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봉사건

反奉事件반봉과는 상관이 없다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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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봉사건의 주역인 궈쑹링.

반봉사건은 1925년 11월 23일 펑위샹과 대치하고 있던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곽송령 郭松齡)이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동북국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관동군의 도움을 받은 장쭤린에게 진압된 사건을 말한다. 흔히 궈쑹링의 반란이라고 한다. 궈쑹링이 자신의 부대를 국민군으로 일컬었기 때문에 국민군-봉천군벌 사이의 전쟁이란 뜻으로 국봉전쟁이란 용어도 쓰인다.

2 배경

2.1 반봉전쟁

1916년 위안스카이의 칭제와 사망 이후 중국 각지는 지방마다 거병한 군벌들에게 장악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이중 만주를 위시로 한 동북 지역은 봉천군벌 장쭤린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 장쭤린은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2차례의 직봉전쟁을 일으켜 직계의 우페이푸와 충돌했다. 1차 직봉전쟁에선 장쭤린이 패했으나 2차 직봉전쟁에선 장쭤린이 근대화를 통해 훨씬 강화된 군사력으로 우페이푸를 격퇴했고 우페이푸의 정통성을 제공해주던 북양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우페이푸의 부하인 펑위샹을 매수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켰고, 이는 우페이푸가 수립한 차오쿤 정권이 무너지고 장쭤린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쭤린을 도운 펑위샹은 장쭤린에게 배신당하여 서북 지역으로 밀려난 후였고 이후 장쭤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천파의 갑작스러운 확장은 여러 군벌들의 불만을 샀다. 1925년 10월 16일 절강독판으로 저장 성을 지배하던 군벌 쑨촨팡이 봉천파에 전쟁을 선포, 남방으로 밀려난 우페이푸가 가세하면서 저장, 장쑤, 장시, 안후이, 푸젠의 군벌들이 오성연군을 조직하여 장쭤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반봉전쟁이라 한다. 이때 쑨촨팡 등은 펑위샹을 자신의 연합에 끌어들이려 했고 장쭤린도 펑위샹의 개입을 경계하여 장세량과 궈쑹링을 산해관, 톈진에 급파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반제국주의 내셔널리즘이 끓어오르던 시절로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5.30운동을 바탕으로 조계회수운동 등이 벌어지며 열강에 침탈당하던 중국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민중과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거센 시점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군벌들 역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궈쑹링은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2 궈쑹링, 그는 누구인가

이쯤되면 이 문서의 주인공인 궈쑹링이 누구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궈쑹링은 1888년 펑톈 동쪽 교외에서 태어나 1905년 봉천육군소학당에 들어갔고 1906년 봉천육군속성학당에 진학, 1907년에 졸업했다. 이후 상관 주칭란(주경란, 朱慶瀾)의 영향으로 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궈쑹링은 신해혁명에 동참했고 주칭란을 사천군정부 부도독으로 옹립하고 쓰촨의 독립을 꾀했으나 주칭란은 얼마 안가서 쓰촨에서 축출되었고 궈쑹린도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그는 펑톈에서도 혁명활동을 기획했으나 장쭤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처형은 면하고 석방되었다. 1912년 북경장교연구소에 들어가서 공부했고 봉천도독부 참모로 잠시 근무하다가 북경중국육군대학에 입학, 1916년에 졸업하여 베이징에서 강무당 교관으로 일했다. 1917년 쑨원이 광저우 정부를 세우자 이에 동참했으나 1918년 광저우 정부가 무너지고 쑨원이 상하이로 떠나자 다시 펑톈으로 돌아왔다.

그는 육군대학 동기인 펑화(奉華)의 추천으로 장쭤린 밑에 들어가게 되었고 1919년 장쭤린이 세운 동삼성육군강무당의 전술장교가 되었다. 이때 그가 포병과에서 가르친 제자가 장쉐량이다. 장쉐량은 강무당 졸업 이후 스승인 궈쑹린을 참모장으로 추천하였고 1920년에 벌어진 직환전쟁에서 궈쑹링은 선봉사령으로 주력을 이끌고 톈진에서 크게 이겼다. 또한 지린과 헤이룽장의 비적을 소탕하는 한편 엄격한 군율과 병사들과 동고동락한 모습을 보여서 병사들의 인기를 얻었고 장쭤린의 신임도 더해갔다.

