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중종반정, 인조반정에 뒤이어 제3의 반정이 될 뻔했던 사대부들의 거병

1 개요

1728년 조선시대 영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무신정변이 아니다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는 호칭도 있는데, 총대장인 이인좌는 초기에 진압당한 반면, 정희량이 이끄는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영조가 집권한 지 4년만에 일어나 영조에게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는 주장이 많으나, 그런 의의에서 나왔던 탕평책은 정작 이인좌의 난의 영향으로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평도 나온다. 하여튼 영조 집권기에 큰 영향을 끼친 난.

2 배경 및 반란 계획

경종 사후 세제(연잉군)가 영조로 즉위했을 때, 집권한 노론의 서슬에 밀려 소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밀려난 소론 세력들은 경종의 의문사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고,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조정을 엎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들어서서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고 소론들은 당황했으나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계속 반란을 추진하니 켠김에 반역까지 이게 영조 4년, 무신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이다.

계획은 삼남 지방인 충청도, 호남, 영남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 내의 동조세력이 호응한다, 경기군이 한양을 공격하는 동안 호남, 영남군이 북상하여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한양을 점령한다는 것. 왕위에는 소현세자의 자손인 밀풍군 이탄을 앉히기로 했다.

대원수로 뽑힌 이인좌는 윤휴의 손녀사위로 남인 명가의 출신이지만 관료에 진출할 수 없었던 인물로, 반란군에서 경기 지역의 군사를 맡았다. 사실 이인좌가 순전히 모든 반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주를 함락시키고 곧장 경기도로 진군하는 등 경기 지역에서 크게 항쟁했기 때문에 반란에는 이인좌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영남의 군대는 사족인 정희량(鄭希亮), 호남의 군대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맡았다. 군사는 돈을 주고 산 용병과 점령지의 관군을 회유하여 구성되었다. 원래 평안도에서 평안도관찰사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고 서울에서 총융사 김중기, 포도대장 남태징이 내응하기로 했지만 이광좌가 재빨리 이사성, 남태징을 체포하여 평안도와 서울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1728년 3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된 이인좌가 직접 밝힌 반란의 계획.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9번째기사 .

3 반란 경과

3.1 이인좌의 충청 방면군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했다. 장례행렬로 위장하고 관 안에 무기를 가득 숨겨 성안에 들어간 다음에 일시에 기습하여 삽시간에 점령해버렸다.

이 때의 충청병사는 이봉상(李鳳祥)이었는데 경계도 게을리하고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이봉상의 5대조 할아버지는 다름아닌 이순신. 그래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는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민공의 시호를 받고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이인좌가 충무공의 자손이라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세번이나 조상의 충의를 잊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반란군을 "개새끼"라 욕하며 당당하게 죽었다고 한다. 무능했지만 충성만은 확실히 한 셈. 여담으로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李弘茂) 역시 이때 반란군에 잡혔으나 절개를 지키다 죽어 역시 추증되었다. 더 재미난 것은 이인좌의 처조부는 윤휴로 서자였던 배다른 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이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란 호칭이 더 우위에 선다라는 말이 나올 지경(...)

청주를 점령한 이인좌는 서울로 북상하였다. 24일 안성에서 오명항의 토벌군과 마주했는데 토벌군이 직산으로 향했다는 오명항의 유언비어에 속아서 중앙군이 아니라 동네 읍병으로 오인하고 총공격을 명령했다가 각종 화포와 총기에 벌집이 되어 수백명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패주했다.[1][2] 이인좌는 산에 올라 농성했는데 오명항은 부대를 세갈래로 나눠서 습격하고자 깃발도 창검도 내리고 북소리도 내지 말 것을 지시했으나 휘하 장수들이 말을 듣지 않고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는 바람에(...) 이인좌 군대는 공략이 어려운 산꼭대기까지 이동한다. 이인좌는 술과 고기를 풀어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서 오명항이 공격을 개시하자 처참히 무너졌고 이인좌도 사로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한다.

