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붕당 | |||||||||||||||||||||||||||||||||||||||||||||||||||||||||||||||||||||||||||||||||||||||||||||||||||
훈구파 | 사림파 | ||||||||||||||||||||||||||||||||||||||||||||||||||||||||||||||||||||||||||||||||||||||||||||||||||
동인 | 서인 | ||||||||||||||||||||||||||||||||||||||||||||||||||||||||||||||||||||||||||||||||||||||||||||||||||
북인 | 남인 | 소론 | 노론 | ||||||||||||||||||||||||||||||||||||||||||||||||||||||||||||||||||||||||||||||||||||||||||||||||
대북 | 소북 | 청남 | 탁남 | 준론 | 완론 | 시파 | 벽파 | ||||||||||||||||||||||||||||||||||||||||||||||||||||||||||||||||||||||||||||||||||||||||||||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
목차
1 개요
선조 때 동인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서인에 대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북인이 사라진 이후로는 예송을 통해 서인(노론)의 가장 큰 상대당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숙종 시기 환국으로 몰락하여 영조 때 추방되었고, 정조 때 시파로 일부 세력을 얻었으나 신유박해 이후 실각하게 된다.
2 배경
정여립의 난 이후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동인은 분화를 시작했고 임진난 이후 서인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북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분열되었다.
남인은 북인과는 다르게 이황의 제자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정여립의 난 중에도 별로 피해를 입은 바가 없어 서인에 대한 원한도 깊지 않았고 남인의 영수 서애 유성룡은 동인에서는 악의 수괴로 이를 갈던 정철과도 잘 지내던 사이였다. 이는 남북인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광해군 조에 이르러서는 둘은 아예 다른 당파로 갈라졌다.
초기 남인의 주요 인물로는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김명원, 김응남, 김성일[1] 등 왜란당시 전시행정부를 이끈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집권 여당이었고 향촌기반이 있는 동부 경북 및 동부 경남이 왜란 때 완전히 짓밟혀 버린지라 의병활동 보다는 조정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3 양란 이후 남인 - 만년 야당
임진난 이후 남북 분열이 확실시된 이후로는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그들에게 동조했다.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도 만년야당으로서 조정에서 제법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야당으로 서인정권의 들러리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남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막강한 서인 정권에게 대들만한 힘도 기회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북 등이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 이후 효종이 즉위할 즘에 서인 정권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의 산당과 김육, 이시백, 이시방 형제, 정태화, 원두표 등으로 구성된 한당으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피터지는 권력다툼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것이었고 노골적인 충돌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효종이 붕당타파를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로 당파를 내세우기가 뭣한 시기였다.
4 예송과 환국
제대로 된 충돌이 터져나온 것은 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터진 예송논쟁이었다.
효종보다 어린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한 것인데(기해예송), 초기에는 효종이 차남이란 이유로 기년복으로 잠정합의가 되었으나 남인 출신의 윤휴가 효종은 소현세자를 대신한 적장자로서 효종을 위해서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송이 커졌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 입는 기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졸곡이 끝나는 기간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기준을 적용시켰던 터라, 효종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1년 정도 입고 말자는 분위기여서 윤휴의 주장은 묻히는 듯 했다.[2]
그러나 뒤이어 남인의 거두 허목이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며 상소를 올리면서 기존의 기년복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송준길의 반박에도 허목의 논리로 원두표 등이 허목 지지로 선회하는 등 분위기가 3년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시열이 "체이부정" 논리로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윤선도가 강경한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은 다시 재격화. 서인 산당이 장악한 삼사는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다며 반좌의 율을 적용하여 윤선도를 사실상 죽일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 파의 강경 드라이브에 회의를 느낀 일부 산당과 한당 세력에서도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가 나오는 등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결국 현종이 예송 금지를 명하고 기년복으로 상복을 결정지으면서 기해예송은 일단 마무리지어졌다. 기해예송은 이이의 이기일원론[3]과 이황의 이기이원론[4]간의 논쟁이기도 했다.
15년 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졌다. 이번에도 자의대비는 살아있어서 오례의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진 상복이었는데, 산당의 예조에서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으니 그 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을 고쳐 올리자 왕은 노하여 예조 당상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이어서 기년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영상 김수흥 등이 반발했으나 왕은 반대하는 신료들을 파직하고 3일 만에 기년복으로 상복을 정했다.
