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密豊君 李坦, 1698년 ~ 1729년
조선의 왕족.
2 생애
이름은 이탄(李坦),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소현세자 이왕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다. 경안군의 장남인 임창군 이혼의 장남이 밀풍군(密豊君)이다.
현종 때 경안군이 복권된 이후, 효종계의 왕들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래도 왕실에서 상당히 잘해주었다. 석견의 두 아들은 한 때 역모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실록에서 임창군 졸기에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석견의 장손인 밀풍군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사절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평온하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란의 주동세력이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한 것이 밀풍군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
사실 밀풍군의 위치가 정말 애매하긴 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자손들을 복권했으므로, 충분히 경종의 양자가 되어 세자가 될 수 있었다. 밀풍군은 경종과는 열 살, 영조와는 네 살 터울이었으며, 경종이 즉위한 1720년 당시 스물셋이었다. 그리고 결국 8년 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면서 "영조는 가짜고 밀풍군이 진정한 경종의 양자로 대를 이을 자손이다!"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는 것.
이인좌의 난이 종결된 후엔 자결하라는 명을 받았다. 서른 둘의 나이였다.
밀풍군은 자살했고, 그의 동생 밀운군(密雲軍) 훈(壎)마저 나중에 또다른 역모에 연루되면서 죽었다. 이 때가 소현세자계 후손들의 최대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3 복권
1864년(고종 1년 7월 11일 죄명 삭제,18일 관작회복)에 복권되었다. 철종 때 위기가 한번 있긴 했지만, 결국 끝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조선 왕들의 자비도 대단하다.
여담으로 밀풍군의 차남 상원군(商原君) 상대(尙大)는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지만, 후손이 없었기에 파양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