3.2 박필현의 호남 방면군

호남의 반란군는 원래 내응을 약속한 전라감사 정사효가 배신해서 제대로 봉기도 해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박필현은 읍병을 훈련하여 전주성으로 진군했는데 원래대로 하자면 정사효가 문을 열고 박필현을 맞아들여서 한패가 되어야 했지만 정사효는 이인좌의 끔살 소식을 듣고 박필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박필현은 경상도까지 달아났다가 붙잡혔고 서울로 보내 국문을 받게 해달라고 애걸했으나 코렁탕 더 당하시려고? 참수당한다. 그의 종형인 박필몽도 유배지를 탈출하여 합세하려다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당한다. 한편 정사효는 배신한 게 못내 미안했는지 세월이 흐른 뒤 남인과 소론준론을 규합해서 다시 한번 역모를 꾀했으나 발각되는 바람에 끔살당한다.(...)

평안도와 서울내에서의 내응도 미연에 방지되고 말았다.

3.3 정희량의 영남 방면군

수천에 불과했던 다른지방 방면군에 비해서 안음(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일어난 영남방면군은 7만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러 주와 군을 손쉽게 점령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경내로 진출하여 연결로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관군의 압박으로 이는 무산되었다. 다른 지방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최후까지 버티던 영남의 군세는 거창, 합천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안동, 상주에서 저지되었으며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 관군에게 토벌당했다. 거창에서 체포당한 정희량도 당연히 목이 달아났다. 우습게도 이인좌의 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제일 많은 고을을 점령하고 제일 오래 버틴 건 경상도의 정희량이었다. 하지만 이인좌가 총대장이었고 서울 지근까지 진군했으니 딱히 틀린 표현이라곤 할 수 없다.

3.4 진압

영조는 최규서로부터 반역소식을 듣고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파견하였다. 반군의 기세에 지방군이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자 [3] 오군영 소속 정예병력을 투입해 3개월만에 반군을 격파했다.

4 결말

거병의 빠른 진압에는 그 전 해(1727년)의 정미환국을 통해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이 대거 기용된 덕이 크다. 이미 반란은 이전부터 준비 중이었는데 김을 빼놓은 격. 왕이 다시금 자신들을 중용했는데, 뭐하러 극단적인 수인 반란에 합류를 하겠는가? 심지어 반란을 고변한 사람부터가 소론의 원로대신 최규서였다. 진압군의 면면도 오명항, 박문수(종사관), 조현명 등 소론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영조부터 나서서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해라"라고 했을 정도니...영조가 정미환국으로 완론 정권을 세워주었음에도 반란은 삼남과 평안도, 서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초대규모였으나 호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과 평안도 지역 반란군은 봉기 전에 수뇌부가 체포당함으로써 제압되었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의 반란군도 각개 격파당한다. 영조의 정미환국이 참으로 절묘했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 만약 정미환국이 없었더라면 완론들도 준론과 합세했을테니 반란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 박문수는 경상도 관찰사로 민심을 수습했고 삼남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남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정계에서는 재능에 비해, 그리고 영조의 신임에 비해 노론의 서슬에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반란을 진압한 영웅이었던 오명항도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가 능지처참당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밀풍군 이탄 자신은 반군과는 전혀 연결이 없었지만, 반란군들이 왕위로 올리려 한 탓에 옥에 갇혔다가 신하들의 사사하라는 상소에 못 이긴 영조의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자살했다.(...)

여담으로 이인좌는 산에 있는 절로 달아나다가 신길만이라는 죽산에 살던 농민에게 잡혔는데 신길만은 그 공으로 일천냥의 은과 2품 관직을 받는다. 우와아아앙, 인생은 한방이다?

