간 전각이 많다. 대원군이 뭔가 이 글자에 애착이라도 있었던 모양. 실제로 말년의 대원군은 자신의 호인 '석파(石城)'를 대신해 '노석(老石)'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운현궁 전각 중 노안당의 현판은 대원군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이것은 고종 즉위 전에 사망한 김정희가 직접 써 준 게 아니고 대원군이 운현궁을 증축할 때 스승의 글씨를 집자해서 현판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주요 전각들과 함께 운현궁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작은 전시관이 있으며, 전각 내부에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생활용품이나 당시 복식을 입은 마네킹들도 있다.
한동안 설날 및 추석 명절 동안에만 무료 입장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2014년 3월 20일부터는 서울시 조례 개정으로 모든 날에 무료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월요일(공휴일이 아닌 경우에만)에는 휴관. 대중교통으로는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지척이다.
한국전쟁 중에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숙소로 삼았던 곳이 바로 운현궁이다. 이때 운현궁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던 사람이 정주영이다. 일본인들이 살던 집에서 뜯어온 변기와 세면대 등을 설치하여 운현궁을 개조했다 한다.[2]
2 주요 건축
출입문(出入門) 운현궁의 정문 |
수직사(守直舍)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
솟을대문(大門) 운현궁 안채인 이로당과 노락당을 출입하는 문 |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의 사랑채로서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 6칸, 측면 3칸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덧대어 차양을 설치했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논어》 〈공야장편〉의 '노인을 편하게 하다(老者安之)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이다. |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 정면 10칸, 측면 3칸이다. 1866년(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거행되었으며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각종 중요행사 때 사용되었다. 명성황후가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던 곳으로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있은 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할 수 없어지자 안채로 사용하기 위해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 8칸, 측면 7칸이다... 여성들의 공간이므로 뭇남성들의 출입을 삼가기 위해 건물의 구조가 ㅁ자 형태로 이루어졌다. |
3 운현궁의 역대 주인
운현궁계 왕족들의 묘는 모두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興園) 내부에 있다. 원래 흥원은 경기도 파주시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1966년에 파주의 묘역 일대가 주한미군 시설로 수용됨에 따라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이장된 것이 현재에 이른다. 사실 말이 원(園)을 썼지 막상 가보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냥 지체 높은 집안 선산 정도의 규모로, 흥선대원군과 흥친왕의 묘만 온전히 남아 있고 나머지 가족들의 묘는 화장을 해서 이우의 묘가 있던 자리에 납골묘로 따로 모아 놓았다.
- 1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 2대 흥친왕 이재면(1845~1912) : 흥선대원군의 장남. 고종의 동복형.
- 3대 영선군 이준용(1870~1917) : 흥친왕의 장남.
- 4대 이우(1912~1945)[3] : 의친왕의 차남. 영선군의 양자. 이우는 어릴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고 1945년도에 원폭으로 사망했기에 운현궁에서 산 기간이 짧았다. 이복 여동생들[4]이나 친척 여동생들에게는 '운현궁 오라버니'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 오히려 박영효의 서손녀이자 이우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가 운현궁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왕실 재산이 국유화되자 정부의 높으신 분들을 찾아다니며 운현궁은 흥친왕이 대원군 개인의 가계를 이어받아 대대로 내려온 집이므로 왕가와는 별개이기 때문에 왕실이 아니라 개인의 사저임을 호소해서 결국 운현궁의 개인 사유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물론 이우가 틈만 나면 운현궁에 머무르려 하고 가족들도 운현궁으로 보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운현궁의 진짜 4대 주인은 바로 박찬주인 셈. 운현궁이 1992년에 서울시에 매각된 후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자택에서 살다가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 5대 이청(1936~ ) : 이우의 장남. 운현궁을 서울특별시에 매각했고, 운현궁의 각종 유품들을 서울특별시에 기증했다. 2012년 현재 본인이 설립한 석파학술연구원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