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乙巳五賊
줄여서 '오적(五賊)'이라고 부른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매국노.
2 명단
이름 | 직위 | 사진 |
박제순 (朴齊純) | 외부대신 | |
이지용 (李址鎔) | 내부대신 | |
이근택 (李根澤) | 군부대신 | |
이완용 (李完用) | 학부대신 | |
권중현 (權重顯) | 농상공부대신 |
매국노를 대표하는 집단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녔다. 매국노 하면 을사오적, 을사오적 하면 매국노가 떠올려질 정도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친일인명사전에서도 맨 첫 장을 장식하였다.
이름 | 직위 | 사진 |
이재극 (李載克) | 궁내대신 | |
이하영 (李夏榮) | 법부대신 | |
민영기 (閔泳綺) | 탁지대신 |
추가로 을사3흉, 고종을 협박했던 궁내대신 이재극,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토는 하지만 이를 찬성으로 취급했다. 이토의 추궁에도 무조건 반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후 조약 체결 이후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법부대신 이하영, 반대했지만[1] 경술국치 이후로 훈장에 작위(남작)를 받고 친일파로 살았던 탁지대신 민영기#도 모두 잊지 말자. 심지어 한규설은 연금된 뒤, 연금이 풀린 뒤 오적을 모두 해임시켰으나 자신이 해임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이완용밖에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이완용이 얼마나 매국노 짓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완용 혼자 을사오적의 대표격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넷은 사실상 들러리 포지션이다. 그래서 일반인에게는 거의 잊혀졌다. 오히려 정미칠적에 포함된 송병준이 일진회의 병크짓으로 인해 더 유명하다. 심지어,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이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가 하면, 송병준과 이용구를 을사오적의 일원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고종 역시 사실상 책임만 피하고 조약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어 '을사육적'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의 추궁에 고종은 백성들과 의논한다고 했지만 이토는 폐하가 언제 백성들과 정사를 의논했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사실 고종이 제대로 반대를 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미적지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물론 적극 반대했으면 퇴위는 물론 목숨도 위험했을지도 모르지만
3 뒷이야기
외무대신인만큼 박제순은 원래 "외교권은 안 된다"라고 하던 자인데, 당일에는 겁먹고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는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어줬다. (외무대신인 만큼 조약의 대표였다. 이 조약이 황제의 명의가 아닌 외무대신과 이토의 명의로 나온 것을 주목하자.)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무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합방 때 똑같은 짓을 한다. 반대하다가 결국에 끝에는 찬성, 그리고 경술국적 등극. 권중현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황실의 존엄 및 안녕이 포함되면 상관 없다는 식의 말로 결국 찬성. 이지용의 경우에는 일본을 철석같이 믿던 자인데, 도박중독자가 돼서 죽을 때는 "일본에게 속았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만 외교 한가지만 이웃 나라에 맡긴 것이고,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 면서 보호국이 되는 것을 실컷 우겼다니...
일각에서는 군부대신 이근택의 경우 고종의 충복이나 다름이 없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밀명으로 친일파에 든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근택은 훨씬 전에도 궁정 쿠데타도 기획한 전도 있다. # 사실 근왕파였던 것으로만 따지면 이완용도 측근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인재풀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제. 고종조차도 "조약을 거부하기는 힘들다"라는 이완용의 말에 내심 동의를 표하는 수준이었으니.
2008년 이후 취업난을 반영한 신조어 중 하나인 육이오에서도 이들이 들어간다. 62세까지 일하면 '오적'이라는 소리.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4 관련 문서
- ↑ "나는 반대입니다." 이토 : 정말로 반대입니까?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