5 반역향이 된 영남

영남 지방은 반란을 일으킨 삼남 지방 중에서도 가장 진압하기 어려웠던 탓에 흥선대원군의 복권 이전까지 세도정치 시기 내내 반역향(反逆鄕) 이미지가 붙었다. 봉기 자체는 삼남 지방 모두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삼남 지방 모두가 당시 조정에 대해 달갑지 않은 인식이었다는 점을 나타내지만, 맥없이 깨진 타 지방들에 비해 영남의 항전은 거셌으며 남인의 거점인 영남을 경계삼을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4] 여담으로 사도세자는 이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영조는 아예 '영남을 평정했다'라는 뜻의 비인 평영남비(平嶺南碑)를 대구 입구에 박아버렸다. 이후에는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일 직후에 철거되었다.

잘못 알려진 낭설 중 하나로, 안동 김씨(정확히는 장동 김문)이 집권해서 반역향 이미지가 걷혀진 것도 아니다. 60년이 지나 도로 무신년이 된 정조 때의 영남만인소로 그나마 회복된 것.

좀더 일찍 해결될 수도 있었다. 영조 14년에, 노론은 안동김상헌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영조 대의 신안동김씨(장동김씨)는 척화 주전론을 외친 김상헌을 필두로 이후의 4대손 안에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김수항, 김창집, 김수흥 등을 배출해낸 이력이 있는 노론 최대의 명문 집안이었다. 청음 김상헌의 출신지과 은퇴지는 안동 소산이라 명분은 충분했고,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兪拓基), 안동부사 어유룡(魚有龍), 안택준(安宅駿), 김창적(金昌迪) 등이 안동의 강씨‧신씨‧안씨문중 등의 영남의 노론세력과 손잡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인 영남 남인들은 결사 반대에 나서 안동에 들어설 서원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안동에 거물급 노론 서원이 들어설 경우, 안동의 향권은 물론이고 남인들의 세력 근거지가 노론의 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익하(鄭益河) 감사는 귀정록(歸正錄)을 만들어 안동 유림이 노론으로 돌아설 것을 종용하고, 이어서 조영복(趙榮福) 감사도 갖은 방법으로 설득에 나섰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앙의 노론당에 보낸 편지는 묘하다. “그물을 낙동강에 던졌더니 종일 소득이 미꾸라지 몇 마리 뿐이요. 천김(川金)은 쟁쟁하고 하류(河柳)는 청청하다”. 여기서 천김은 천전(내앞) 김씨를 이름이요 하류는 하회 유씨를 가리키는데 노론은 미꾸라지에 비유하며 한탄한 것이다. [5]

영남 유림들이 백기를 들고 노론으로 투항하였다면 중앙정계로의 길은 열렸겠지만, 조선은 학풍과 가문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변절적 선택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가 즉위한 후에야 영남지역에 대한 재등용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한 재위 16년이던, 179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도산별과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전란이 아닌 시기에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치뤄진 유일한 대과(大科) 시험 이었다. 7200명의 경상도 유생들이 입장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3000개의 답안지가 제출되어 정조가 채점하였고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을 1,2등으로 급제 시켰다.

정조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에는 왕명을 내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과, 채제공의 양아들인 채홍원에게 영남인물고 [6] 라는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정약용이 지은 책의 서문이 남아 있다.

“영남(嶺南)은 옛 신라국(新羅國)이다. 장백산맥(長白山脈)이 오대산(五臺山)을 거쳐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신라의 진산(鎭山)이 되고, 서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주흘산(主屹山)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되어 그치면서 신라의 병폐(屛蔽 병풍처럼 감싸서 막음)가 되었다. 황수(潢水)가 태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그것이 또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모든 역내(域內)의 물이 바퀴살통처럼 모이고 힘줄처럼 모여서 하나로 합친다.

