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암

閔黯
(1636∼169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1668년, 별시 문과의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 승지, 함경도관찰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680년, 대사헌에 있었으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대사헌에 기용되었고, 이조판서 심재(沈梓)와 서인 김수항(金壽恒),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했으며, 그들의 처벌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1691년에 우의정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복위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민암은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과 함께 옥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탄핵당했다. 1694년, 숙종의 명에 의해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