1922년의 1차 직봉전쟁에서도 궈쑹링이 지휘하던 8여(旅, 여단에 해당되는 중국식 편제.)만이 장쉐량이 지휘하던 3여와 더불어 싸움다운 싸움을 했었다. 1차 직봉전쟁 이후 봉천군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작업을 하던 장쭤린은 궈쑹린에게 육군정리처 대리참모장 자리를 주어 핵심 사무를 맡겼고 궈쑹링은 봉군의 인사권을 사실상 전담하는 막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장쉐량도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여기까지는 장쭤린의 심복의 출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2.3 봉천군벌 내부의 파벌 갈등

당시 봉천군엔 크게 세개의 파벌이 있었다. 장쭤린, 장칭후이, 장쭤상을 비롯한 구파, 일본 육사 출신의 사관파, 육군대학과 보정군관학교 출신의 육대파였다. 궈쑹링은 중하급 간부들로 구성된 육대파의 우두머리로 양위팅(양우정 楊宇霆)이 이끄는 사관파와의 충돌이 심했다. 궈쑹링은 일찍이 1919년에 참모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양위팅을 부도덕한 인물이라 비판하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1922년 1차 직봉전쟁 이후 양위팅의 관내진출 전략에 맞서 동북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차 직봉전쟁 때 궈쑹링이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면서부터 완전히 틀어졌다. 궈쑹링은 장쑤나 안후이 성의 독판 자리를 원했으나 양위팅이 그 자리를 자신의 파벌에게 주기 위해 저지하면서 둘은 크게 충돌했다.

자신이 원했던 장쑤 독판에 양위팅이 앉는 것을 본 궈쑹링은 격분해서 일본 육군의 훈련을 참관한단 이유로 1925년 9월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리기도 했다. 10월에 쑨촨팡이 반봉전쟁을 일으키자 장쉐량은 급히 궈쑹링에게 귀국을 종용했으나 궈쑹링은 지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이에 장쉐량은 궈쑹링을 형이라 부르며 대국적으로 생각하여 부디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친필 편지를 보냈고 관내에 진출한 봉천군의 지휘권을 궈쑹링에게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하였다. 이에 궈쑹린은 귀국에 응하여 돌아왔다. 그런데 궈쑹링은 이미 귀국 시점에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말은 이렇다. 1925년 10월 궈쑹링이 도쿄의 제국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일본 참모본부에서 사람을 파견, 밀약을 조인하기 위해 대표로 온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던 궈쑹링은 크게 놀라 일본측에서 언급한 '밀약'의 존재에 대해 조사해보았고 그 결과 장쭤린과 일본이 맺은 21개조 밀약을 알게 되었다. 장쭤린은 이를 조인하기 위해 대표를 일본에 파견하겠다고 통보했는데 사적인 임무로 도쿄로 온 궈쑹링이 대표로 오해받은 것이다. 궈쑹링은 제국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를 만나 장쭤린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인민을 저버리고 나라를 팔려고 한다고 장쭤린을 성토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펑위샹이 장쭤린을 친다면 자신도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펑위샹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그는 장쉐량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신이 장쭤린에 대항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심정이라고 알렸다.

다만 앞서 서술한 이 '전말'에 대해서 끝내 궈쑹링이 장쭤린의 21개조 밀약의 존재에 대해 알았는지, 당시 실제로 밀약이 맺어졌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펑위샹 등이 그렇게 들었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궈쑹링이 귀국 길에 오를 때 그가 구체적 반란 계획을 세웠는지까진 알 수 없으나 장쭤린, 양위팅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고 모종의 결심을 했던 것까진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3 전개