이 때문에 그 산천(山川)의 풍기(風氣)가 기타 다른 도(道)와는 전혀 다르고 그 인물은 영걸(英傑)하고 특출(特出)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는 튼튼하게 하였고 곱고 화려함은 좋아하지 않았다. 국가에 중대한 의논이 있을 적마다 온 나라가 그들의 의견에 이의가 없이 하나로 귀착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일이 없다. 회재(晦齋.이언적),퇴계(退溪.이황) 등 여러 선생이 나신 이후로 선비들이 모두 예의(禮義)를 숭상하였으므로 성질이 못된 자가 있기는 하여도 공손하게 예모(禮貌)를 차리는 모습은 모두 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주상 즉위 22년(1798년)에 명하여 영남(嶺南)의 모든 이름난 사람의 언행(言行)과 사적을 가져다가 뽑아 모아 책을 만들게 하였는데, 채문숙(蔡文肅.채제공)이 총재(總裁)가 되고 중씨(仲氏.다산의 형 丁若銓)와 한혜보(韓徯甫.한치응) 등이 이 일을 관장하였다.

그 이듬해에 내가 곡산(谷山)에서 돌아오니(곡산부사를 마치고), 중씨가 그 초고(草稿)를 내어놓고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불과 수백 년 동안에 한 지방의 어진이가 이처럼 많으며, 그 행실이 뛰어나고 덕의(德義)가 높은 사람으로 믿을 만하고 사적이 뚜렷한 자가 이처럼 혁혁하단 말인가. 그대는 그러한 까닭을 아는가. 가르침에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대(三代. 즉 夏殷周) 이후로 학교의 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백성은 모두 저대로 나서 저대로 자랐다. 지혜로운 자는 혹 스스로 깨달아서 그 혈기(血氣)의 병통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자는 자포자기하여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마치었으니, 이 점이 특출난 인물이 성긴 까닭이다. 영남은 그렇지 않아서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가숙(家塾)으로 알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여겨 떼를 지어 놀고 무리지어 익힘으로써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재질(材質)이 참으로 좋다면 어찌 이와같이 성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서문(序文)으로 삼는다"
그동안 지역을 겨냥해 인물들의 충의와 절의를 기리는 책들은 왕명으로 간혹 간행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특정지역의 인물사전을 편찬하라고 한 것은 집권층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먼 훗날 당파성이 약해진 1870년대에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남인 등용에 반대하는 노론 인사들의 상소문과 1930년 윤치호의 기록 (노론 후손들은 110년이 지난 지금도 정약용의 책은 절대로 보지 않는다.)을 살펴봐도 정조의 이런 행보가 당사자들에게 주었을 충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조는 치세말기로 갈수록 영남지역에 대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1799년에 영남인물고가 완성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함으로써 영남지역의 중앙정계로의 재진출은 다시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미뤄지게 된다.

6 소론, 남인의 몰락과 노론 일당체제의 공고화

이 결과 소론 준론(강경파)가 박살나면서 명목상 한패인 소론들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잔당들이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가 그때마다 족족 발각되면서 소론 준론들은 그야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온건파인 소론 완론이 소수 남인과 함께 정계에 머물렀지만 노론의 세력이 훨씬 더 커서 힘을 쓰진 못했다.

덧붙여 영조가 탕평책을 썼다고는 해도 소론은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치달았으며, 이후 준론의 지속적인 반역과 영조 모욕시도로 그나마 출사한 소론 완론들도 힘을 잃으며 노론의 집권은 한층 굳건해진다. 두개의 당이 있는데 한쪽 당이 자폭을 하니 다른 한쪽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밖에. 영조 때의 탕평책이 정조에 비해 무게중심이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는 건전한 붕당의 붕괴를 초래했고[7] 결국 척신정치로 이어졌으며 곧 세도정치가 되었으니 조선 후기의 비극이 여기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강한 탕평책을 썼다지만 붕당의 힘의 균형은 이미 이인좌의 난 실패로 인해 와장창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을 진압한 게 소론 완론이고 오명항, 박문수, 조현명, 조재호, 송인명 등의 소론 대신들이 건재하였으나 이인좌의 난의 잔여 세력인 박세만, 주노미, 권첨, 위에 언급된 배신자 정사효가 남인 세력을 대거 끌어들여서 난을 일으키려다 그들이 회유한 최필웅이란 전직 내시고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개발살났다. 특히 정사효는 자신의 처가까지 죄다 끌어들인 통에 목이 잘린 사람만 수십명에 달했다.

