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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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래에셋 회장.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린 개척자.

2 생애

2.1 유년~고교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1]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사꾼이었는데, 혼례식 날 이웃사람의 양복과 구두를 빌려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아버지는 박회장이 태어날 즈음에는 제법 큰 농사를 짓는 중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74년 광주제일고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던 날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문에 삶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의사를 염두에 두고 이과를 선택했다. 1977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의 꼴등으로 졸업하였다. [2] 고교 시절에는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었다. 읽다 보니 전략을 다룬 책에 유난히 끌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케네디 자서전, 키신저 자서전 같은 것들은 대여섯 번씩 거푸 읽었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였고, 재수를 하던 중 "어떤 조직을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져서 문과로 전향했다. 1978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2.2 대학

경영학과복수전공했고, 1983년 졸업했다. 포털 인물검색 프로필을 비롯한 언론엔 대부분 경영학과라고 나오지만, 이 기사의 맨 밑에서 세번째 문단 이 링크 기사에서도 나오듯이 교육학과 출신이면서도 포털 프로필에 교육학과는 언급도 안되며 마치 경영대 출신인 것처럼 나오고 기부도 경영대한테만 해서 고대 교육학과 동기들이 섭섭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고위경영자과정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AMP과정도 수료했다.

대학시절 상당한 독서가였다고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고교 선배가 고려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거기에 찬조연설을 한 것이 상당히 화제가 됐다고 한다. 후보연설보다 더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다 포커 같은 걸 치면 승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두뇌 게임이나 심리 게임에 능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리더십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경영학 이외의 책도 많이 읽었는데, ‘제3의 물결’이 가장 마음에 들어 무려 19번을 읽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며 주식투자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취지로 1년 학비·생활비를 한 몫에 부쳐주셨는데, 그걸 가지고 직접 투자에 나선 것이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증권가에서 제법 유명세를 얻을 정도로 주식투자를 잘 했다. 젊은 청년이 놀라운 수익을 올리는 데다 시장 예측도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3]

그 시절 명동 사채 시장의 대모 ‘백할머니(본명 백희엽, 1995년 5월 사망)’를 찾아갔다. 1960년대 말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한 백할머니는 주가조작이 만연한 당시에도 우량주 중심의 장기 투자로 큰 수익을 올려 ‘투자 철학을 지닌 큰 손’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는데, 그녀의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 때 동행하기도 했다. 가만 보니 그녀는 정석 투자만 하고,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기업, 내용이 좋은 기업 주식만 사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렸다 시장이 흥분하면 비로소 팔았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우량주는 반드시 제 몫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한다.

1984년, 사설 투자자문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4] 이 시기에는 대학원생이었다. 그 동안 증권 투자를 통해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여직원도 한 명 두었다. 26세 때의 일이다.

2.3 증권사 직원 시절

시장분석을 배우기 위해 1986년 무작정 동양증권에 찾아가 영업부에 입사했다. 다른 증권사에서도 대리 과장 정도를 주고 박현주를 스카웃하려 했지만, 동양증권에는 이승배라는 유명 투자가가 상무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3일쯤 쫓겨났지만 계속 찾아간 끝에 박현주는 이승배 상무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승배는 처음 입사하면서 대리 과장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쫓아냈다. 그러자 다음날 박현주가 다시 찾아와서 "사원으로 뽑아주되 상무님 정면에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했다.

입사 45일만에 대리가 되었다.

이승배 : “3개월 딱 시켜보니 다르더군요. 그 때는 감이나 루머에 따라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분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어요. 이 아이는 분명 스타가 될 거다, 확신이 왔습니다. 저런 친구는 빨리빨리 업계 리더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발령을 냈죠.”

동양증권 영업부는 당시 최초로 전국 약정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중 4분의 1을 박현주가 했다. 그 때 영업부 직원 수가 70명이었다. 혼자서 16인분을 한 셈이니 금새 유명해졌다.