3.1 남방의 위기와 펑위샹과의 대립

반봉전쟁의 시작으로 장쭤린은 10월 16일 상하이, 19일 난징, 11월 8일 쑤저우를 잃었고 2차 직봉전쟁으로 얻은 남방 영토를 대부분 잃었다. 양위팅은 펑위샹을 쳐서 북방을 안정시킨 다음에 쑨촨팡을 밀어내고 남방을 되찾자고 주장했고 동북군은 6개 방면군으로 개편되었다. 궈쑹린은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7만명의 병력을 인솔하게 되었으나 그는 펑위샹과의 싸움을 반대하고 그와 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펑위샹 역시 우페이푸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쭤린과의 협상에 응해 잠시 평화협상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결국 영토 문제로 결렬되고 양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장쭤린은 펑위샹을 압박하기 위해 궈쑹링에게 펑위샹의 국민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가 있으나 궈쑹링은 보경안민을 내세우며 이를 거부했고 장쉐량에게 펑위샹과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궈쑹링은 장쭤린에게도 보경안민에 집중해야 한다고 상서했으나 장쭤린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국민군과의 충돌이 피할 수 없는 수순에 돌입하자 궈쑹링은 이를 명분 없는 전쟁이라 여겨 불만을 품었다. 장쭤린은 궈쑹링에게 부대를 펑위샹을 견제하는데 파견하고 봉천으로 돌아올 것을 지시했고 장쉐량도 궈쑹링에게 장쭤린에게 직접 반전 의사를 말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지만 궈쑹링은 오히려 장쉐량에게 장쭤린을 몰아내고 권좌를 차지하여 동북의 개혁에 착수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장쉐량은 대답하지 않고 봉천으로 귀환함으로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장쉐량 설득에 실패한 궈쑹리은 지병인 요도염이 악화되어 톈진의 병원에 입원하였고[1] 거기서 동생과 심복들을 불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시작했다. 펑위샹과의 물밑 접촉 및 펑위샹의 과거 북경정변의 전례 또한 그에게 자극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펑위샹 진영은 일본을 방문했던 한푸쥐가 11월 5일 귀국, 다음날 펑위샹에게 방일 결과를 보고했다. 이에 펑위샹은 11월 7일 한푸쥐를 즉각 궈쑹링에게 파견해서 궈쑹링과 협상하게 했다. 장쭤린, 옌시산, 우페이푸의 동시 공격에 궁지에 몰려있던 펑위샹은 봉군 내부에서 궈쑹링이 내응해준다면 그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이후 펑위샹은 자신의 참모장을 보내 궈쑹링과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궈쑹링도 친서를 쓰고 자신의 심복들을 보내 적극적으로 나왔다. 밤을 새워가며 협상하던 이들은 마침내 담판을 짓는데 성공, 11월 19일에 반봉밀약을 맺었다. 밀약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군벌의 전횡을 배제하고 영원히 전쟁의 참화를 소멸한다.
2. 국가를 통일하여 민주정치를 실시한다.
3. 변강을 개발하여 국토를 보존한다.
4. 각자 서정에 힘써 내쟁을 하지 않는다.
5. 합법정부를 구성하여 외국인과 매국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펑위샹은 추가로 궈쑹링이 자신의 부대를 동북국민군으로 칭할 것, 산해관 바깥, 즉 관외로 나가 동북의 개발에 힘쓸것, 관내의 일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궈쑹링은 모두 받아들였다. 이상의 합의사항에 펑위샹은 20일, 궈쑹링은 22일에 서명했다.

3.2 궈쑹링의 봉기

만반의 준비를 갖춘 궈쑹링은 1925년 11월 22일 느닷없이 란저우에서 단장 이상의 군관회의를 소집, 여러 장령들에게 반봉의 의사를 알리고 자신이 구상하는 내정과 외정에 대해 설명했다. 내정에 관하여 궈쑹링은 성자치 실행, 상공 보호를 통한 자본 절제, 빈곤 타파, 정병주의 채택, 금융 정리, 민업 보호, 교육비 투자와 의무교육 실행, 인재본위를 통한 인재 등용, 지방자원 개발 및 실업 진흥, 교통 정리, 경찰 정돈 등을 천명했으며 외정에 대해서 일본과 조선인의 이민 제한, 일본의 엄정중립 요구를 내세웠다. 동시에 그는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본이 중국에 가지고 있던 기존 이권은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거사 이전의 조약은 준수하겠으나 거사 이후의 조약은 인정할 수 없단 입장을 일본에 알렸다. 궈쑹링은 일본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외교처장을 파견, 공산당을 반대하며 펑위샹과도 제휴하지 않고 그저 동삼성의 민주화와 중국군대 개혁을 바랄 뿐이란 입장을 전달했다. 그는 장쉐량의 명의로 반봉통전을 돌리고 장쭤린과 양위팅의 제거를 요구했다. 12월 20일 궈쑹링은 동삼성의 원로들에게 통전을 보내 장쭤린을 교육을 파괴한 죄, 여론을 억압하고 자치를 파괴한 죄, 과도한 징병으로 농촌을 해친 죄, 용인이 공정치 못한 죄,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개인 축첩으로 민중에게 해를 끼친 죄를 성토하며 자신이 장쭤린을 단죄하고 새로운 동삼성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궈쑹링은 휘하의 7만 군대를 5개 군으로 나누어 동북국민군으로 칭하고 거병에 반대하는 4,5,7,10,12사의 지휘관들을 연금했으며 만주 구파 소속 군관 30여명도 체포했다. 궈쑹링에게 저항하던 일부 장교가 총살되기도 했다. 궈쑹링의 거병에 장쭤린과 자신의 이름을 도용당한 장쉐량 모두 크게 당황했다. 장쭤린은 양위팅을 해임시켜 궈쑹링을 달래려 했으나 궈쑹링은 요지부동이었고 장쭤린은 장쉐량을 보내 궈쑹링과 협상하게 했다. 하지만 궈쑹링은 장쉐량과의 면담을 거절하며 자신의 거병 이유를 밝히는 편지를 보내며 장쉐량과 절교했다. 이에 장쉐량은 11월 26일 양위팅을 데리고 소득 없이 펑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3 일본의 개입