남인들이 신속하게 개입했으면 서인들을 역으로 몰아 처벌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현종이 너무도 빨리 예송을 마무리지으면서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현종이 불과 2달 후 급사하고 세자 숙종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판국에 접어들었다. 불과 14살인 숙종은 부왕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들을 대거 귀양보내거나 조정에서 몰아내고 남인에게 정권을 준 것이다.
50년에 가까운 서인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남인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4.1 총 10년을 못간 남인 정권
이때 남인의 수뇌부는 허적, 허목, 윤휴, 유혁연, 권대운, 민암, 오시수 등이 있었는데 서인 정권 밑에서 벼슬을 하며 비교적 잘 지낸 탁남과 서인에 맞서 예송을 주도한 청남으로 갈렸다. 윤휴, 허목 등은 청남이었고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이 탁남의 영수였다.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5].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6]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680년, 집권 5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권대운, 민암, 오정복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반대를 하다가 삭직 문외출송되었고, 송시열의 삭직을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7]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유배 중 사망)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하니, 제주도로 유배갔던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83세로 사사되었다.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회, 윤휴, 유혁연, 허적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8]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져 전 훈련대장인 김익훈이 70세의 나이로 형장을 받다 죽었으며, 김환, 이회 등 고변자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김석주 역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죽어서 벌을 받았으며 전 영의정 김수항이 61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이덕원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리고 고작 4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장희빈의 총애는 비례하여 약해진 것이다.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9] 영상 권대운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병판에 서문중을 임명하여 핵심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인현왕후가 죽자 남인은 숙빈 최씨와 노론에 의해 거의 박멸당하게 된다(신사옥사). 결국 이런 과정에서 남인들은 거의 개발살이 나버렸고 경종이 즉위할 즈음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은 "실학"을 완성시키며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10], 균전론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
5 영정조 시대 - 복귀를 위한 근왕 노선
경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을 제거하려고 했고 결국 신임옥사로 노론을 작살내버리고 소론 정권을 세웠다. 그와 함께 소론 중에서도 준론과 관계가 깊었던 남인들도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결국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실각한 소론 준론(강경파)-남인의 주도로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난은 진압되었고, 반란군을 배신했던 전라감사 정사효가 훗날 다시 역모를 꾸몄으나 들통난 덕에 다시 초토화되었으며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에선 거의 집단 자결 수준으로 영조에 대들다가 궤멸된다. 이로서 영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고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 심지어 영남 출신 의병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서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된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영조에 의해 중용된 기호 남인의 채제공 등이었다[11].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남인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남인인 채제공 등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 벽파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일렀지만, 정조가 탕평파의 옛 수장 김재로와 아들 시파 김치인을 영상으로 중용하여 중재에 나서자 채제공과 남인 세력은 한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시전의 독점을 철폐한 신해통공이 그의 업적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섬으로 당시 조정의 절대다수였던 노론을 죄인으로 은글슬쩍 바꾸어 실각시킨 다음 남인 정권을 세울 궁리를 했고, 이는 여려차례 벌어진 "영남 만인소"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때문에 노론 벽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채제공이 죽을 때까 다 되었음에도 그의 후계자인 이가환 등은 이단 신봉자 등으로 낙인 찍혀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도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가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 복귀 후 재성장을 가로막은 결정적 원인이었다. 천주교와의 연관은 정조 시기엔 어느정도 용서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베드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남인은 대타격을 입었다.[12] 이후 벽파는 실각했으나, 시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노론을 제외한 당파들은 사실상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다만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야사와 같이 유성룡의 후손 등이 등용되었고, 이후로도 영남 세력은 대원군의 지지세력인 위정척사 세력이 되었다. 남인의 후예들은 후에 독립운동가로도 일부 이어지게 되었지만, 이미 세력으로서의 의미는 정조대에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6 남인의 역대 영수
6.1 탁남의 역대 영수
6.2 청남의 역대 영수
6.3 남인의 원로
6.4 영,정조 대
7 남인의 집권기간
-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숙청된 이후 유성룡, 김성일의 남인과 이산해, 정인홍의 북인을 망라한 범 동인 정권:정철 실각(1591)~임진왜란 발발(1592)
- 유성룡의 전시 내각:유성룡의 영의정 제수(1593)~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1598)[19]
- 허적의 탁남과 윤휴, 허목의 청남이 합쳐진 범 남인 내각: 갑인환국(1674)~경신환국(1680)
- 민암 내각: 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