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

조선의 붕당
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
북인남인소론노론
대북소북청남탁남준론완론시파벽파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小論

조선시대에 등장했던 당파 중 하나. 서인에서 갈라져나왔다.

1 서인의 분열

숙종시기에 있었던 잦은 환국으로 인해 서인남인의 처지는 자주 바뀌었다. 일단 예송논쟁 때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났고 숙종 초까지는 조선시대에 단 한 번 있었던 남인천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한성부에서 괘서사건을 벌였다가 실패했고, 밀려난 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서인에서 남인들을 몰아낼 기회를 포착한다.

바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이자,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김석주가 '남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 것. 남인 측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의 힘이 강했고 (윤휴, 허적 등등) 이를 위해 18,000명을 무과로 뽑아두고 군사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남인과 숙종이 물 밑으로 북벌과 군사 부분에서 협력하는 관계였다면 오히려 서인들이 역풍을 맞고 박살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남인들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뒤이어 일어난 삼복의 변 등으로 인해 최초의 환국인 경신환국이 발생하며 남인 정권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고 다시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헌데 정권을 잡은 후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경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온건파는 윤증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남인들의 처리문제 뿐만 아니라 강경파는 민생과 명분을 중시하고, 온건파는 북방 개척과 실용을 중시하는 등 관심을 가진 분야도 달랐다.

2 회니시비 (懷尼是非)

이러한 분열경향을 정치적 분야까지 확대시킨 게 회니시비 사건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병자호란강화도 수비의 총책임자였던 윤선거였다. 그가 1669년에 사망하자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에 쓸 묘갈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송시열에게 주면서 문제가 터졌다.

이때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원래 윤선거는 병자호란이 터졌을 당시에 강화도에 있었는데 그의 친구 김익겸 등과 함께 강화도 함락되면 장렬하게 자결하기로 약속했고 아내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다. 강화도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문루에서 화약 더미에 불을 붙여 자폭했고 김상요의 종과 손자, 윤선거의 친구들도 모두 불길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으며 윤선거의 아내도 목을 매었다. 하지만 윤선거는 노부(老父)를 생각하여 목숨을 끊지 못했고 후에 스스로를 죄인이라 일컬으며 재가도 들지 않고 벼슬도 사양하면서 학문만을 닦다가 죽었다.

그런데 윤선거가 아직 생존중이던 시절에 윤휴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송시열이 격분하자 송시열의 친구인 송준길, 유계, 이유태 등도 모두 윤휴와 절교했고 윤선거도 송시열이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압박하는 통에 윤휴와 절교하여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남긴 편지글을 보니 윤휴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자 묘갈명을 성의없이 써서 내줬다. 어떻게 써줬는가 하면 "박세채가 이미 잘 써줬던데 내가 또 써줄거나 있는가? 그의 말을 인용할 뿐 딱히 더 쓰진 않노라." 즉 박세채의 글을 복붙하고 치웠다는 소리다.

윤증이 묘갈명을 받아보고는 '스승님이 무언가 잘못 알고 쓰신 것이다.'고 생각해 여러차례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송시열의 측근들이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기로 해놓고 죽지 않은 비겁한 양반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그걸 들은 윤증은 격분하여 송시열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681년에 윤증은 신유의서 (辛酉擬書)를 통해 '송시열은 주자를 높이 받들고 평생 따랐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송시열의 학문을 통렬하게 까버리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

3 경종 시기

이렇게 형성된 소론은 숙종 말기에 희빈 장씨의 아들이었던 경종의 계승을 지지하며, 연잉군을 지지했던 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때는 소론이 숫적으로는 열세여도 정치적으로는 우세였으나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에 죄다 갈려나가게 된다. 그 이후로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체를 비롯한 노론 4대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노론천하가 열리게 되나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함으로서 상황이 바뀐다. 노론은 경종을 길들이겠답시고 여러 차례에 모욕에 가까운 압박을 주었고 노론이 지지하는 대통을 만들기 위해 또다시 왕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뭘 잘못먹었는지 반역으로 간주될수 있는 대리청정까지 추진했다가 경종의 돌변으로 뒤통수를 제대로 처맞고 신축환국으로 조정에서 죄다 쫓겨났고 이어 목호룡의 고변으로 삼수의 옥 사건이 밝혀짐에 따라 노론 수뇌부와 그 자제, 친지 수십명이 처형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진다.[2] 그리고 조태구, 유봉휘, 이광좌, 조태억 등을 필두로 하는 소론 완론과 김일경, 박필현을 비롯한 소론 준론이 조정을 차지하는데 경종은 전투적인 준론에게 더 신뢰를 보였다고 한다.