1988년 이승배씨가 동양증권을 그만두자, 동원증권 전무를 찾아가 실적을 설명하면서 과장 자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전무는 증권가의 보수적 분위기상 30살짜리가 과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동원투신 (투자자문사) 창립멤버로 발령냈다. 그러던 와중 동원증권 임원 한 사람에 의해 주식운용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1년에는 33세에 중앙지점 지점장을 맡았다. (당시 국내 최연소 지점장이었다.) 25명을 거느린 간부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1993년에는 당시 연봉 10억원에 외국계 증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 당시 박현주 연봉은 본봉 1억 5천만원에 성과급 3~5억 수준이었다. 2배로 수입이 뛰는 셈이었지만, 외국계 증권사에 가면 창업자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고심 끝에 거절했다.
1994년에는 압구정지점 지점장을 맡았다.
1995년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이사로 승진했다. (최연소)

2.4 기업가 시절

1997년 6월 동원증권에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세칭 ‘박현주 사단’과 함께 갑작스레 퇴사했다.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했다. 이어서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세웠다. 2001년부터 미래에셋 그룹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증권맨으로서 최고의 신화를 기록했다 할 만큼 말 그대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2013년 당시 총 자산은 1조2천650억원으로 2013년 ‘1조 클럽’ 자수성가형 6명 중 한 명이다. 2009년 그의 미래에셋 글로벌성장 스토리가 하버드 대학교 MBA의 ‘국제 기업가정신’ 강의교재로 채택됐다.

3 업적

막강한 추진력으로 미래에셋을 자산운용회사, 보험회사, 캐피털회사 등 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글로벌 금융그룹으로 일궈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세 걸음 앞선 미래 분석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놀라운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코스닥 열풍이 몰아치기 2년여 전, 일찌감치 벤처기업에 눈을 돌려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1998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를 도입해 주식시장에 간접투자 돌풍을 일으켰다.[5]

1999년 12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면서는 업계의 비난과 우려를 뚫고 파격적인 위탁수수료 인하를 단행, 단숨에 약정 순위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2000년 3월에는 개인 성과급 75억원을 쾌척, ‘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그런데 그 재단에 재단이사장은 물론 이사진에도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재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박현주재단은 매년 해외교환장학생을 선발해 등록금, 체재비, 항공료를 지원하고 있다.

4 사건/사고

2011년 미래에셋 주식형 펀드가 10조 원 넘게 줄었다. 전체 주식형펀드 감소액(15조여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주식형펀드(액티브일반)의 연간 수익률도 마이너스 16.11%로 곤두박질쳤다. 48개 자산운용사 중 43위였다. 미래에셋은 2012년 일간지 광고를 통해 공개사과했으나 펀드투자자들은 아무런 조치 없이 화만 돋군 생색내기용 사과멘트였다고 비판했다.

5 평가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이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많이 고민하지만 일단 마음을 굳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전속결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독서를 통해 증권시장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키웠다고 한다. 스스로 무질서한 상황에 노출시켜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의 회사도 늘 글로벌 시장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주력회사 주식의 20% 이상을 직원들에게 나눠줘서 주목을 받았다. 2011년과 2012년에 이어 2013년 6월 배당금 전액인 34억3000만 원을 기부했다

그의 회사가 2012년 한 해에만 사회공헌활동에 사용한 금액은 약 85억 6000만원에 달한다. 미래에셋 전 임원들은 매달 급여의 ‘1%’를 기부하는 ‘미래에셋 1% 희망나눔’에 동참하고 있다. 대한민국 기부문화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부하로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했다.

  • 배울 점이 많았다.
  • 적극적이었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자신이 먼저 치고 나가며 직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형이다.
  • 부하들이 10시 11시까지 야근을 해야 했지만 1등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불만이 없었다.
  • 업무 외의 공부를 많이 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 회의 때도 보면 자기 의견을 먼저 말하기 보다 직원들 얘기부터 들었다.
  • 회사에서 개인 실적에 따라 포상금을 주면 혼자 갖지 않고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모든 직원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 언변이 좋고 설득력이 뛰어나서, 영업을 나가도 상대를 잘 설득하고 임원을 만나도 잘 설득했다.
  • 부하들에게 정보를 잘 공유했다. 지점장쯤 되면 그런 말을 절대 안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부하를 매우 배려하는 태도를 취했다.
  • 시류 분석과 기회 포착이 탁월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시장 침체가 예상되면 직원과 고객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영업을 줄여버린다. 고객에게 "지금은 위험하니 나중에 투자하세요"라면서 다시 떠밀어 내보낸다. 일반적인 증권사 지점장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6 가족관계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사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정확했다. 부인 김미경과 결혼해 하민, 은민, 준범을 1남 2녀로 두고 있다. 부인은 6살 연하이고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으로 박 회장과는 연애 결혼했다. 김씨가 박 회장을 부모님께 소개했을 때 장인과 장모는 박 회장이 증권회사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은행이 최고 직장이었고, 증권사는 ‘한탕주의가 판치는 곳’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처음 본 김씨 아버지에게 향후 증권업의 발전 방향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달변으로 ‘사활을 건 브리핑’을 해 가까스로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고 한다.