영조 24년에는 두 차례나 실패하고도 질기게 살아남은 무신년 세력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난을 꾀하다 또 걸려서 박살났고 모조리 처형당했다. 영조 31년에는 무신년의 가담자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나주로 유배를 갔다가 괘서[8]를 돌린 나주괘서사건이 터졌고 이 때문에 소론과 남인 수십명이 처형된다.

이 시점에서 소론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조현명, 송인명 등도 다 죽고 없는 터라 중량감 있는 대신도 없는 소론은 자신들을 방어하기도 어려웠고 이 틈을 타서 노론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영조도 이에 부응하여 이광좌의 직첩을 거두고 유봉휘, 조태구 등을 역률로 추죄했으며 김일경과 목호룡의 일가, 무신년 주모자들의 살아남은 일가들까지 죄다 끌고 와서 처형하는 등 소론을 국가 공인 반역집단으로 낙인찍어버렸다.

그런데 나주 괘서 사건이 정리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서 심정연 등 살아남은 소론 준론이 영조가 직접 참관한 과거 시험에서 영조는 독살범에 왕위 찬탈자다! 라고 답안지에 적어 내는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그걸 보고 엉엉 울다가 폭발하여 날뛰는 등 거의 반쯤 미친 것 같았다고 실록에 적혀 있으며 결국 살아남은 마지막 소론 준론들까지 죄다 처형당했다.다죽네 이때 심정연과 한 패인 신치운[9]이 박문수가 한패라고 주장했다. 영조가 믿지 않고 오히려 박문수를 불러 위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죄책감을 느껴 정치에서 은퇴해버렸다.

영조 31년에 죽은 소론, 남인만 200명이 넘었으니, 소론 준론이 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후 소론이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완론 계열로 채워진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남인 또한 마찬가지로 세력이 위축되어버려 이전과 같은 정치당파로써의 모습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7 관련 항목

  1. 여담이지만 이때 오명항은 이인좌군이 당연히 돌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에게 그냥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모든 화기를 방포하라고 지시만 해놓고 들어가서 이불깔고 누워서 잤다(…).
  2. 당시 이인좌군은 조총은 물론이고 청주성에서 노획한 대포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하필이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반면 토벌군은 우천장비를 충실히 갖추고 있었기에 비에 상관없이 화기 사용이 가능했다.
  3. 지방군의 주력을 이루던 속오군은 외국의 정규군은 물론이고 반군도 진압하지 못할만큼 훈련도가 낮았다.
  4. 물론 흔히 알려져 있듯이 정여립의 난(선조) 당시 서인들에게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찍혔고 이시애의 난(세조) 때 함경도가, 홍경래의 난(순조) 때 평안도도 반역향으로 찍혔다. 그런데 북쪽 지방의 경우는 개국 때부터 워낙 차별을 많이 받아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다. 홍경래의 난 때부터 '고조선의 수도이자 고구려의 수도였는데 왜 과거도 제대로 못 침?'이 명분이었으니 말 다했다.결국 수도권빼놓곤 모두 반역향경기도,충청도,강원도는 반역향같은거 없었지
  5. 천전 김씨는 학봉 김성일, 하회 유씨는 서애 류성룡을 뜻하는데 이 두사람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그들의 후손들은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명문이다.
  6. 17권으로 이루어 졌으며 조선 초기부터 경상도의 각 고읍 별 541명의 인물에 대한 언행과 사적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일제시대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해 가는 바람에 소실될 뻔 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2011년에야 겨우 반환되었다.
  7. 엄밀히 말하자면 숙종 때 환국으로 이미 망가져 있었지만.
  8. 掛書. 대자보. 익명으로 유언비어나 흉한 말을 적어 내건 글. '괴서'가 아니다!
  9. 영조 보고 난 갑진년(영조 즉위해인 1724년)부터 게장을 안 먹었다! 라고 개긴 양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