4 영조~정조 시기

그러나 소론의 짧았던 집권시기는 금방 끝났다. 경종이 즉위 4년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한 후 잠깐은 이광좌가 영의정, 유봉휘가 좌의정으로 임명되면서 소론 정권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영조를 아예 죽이려했던 준론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론을 완전히 박멸하고자 삼수의 옥을 확대할 것을 영조에게 청했다. 이에 영조는 경종의 지시를(김성 궁인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 인용하면서 이를 거부한다. 이때 노론계 유생 이의연이 노론 4대신이 모함당해 억울하게 죽었단 주장을 했고 분노한 소론이 반박하며 강하게 벌줄 것을 청했지만 영조는 의견을 낸 것을 어찌 벌할 수 있냐고 거부한다. 그래놓고 자긴 나이 먹고 조금만 거슬리면 영의정 급까지 마구 작살냈다 보다 못한 이광좌 등의 소론 대신들까지 청하고 나서야 겨우 절도 정배를 명했다. 이건 노론 편을 들겠다고 왕이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다.

사학유생 이봉명이 김일경이 역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벌줄 것을 청하자 이의연도 처벌했으니 얘도 처벌해야 겠네, 라면서 일개 유상과 재상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어마어마한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며 즉각 받아들여 삭출함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상 이광좌가 이의연의 국문을 청하자 잘됐다면서 김일경도 국문할 것을 지시하며 사실상 삼수의 옥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명했다. 이는 당시의 고변자 목호룡이 끌려오면서 확실해졌다. 김일경과 목호룡 모두 자신의 무죄를 강변했고 김일경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며 영조의 추궁에 조목조목 항의했으나 영조는 키배에 밀릴 것 같으니까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고문을 더 가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목호룡은 맞아죽고 김일경은 저잣거리에서 참해졌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노론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영조는 다 끝난 걸 뭘 그래~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소론 대신들을 죄다 내쫓고 정호, 민진원, 홍치중, 김재로 등의 노론 대신들로 삼정승을 비롯하여 조정 수뇌부를 채워넣는다. 짧은 소론 정권은 끝장난 것이다.

4대신 이후 노론의 수장이 된 초강경파 민진원과 정호가 소론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영조는 즉각 호응하여 4대신을 신원하고 삼수의 옥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모조리 신원하는 한편 당시 정권을 이끈 소론 대신들을 벌주었다. 완전히 신이 난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미 죽은 조태구, 유봉휘는 물론이고 살아있던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한다. 하지만 영조는 거부했고 노론을 설득하여 더 이상의 보복을 막으려 했지만 노론은 막무가내였다. 탕평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던 영조는 결심을 굳혔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을 제외한 101명의 노론 신하들을 내쫓고 62명의 소론 신하들을 불러들였으며 조태채를 제외한 4대신의 신원을 철회함으로 삼수의 옥 사건을 사실상 원위치 시켰고 다시 소론 정권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정미환국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한편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들과 남인들은 경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식으로 영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독살설까지 나오면서 소론들은 난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들어서서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고 소론들은 당황했으나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계속 반란을 추진하니 이게 영조 4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이다.[3] 영조가 정미환국으로 완론 정권을 세워졌음에도 반란은 삼남과 평안도, 서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초대규모였으나 호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과 평안도 지역 반란군은 봉기 전에 수뇌부가 체포됨으로 제압되었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의 반란군도 각개 격파당한다. 이 결과 소론 준론(강경파)들은 박살이 나면서 명목상 한패인 소론들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잔당들이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가 그때마다 족족 발각되면서 소론 준론들은 그야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4] 그나마 온건파인 소론 완론이 소수 남인과 함께 정계에 머물렀지만 노론의 세력이 훨씬 더 커서 힘을 쓰진 못했다.

한편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엄격하게 붕당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준론탕평을 실시함으로서 노론과 소론 완론 그리고 남인 계열이 등용되면서 잠깐 빛을 보기도 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이 아예 소멸하게 된다.