은퇴 뒤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길 예정이라고 말했으며, 박현주는 2세 경영설을 부정하고 있다.

장녀 박하민 (1989)은 미국 코넬 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사학과를 졸업한 뒤 맥킨지 서울사무소에서 1년, 해외부동산 투자컨설팅회사인 CBRE에서 1년 일했다. 2013년 8월 장녀 하민 씨가 미래에셋운용 홍콩법인 해외부동산투자본부에 입사했다.

차녀 박은민(1992)씨는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유학 후 컨설팅펌 BCG 한국지사에서 일했다.

장남인 박준범(1993)씨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에서 유학했다.

7 어록

“특별히 음식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닌데 1인당 밥값이 10만원을 훌쩍 넘는 호텔들은 우리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지금같이 어려운 때 서민들이 가는 대중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서로 상생하는 방법이다” (2012/10/31, 그룹 임원들에게 대중음식점 이용을 독려하며)

“지난해 고객자산 보호에 무게를 둔 전략을 펼쳤지만 만족할 만한 수익을 못 드렸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자산 다각화 포트폴리오로 지혜롭게 투자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2012/01/02, 주요 일간지의 미래에셋그룹 광고에서)

“2013년 한국 가계의 자산 비중에서 보험과 연금이 처음으로 은행 정기예금을 추월했다. IT에서는 융합, 컨버전스가 모바일 디바이스였듯이 향후 금융의 컨버전스는 연금이 될 것이다” (2014/01/02, 신년사에서 연금시장 경쟁우위 확보를 당부하며)

“나는 조직과 관련해 CEO가 하는 일은 점을 찍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을 찍는다는 것은 좋은 사람을 골라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다시 점을 찍고 그 점이 모여 선이 되면서 조직의 체계가 생긴다. 이렇듯 아메바가 확장하는 것처럼 점을 찍고 점이 만나 선이 그려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면이 만들어진다.” (2007/08,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186p~187p)

8 부동산덕후(?)

국내에는 주식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알게 모르게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많다. 본인은 여러 투자수단으로 분산하는 차원에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수집한 부동산 목록은 그야말로...ㅎㄷㄷ 거의 부루마블 실제판 수준. 외국에서는 부동산투자로 더 유명하다카더라....

<년도별 투자목록>


2006년 상하이 미래에셋타워(평가익만 1조 이상으로 본다)
(2008년 부동산 114 인수)
2011년 서울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2012년
상파울루 파리아리마4400빌딩
상파울루 호샤베라타워

2013년
시드니 포시즌즈호텔
시카고 225 west wacker
워싱턴 Mstreet2250

2014년
판교 코트야드호텔
워싱턴 Kstreet1801(무려 연준이 입주해있음)
워싱턴 Kstreet1750
하와이 페어몬트 오키드호텔

2015년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서울 광화문 포시즌즈호텔(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결한 그곳)
페덱스 물류센터
쾰른 Mantelbebauung(쾰른 시청사로 알려짐)

2016년
하와이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호텔
하노이 랜드마크72 빌딩(경남기업이 이거하다 망했다)
시애틀 Amazon HQ phase(아마존 본사)

이거 뭐야 무서워...
  1.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2. 동기가 760명이고 운동부가 60여명이었는데 698등으로 졸업했다.
  3. 그의 친구인 김재영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광판이 온통 파란색(폭락장세)인 날이 있었는데 현주는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 ‘사자’ 주문을 냈고, 결국 며칠 사이에 큰 이문을 남겼습니다. 평소 현주가 자주 하는 말이 ‘돈을 벌려면 소수 편에 서라’는 것인데 20대 중반에 이미 그 원리를 체득한 거죠.”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3/nd2002030210.html
  4. 이 시기에는 투자자문사 관련 법령이 없었다.
  5. 이처럼 미래에셋그룹에는 유독 ‘최초 리스트’가 많은데 ‘도전을 통한 성장’이라는 박현주의 성장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