궈쑹린 휘하의 7만 군사들은 봉군 중에서도 최고 정예였기 때문에 초반부에 궈쑹링 군대는 매우 손쉽게 진군했다. 궈쑹링은 요충지를 잇달아 점령하고 12월 초에는 남만주 철도까지 접근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장쭤린은 하야까지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관동군이 개입하면서 사태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관동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궈쑹링에게 남만철도와 그 부속지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으며 봉군이건 곽군이건 남만철도 12킬로미터 내에 접근할 수 없으며 접근한다면 일본군이 무장을 해제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관동군의 방해로 철도를 이용할 수없게 된 궈쑹링 부대는 도보로 이동하여 펑톈에 다다랐다. 궈쑹링은 우익을 보내서 펑톈을 점거하려 했지만 관동군이 다시 개입하여 방해했다. 관동군은 펑톈의 진입로인 영구를 중립지대로 선포하여 궈쑹링 부대가 요하를 우회하는 것을 막았고 봉군을 대신하여 치안활동까지 함으로 노골적으로 장쭤린을 지원했다. 궈쑹링 부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궈쑹링은 북경의 일본 공사에게 일본의 개입에 대해 항의했으나 일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쭤린에게 철도를 제공해 헤이룽장과 지린의 장쭤린 부대를 수송해주었고 펑톈에 참호를 파서 전투에 대비해주는가 하면 치안까지 책임져주었다.

12월 20일 궈쑹링은 신민을 점령하고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신민툰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는 관동군이 장쭤린의 편에 선 것이 확실해지자 궈쑹링의 부대 내부에서 탈영, 배반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배후를 지원해줘야 할 펑위샹 등도 자기들 내분에 투닥거리느라 도움이 전혀 안됐고 결국 궈쑹링 부대는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궈쑹링은 아내와 함께 봉천군에게 체포되었고 아내와 함께 총살당했다.

4 결말

궈쑹링의 반란을 진압한 장쭤린은 의기양양하게 다시 북경을 점령하고 공세적 태도로 전환했으나 관동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한 것 때문에 장쭤린은 친일매국군벌이란 이미지가 매우 고착화되고 말았으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제스남방에서 진격해오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궈쑹링이 거느렸던 정예부대는 그대로 장쉐량이 흡수하여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궈쑹링이 키웠던 부대였기 때문에 장씨 가문에 대한 충성과 궈쑹링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였다. 이후 만주로 달아나던 장쭤린이 황구툰에서 폭살당하고 장쉐량 정권이 들어서자 궈쑹링의 부하들은 장쉐량을 도와 궈쑹링의 원수인 양위팅 등을 몰락시키는데 일조했고 동북군벌의 주도파가 되지만 그들도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같이 쓸려나가게 되고 만주 구파가 일본의 주구가 되어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5 참고문헌

  • 곽송령의 반봉사건, 송한용, 전남대학교.

6 관련문서

  1. 꾀병이라 보는 경우도 있는데 궈쑹링이 지병 때문에 일본에서 앓던 것도 그렇고 실제로 아프긴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