5 소론의 주요인물들 일람

  • 윤증
  • 박세당(1629-1703) 사문난적하면 윤휴와 함께 떠오르는 그 서계 박세당이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도 주류 소론과는 차이가 좀 있었고, 1660년에 처음 관직에 나갔다가 1668년에 낙향한 이후로는 관직에 나간 적도 없고 정치적 활동을 한 적도 없다. 덕분에 엄밀히 평가하면 인물의 중요도와 별개로 소론의 목록에 포함시키기 좀 껄끄러운 맛이 있다. 송시열이 속한 노론의 반대파인 소론과 그나마 친하게 지냈다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사실 정치적 파벌이 어디냐는 별로 안 중요하고, 사문난적이라는 점과, 주자학을 비판한 '사변록'과 당시 농업기술에 대해서 다룬 '색경'이 포함된 서계집의 저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색경 때문에 초기 실학자로 분류되는 일이 많은 인물. 인현왕후 퇴위에 목숨걸고 반대하다가 국문으로 죽은 박태보의 아버지였으며 조태억의 스승, 박세채와는 항렬이 같은 일가 친척이였다.
  • 박세채:(1631~1695) 윤증과 더불어 소론의 재야 영수. 탕평책의 선구자로 황극탕평설을 내놓아 숙종 시절부터 탕평의 중요성을 역설한 사람이다. 김익훈, 장희재 처벌 등에 강경하였고 송시열 등을 존중하여 소론의 영수임에도 노론과도 사이가 좋았던 친화력있던 인물이다. 애초의 그의 사위 송순석은 송시열의 손자였다. 정작 그는 소론인데 그의 제자들은 송시열이 남인 손에 죽는 걸 보고 빡쳐서 죄다 노론으로 전향했다.(...) 물론 그 덕에 소론측 인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다. 벼슬을 아예 거부하였던 윤증과는 달리 여러차례 벼슬길에 올랐으며 권신 김석주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김석주가 51세로 급사한 덕에 피해는 보지 않았다.
  • 남구만:(1629~1711) 숙종조의 명재상이자 송준길의 제자이며 소론의 조정 영수. 노론-소론 분당 이전에는 한성판윤을 하며 탁남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의 서자 허견의 만행을 탄핵하다가 유배를 가는 등 강직한 인물이었다. 북방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폐사군의 복설을 주장하고 서북인들의 등용을 적극 간하는 등 홍경래의 난을 100년 전에 미리 예견한 인물이다. 유능하고 명망이 높아 환국 이후 즉각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자기네 당파에는 엄격하여 서인 출신의 한중혁 등의 인현왕후 복위 운동은 가혹하게 처벌한 반면에 남인 민암, 장희재 등에게 은전을 베풀 것을 고집하다가 많은 소론들이 분노하여 노론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 최석정:(1646~1715) 인조대의 명신 지천 최명길의 손자. 위의 남구만과 박세체의 문인이였다. 젊었을 적에는 남인에 대한 저격수로 활약해 윤휴를 공박하기도 했다. 영의정으로 장희빈의 처형을 반대했으며 환국의 나날에도 온건한 태도로 처신을 잘해 8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다. 여담으로 조선사에서 최다 영의정 역임자. 최장은 황희.
  • 최규서 :(1650∼1735) 경종 초기 소론의 영수. 서인이 노소로 나뉠때 소론의 소장파로 활약했으며 최석정의 파직을 막고 남인에 맞서 장희빈의 책봉을 반대하는데 앞장 섰다. 병신처분으로 소론이 득세함에도 낙향했으나,경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영의정을 역임하고 연잉군의 청정을 막는 등 소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주역 김일경과 달리 완론의 입장을 펼쳤으며,고령인데다가 경종 말년에는 낙향해 정치 일선에 물러난 덕에 최석항,유봉휘와 달리 영조 즉위 후 노론의 탄압에도 무사했다. 1728년 이인좌,정희량,박필현 등이 난을 일으키자 사전에 정보를 입수,같은 소론임에도 고변해 완론 소론을 보호하고 역신 이인좌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천명했다. 그 공으로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최석항:(1654∼1724) 최석정의 아우이나 어려서 숙부 최후원의 양자로 입적됐다. 경종 즉위 초 소론 강경파로 신임옥사를 주도했으며 노론의 선제로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 문제가 조정에 불궈지자 비밀리에 경종과 독대로 담판을 지어 철회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광좌,조태구,유봉휘 등과 더불어 소론4대신이라 불리웠으며 이로 인해 노론의 표적이 되어 영조 즉위와 동시에 관직이 추탈된다.
  • 유봉휘:(1659년~1727년) 소론 강경파. 노론4대신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자 할 때 강력히 반대하다가 실패하고, 이어 삼사와 노론이 그를 문초하자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조태구가 왕에게 진언해 무마되었다.대리청정 후에도 연이어 강경한 태도로 극간을 해 청정을 물리고 노론 4대신을 실각시켰다. 영조 즉위 후 탕평책의 일환으로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으나 노론 강경파 민진원과 이봉익에 의해 신임사화의 주모자라는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경흥에 안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됐으나 1755년 괘서사건으로 다시 추탈된다.
  • 조태구:(1660~1723) 경종조의 영의정이자 병신처분 이후의 소론 완론의 영수. 경종 시기의 대리청정 소동 당시에 우의정이었으며 눈물을 흘리며 대리청정을 철회한 인물이었다. 이때 노론은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신축환국삼수의 옥이라는 초대형 철퇴를 맞는 빌미를 제공한다. 소론 정권이 들어선 후에 빈말로나마 영조를 옹호한 대표적 인물이나 영조 31년에 나주궤서사건이 터지자 역률로 추죄된다.
