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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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九萬
(1629∼1711)

이 자식과는 절대로 헷갈리지 말자.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약천(藥泉)과 미재(美齋)다. 개국공신인 남재의 후손이다.[1]

충청남도 홍성의 결성(結城)에 살았으며,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51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인 1657년에 정언이 되었다. 1660년, 이조정랑,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쳤다. 1668년, 안변부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674년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2]

1679년,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이 되었으나, 남인(南人)의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을 탄핵해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게 되자 도승지가 되었고, 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인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남구만 역시 강릉(江陵)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1701년,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중형(重刑)을 주장하는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했으나 숙종희빈 장씨를 사사하자 충청북도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낙향했다.[3] 사후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여담으로, 성씨가 남씨라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구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는 자꾸 남구만을 남인이라 적는 오류가 자주 보였다. 지금은 대부분 수정된 상태.

그가 죽은지 한참이 지난 영조 시절에《천의소감》이란 책에서 그와 유상운을 매도하는 글귀가 실려서 영조가 "이 책을 당론을 위해 썼느냐?"라고 격노하여 다시는 당론을 입게 담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신하들에게 받아낸 일이 있었다.
  1. 개국공신 남은의 형이나, 개국 이후에는 행보가 갈려 무인정사에서 살아남았고 태종 때 영의정이 되었다.
  2. 4년간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중앙으로 돌아가자 지역민들이 생사당(살아있는 이를 위한 사당)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3. 이 때《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유명한 시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