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군

(이석견에서 넘어옴)

1644~1665
慶安君
조선의 왕족.

1 개요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3남. 이름은 회(檜), 석견(石堅)은 초명이다.

2 생애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민회빈 강씨마저 1646년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별궁에 안치되었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반역죄 누명을 쓰고[1] 사약을 받아 죽는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셈.

이후 두 형 석철(당시 12세), 석린(당시 8세)과 함께 4세의 어린 나이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러나 석철은 결국 1648년 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 다행히도 그는 형제들과는 달리 살아남아 1650년 효종 즉위 때 강화도로 이배되었다가, 1656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의 형제들의 죽음에는 상당히 석연치않은 점이 있는데 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용골대가 소식을 듣곤 "소현의 아들들은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묻자 김자점이 기겁하여 "앓다가 어린 놈 둘이나 죽었는뎁쇼?"라고 대답했고 용골대는 "저런, 그럼 살아남은 큰아이는 우리가 청나라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습니다만?"이라고 요청하게 된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인조가 "나중에 청에 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아?"라고 벌벌 떨고 김자점은 "그냥 셋다 죽었다고 할 것을 내가 미쳤다고 이런 말실수를 해서..."라고 후회한다. 결국 청의 추궁을 무릅쓰고 셋다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여 용골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석철과 석린이 잇달아 죽은 것이다. 인조는 어떻게 둘이나 연달아 죽냐? 수상한데?라고 나인들을 국문하여 법석을 떨었지만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사촌이었던 현종은 그에게 꽤나 우호적이었으며,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당시 어의 이형익을 귀양보내며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59년 윤3월 4일 복권되어 경안군에 봉해졌다. 이젠 중요 종친으로 나름 행색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부인인 허씨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안군은 오랜 유배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 때문인지 6년 후인 1665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병상 생활이 길었던 탓인지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 경안군의 쾌유를 비는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했을 정도.#

3 후손

허씨와의 사이에서 임창군(臨昌君) 혼(焜), 임성군(臨城君) 엽(熀)이 있다. 이 둘은 숙종의 치세 초반인 1679년에 왕실의 종통(宗統)인 임창군과 임성군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는 흉서(凶書)가 세간에 나도는 바람에 제주도에 유배당한다. 그러나 대접은 좋았다고 하며 1684년에 풀려났고, 왕족으로서의 지위도 회복했다. 이인좌의 난으로 유명해진 밀풍군은 임창군의 장남이다. 경안군의 차남 임성군은 소현세자의 장남인 경선군 석철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가 없어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이 임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당대에 통용되던 유교적인 가치로 보자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실제로 그의 후손은 반란만 일어났다 하면 추대받는 바람에 여럿 죽어나갔다. 심지어 철종 대에도 그의 후손을 추대하려는 중인, 천민 중심의 역모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손을 보전해 끝까지 살아남은 잡초같은 집안의 조상이라 하겠다. 그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른 효종의 직계들이 점점 손이 귀해지다 결국 단절되어 버린것과 비교된다.[2] 아무튼 그렇게 살아남은 덕분에 고종 대에 이르러 이 집안은 완전히 복권되었다.

여담으로 그의 묘 근처엔 조선 왕족들의 묘가 많다. 근처에 태종와 원경왕후의 4남 성녕대군의 묘, 경혜공주와 그 남편 정종의 묘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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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노 - 아역배우인 김진우가 분했다. 한 일은 별일 없고, 그냥 울거나 귀엽게 보이면서 가만히 있는다. 가끔씩 귀여운 짓을 해서 여성들의 탄성이(…). 설화언년이와 같이 민폐이기는 하지만, 귀여움 버프 및 자신의 의도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안티는 없다. 애시당초 5살짜리 꼬맹이에게 안티가 생길리가 5살짜리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꼬마한테 민폐라고 불리는것도 예의가아니다 청 조정의 계략에 의해 청으로 빼돌려져 조선 정부를 압박, 견제하려는 음모(와 몇% 정도의 용골대 개인의 안쓰러움)에 의해 정치적으로 휘둘릴 것이 뻔히 눈에 보일 정도. 결국 드라마에선 인조가 석견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 꽃들의 전쟁 - 포커스가 소현세자의 장남인 경선군에게 맞춰지다 보니 철없는 어린 동생으로 나온다.
  1. 조정 대신들은 인조의 서슬에 눌려서 은혜를 베풀 것을 청하며 정작 중요한 점인 누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했다. 기껏해야 이시백 정도가 홍금적의를 입은 것은 부인의 성품으로 비단을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모죄란게 지극히 엄한 일인데 추정으로 사람 죽이면 씁니까? 라고 변호한 정도다. 그리고 김자점은 예, 강빈은 역적 맞습니다. 하는 꼴을 보니까 싹수가 노랗습디다.라고 인조의 궤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2. 임창군의 경우 아들이 밀풍군을 포함해 5명, 밀풍군은 5남4녀를 두었는데 이때문인지 살아남은듯하다. 반면 효종의 직계 후손들을 보면 대부분 아들이 1~2명, 3명이상 있다 해도 거의 요절하거나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으니 점점 손이 귀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