  • 조태억:(1675~1725) 위의 조태구와 노론 4대신 조태채의 사촌 동생이였다.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도 다녀온 경험이 있다.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했고 소론 집권 확립에 앞장섰으며 사촌형 조태채를 비롯한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몰아 공박했다. 영조 즉위 후 소론 완론의 영수로 준론 김일경을 국문하는 등 준론과는 척을지는 모습을 보였다. 조태구,이광좌와 마찬가지로 나주괘서사건으로 1755년 관직이 추탈된다.
  • 이태좌:(1660년~1739)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현손으로 아래의 이광좌와는 재종형제,어사 박문수의 외삼촌이며 고아인 그를 부모대신 길렀다. 장희빈 사사에 반대하다가 실각된 최석정을 변호하다가 역으로 삭탈관직됐으며 윤선거 문제로 노론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대리 청정을 적극 반대했으며 신임옥사에는 형조판서로 강경하게 노론을 처벌,탄압했다. 영조 즉위 초 임인옥사 문제로 파직당했으나 정미환국으로 복직해 주요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종성의 아버지.
  • 이광좌:(1674~1740) 영조 초의 영의정이자 소론 완론 중에서는 강경파에 속한 마지막 인물이다. 경종 때 이미 노론을 탄핵하는데 한몫을 한 사람이고 김일경급은 아니었지만 제법 강경하였다.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은 명분적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고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더더욱 입지가 좁아진다. 이때 이광좌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고 분무원종공신 1등에 봉해졌다. 탕평책의 신봉자였으나 당시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정호가 노론 역사상 송시열 이후로 최고의 강경파인지라 노론들에게 광좌놈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영조가 직접 노론 신하들을 불러서 대신에게 무엄하게 무슨 짓이냐라고 야단을 쳐도 노론 신하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어린애들도 광좌나 광좌놈이라고 부른다라고 지지않고 맞섰다. 다른 소론 대신들이 영조에게 납작 업드린 상황에서도 삼수의 옥은 역적이 맞다고 강변하였고 덕분에 노론의 공적 1호가 되어 무수한 탄핵을 받았다. 여러번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시골로 내려간 기간이 더 길었다. 1740년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영조는 숙종의 사당을 찾아 비를 맞으면서 신하놈들이 탕평을 하래도 안하고 깽판치니 내가 못난 탓이다! 왕 안해!라고 선포하자 신하들이 또 우리들이 당파싸움이나 하면 우릴 벌하소서!라고 울고불며 말린 다음날로 상대적 강경파였던 이광좌의 죽음으로 조정은 그나마 좀 조용해진다. 하지만 영조 31년의 나주궤서사건으로 벼슬이 추탈된다. 여담으로 박문수와도 인척 관계로 그의 후원자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 김일경
  • 오명항:(1673년 ~ 1728년) 이광좌,박문수와 함께 영조 재위 초기 소론대신의 필두. 영조 즉위 전에는 실무형 관직을 역임했으며,영조 즉위와 동시에 소론이 대거 실각으로 사직하나 정미환국으로 복직한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터지자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하라는 영조의 명으로 토벌 총책임자인 순무사에 임명, 종사관 박문수와 함께 공을 세운다.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역신 이인좌와 같은 당색이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을 수 없다고 사직을 요청했으나 영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다. 하지만 그 직후 병사. 효자정문이 있을 정도로 충과 효 모두 뛰어난 명신이였다.
  • 조문명:(1680년~1732년) 풍양 조씨로 조현명의 형. 소론 온건파인 완론의 일원으로 탕평파로도 분류된다. 경종 시기 연잉군을 보호함과 동시에 과격파 준론의 영수 김일경과 대립한 공로로 영조 즉위 이루어진 소론의 대거 실각에도 무사히 중용된다. 영조의 탕평책의 선봉장으로 송인명과 함께 붕당 타파와 탕평 확립,노소론 연립 정권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인좌의 난에도 참여해 전공을 세워 공신이 됐다. 탕평 정책에 주력한 탓에 노소론 강경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의 비호로 무사했고,특이하게 노론 처가와 외가를 두어서 그들과도 각별한 교류를 유지했다.
  • 박문수
  • 조현명:(1690~1752) 이광좌 사후에 송인명과 더불어 소론의 영수였다. 송인명이 삼수의 옥을 임인국안으로 후퇴시키는 타협안을 제시하자 말도 안된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아 송인명보단 강경한 사람이었다. 이인좌의 난 당시에 오명항을 따라 종사했으며 오명항이 군율을 어긴 자들을 용서해주자 "군은 위엄으로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자 오명항은 "그 말이 맞으나 전란이 없었는지가 어언 100년이라 군율이 해이해진 것은 당연한데 무작정 가혹하게 몰아붙히면 병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만 품을 것이다."라고 요즘 똥군기 가득한 일부 군인보다도 낫게 대답했다. 후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 송인명:(1689~1746) 소론 완론의 영수이며 영조의 쌍거호대 정책에 누구보다도 부응한 사람이었다. 영조의 정통성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삼수의 옥 문제를 완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국가의 기강을 단속하는데 주력했다.
  • 이종성(1692~1759) 이태좌의 아들. 박문수와 친했으며 그 못지않게 암행어사로도 유명했다. 이인좌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탕평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서 삭직되기도 했고 영의정 재직 시 사도세자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처벌에 적극적이던 노론 김상로와 대립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죽기 전까지 사도세자를 비호했고 시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 문묘에 배향된다. 지략이 뛰어나 반대파인 노론의 중진 유척기가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는 야사가 있다.[5]
  • 조재호(1702~1762) 사도세자가 죽기 전에 찾았다는 바로 그 사람. 조문명의 아들이자 조현명의 조카이며 효장세자의 비 효순왕후의 오빠. 경상도 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춘천에 은거 중 임오화변이 터지자 사도세자를 구하기위해 상경했으나 실패,홍봉한이 지금 위험한 놈들을 단속해두지 않으면 훗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타진될 것이옵니다라고 상소를 올려 죽일 것을 청했고 결국 사사된다.
  • 서명응(1716∼1787) 서명선의 형이며 서호수,서형수의 아버지이며 서유구의 조부.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소론이였으며 정치 일선에 활약한 동생과 달리 명망높은 학자로 역학에 뛰어났으며 실학의 대가,북학파의 비조로 여겨진다.
  • 서명선(1728~1791) 소론 대신 중에서 유일하게 벽파의 입장에 있었던 특이한 인물. 영조 때부터 이미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다. 홍인한, 정후겸 일당이 정조를 핍박하자 정조는 측근인 홍국영을 시켜서 서명선에게 지원사격을 부탁했고 서명선이 총대를 메고 홍인한, 정후겸을 탄핵하면서 정조의 대리청정이 그제서야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정조 즉위 후에 정조의 최측근 모임격인 동덕회 사인방의 일원이 되었다.[6]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쪽 이방을 취했으나 문제는 심환지 등은 서명선조차도 소론이라는 이유로 여러번 탄핵하여 격분한 정조가 이조판서 김종수를 불러 호되게 질책하기도 했다. 훗날 남인 체제공이 급격히 부상하자 벽파와 힘을 합쳐서 체제공을 격렬하게 탄핵했고 "체제공이 역적이 아니라면 제가 기꺼이 반좌의 율에 따라 역적죄로 처형당하겠습니다."라고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노론 명문가의 큰어른인 김치인을 영의정으로 삼고 노론 탕평파인 김재로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화해를 밀어붙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고 일을 성사시켰다. 그 이후 영의정을 두 차례나 지냈으며 조정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상소 한장 덕분에 정조의 최측근이 되었고 심지어 사후에 벽파의 공격도 대왕대비가 "오늘이 무슨 날이냐[7] 공 세운건 서명선이다. 더 큰 죄가 있어도 덮어서 공이 빛나게 해야한다."고 해 넘어가진다. 덕분에 동덕회 4인방 중에서 끝이 가장 좋았다.[8] 역시 인생은 한방이다.
  • 이시수(1745~1821) 이조,호조,병조 판서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우의정, 영의정도 해본 영조, 정조, 순조 조의 대신. 정조 말엽에 이미 소론의 영수 격이었으며 심환지와 함께 정조를 간호하기도 했다. 순조가 즉위한 후에 정순왕후의 서슬퍼런 치세에 납작 업드려서 정순왕후를 지지했지만 정순왕후가 벽파가 수세에 몰리자 2차 수렴청정을 시도하자 논리적으로 이를 물리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훗날 홍경래의 난이 터졌을 때 그의 동료 김재찬과는 달리 난을 동네 민란 수준으로 대수롭잖게 여긴 흑역사가 있긴 하지만 홍경래의 난 류의 반란은 조선 역사상 유래가 없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렇게까지 폄하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덕일은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이시수를 노론 벽파라고 서술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 이병모(1742~1806) 이시수와 더불어 최후의 소론 영수 격이었던 사람. 예조,호조,병조,형조 판서를 두루 다 지냈고 삼정승에 모두 임명되보았다. 영의정에 임명된 것만해도 1799년과 1803년에 걸쳐 두차례나 된다. 순조가 즉위했을 때 영의정의 몸이었으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이름있는 소론 대신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소론도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그외에도 한태동, 오도일, 이유원 등의 인물들이 있으나 여백이 부족한 관계로 기재하진 않겠다.

6 소론의 역대 영수

위에도 서술했듯이 이시수, 이병모를 끝으로 '정치 세력' 소론은 끝이 난다. 소위 병신년의 의리라고 소론이 숙종 시절의 역당으로 낙인 찍히면서 소론이 내세울 공통의 의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잔류한 소론 인사들도 정치 세력이 아닌 파편화된 개인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7 소론의 집권기간

  • 노,소론을 망라한 범 서인 집권기간: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
  •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소론 내각: 갑술환국(1694)~병신처분(1716)
  • 조태구의 완론과 김일경의 준론을 중심으로 한 범 소론 내각: 삼수의 옥(1721)~영조 즉위 이후 김일경 처형(1724)
  • 이광좌의 완론내각: 정미환국(1727)~기유처분(1729)
  • 쌍호거대로 노,소론 공동집권 기유처분(1729)~윤지의 나주괘서사건등 소론 준론의 최후의 발악 이후 조태구, 유봉휘 역률로 추죄, 이광좌 삭직(1755)
  • 정조 즉위 이후 준론 탕평으로 시파에 이병모, 이시수 등의 소론이 합세하여 정치 세력의 구실은 함.(1776~1800)[9][10]
  1. 이 편지는 박세채가 윤증을 말려서 송시열에게 부치진 않았으나,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새체의 사위였던 송순석이 몰래 필사해서 송시열에게 전해지게 된다.
  2. 이때 노론의 4대신들은 전부 사약크리를 맞았다.
  3. 영조의 정미환국이 참으로 절묘했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 만약 정미환국이 없었더라면 완론들도 준론과 합세했을 테니 반란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4. 1755년 윤지의 나주벽서사건,심정연,신치운,유봉성 등의 교영계역모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영조 정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한 것이 결정적이였다. 심정연은 영조가 친히 행차한 과거 시험장에서 윤지 등을 옹호하고 영조를 가멸차게 비난하는 글을 올리는 용자짓을 했다. 게다가 신치운은 국문장에서 영조의 역린인 게장까지 언급하며 경종 독살설로 물고 늘었고, 이에 영조는 이성을 잃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울기까지 했다. 사건 직후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5. 이때 서로 당색이 달라 병풍을 사이에 치고 대화를 했다고 하니 당쟁의 골이 굉장히 심하게 파인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 심노숭의 <저자실기>에도 민진원과 이광좌가 빈청에 동석할 때 사이에 병풍을 쳤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6. 나머지 셋은 홍국영, 김종수, 정민시다.
  7. 대왕대비가 하교한 날이 서명선이 상소를 올린 12월 3일이다.
  8. 김종수는 시파에 의해서 역적으로 찍히기도 했고 정민시는 벽파에 의해 역적찍히고 홍국영은 정조 4년에 몰락했다.
  9. 혹은 이시수가 죽는 1821년?
  10. 정조 사후에 벽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시파는 안동 김씨를 위시로 한 노론계 시파가 중심이 되었으므로 소론은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