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위샹


馮玉祥(풍옥상) (1882년 9월 26일 안후이 차오후 ~ 1948년 9월 1일 소련 오데사)

1 소개

중국의 군벌. 온통 유럽식 제복을 차려입고 으스대던 군벌들 중에서 이례적으로 소탈하고 검소한 성미를 가졌으며 그나마 좌익, 반봉건 성향을 가졌던 군벌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이란 별명이 있었다.[1] 자는 환장(煥章)(...)이다.

2 일생

펑위샹은 1882년 청나라 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후이 태생이지만 얼마 안가서 즈리 성으로 이사를 갔는데 집이 워낙 가난한 터라 입이라도 하나 덜자고 11살의 나이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2] 펑위샹은 졸병 중의 졸병으로 군복과 급식은 받아도 급료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16살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함으로 차차 승진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급료를 어려운 병사들을 돕는데 쓰면서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창설하자 능력을 인정받았던 펑위샹도 북양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졌을 때 그는 지금의 대대장에 해당하는 영장의 지위에 있었는데 간쑤 성 란저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해혁명의 불길이 란저우에 번지자 펑위샹은 란저우 기의에 동참했지만 위안스카이가 보낸 군대에 패해 군대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1914년에 그는 다시 복직하여 위안스카이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7사단 14연대장의 지위로 허난과 산시의 각종 민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삼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해에 그는 기독교도가 되었으며 1915년엔 쓰촨에 파견되어 반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반군 사령관 차이어(蔡锷)와 비밀리에 협상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엔 돤치루이 밑에 있었으며 1917년 4월 그는 계급을 빼앗겼으나 청나라를 복고하려는 장쉰의 변자군에 맞서 싸우면서 다시 계급을 회복했다. 1918년 그는 호법운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다시 계급을 빼앗겼으며 창더를 점령한 공으로 다시 계급을 회복했으나 1920년 7월의 직환전쟁이 발발하자 원래 주인인 돤치루이를 배신하고 우페이푸에게 붙었다. 결국 1921년 샨시(섬서)의 11 사단장, 8월에 섬서 독군으로 진급했다. 이후 1922년에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하남 군벌 짜오티(조척 趙倜)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공으로 5월 하남 독군에 임명되어 허난 성의 민생을 수습하고 짜오티의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군세를 확장했다. 이에 가뜩이나 변절자 주제에 눈에 거슬리는 행보를 한단 이유로 우페이푸의 미움을 사서 10월에 하남 독군 자리를 내려놓고 안휘 독군에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우페이푸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망하고 말았다. 대신에 북경의 육군검열사가 되었는데 완전히 좌천이나 다름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편, 매춘을 근절하고 약탈행위를 단속했으며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23년 5월 서북 변방 독판을 겸하게 되었고 11월 장군부의 양무 상장군에 임명되며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2.1 군벌의 길

220px-Feng_Yuxiang2.jpg
1920년대 초의 펑위샹

펑위샹이 본격적으로 군벌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부터였는데 그는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장쭤린과 내통하여 우페이푸의 뒤통수를 치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쓰촨, 광둥, 푸젠 등을 쳤으나 대실패했고 우페이푸의 부하 중 한명이었던 천중밍은 장제스에게 잘못 걸려서 기반을 모두 잃고 광탈, 홍콩으로 망명가서 거기서 죽었다. 펑위샹은 자신을 등처먹었는데다가 부정부패에 찌든 우페이푸를 매우 증오했는데 장쭤린이 돤치루이, 쑨원과 손잡고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내자 주저없이 손을 잡았다. 일찍이 하남 독군이 되었을때 펑위샹은 원래는 자신과 같이 우페이푸 휘하인 군벌 포드전(鮑德全)이 짜오티의 동생인 짜오제이(趙杰)와 결탁하고 자신을 배신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음에도 우페이푸와 친하단 이유로 처벌도 안 받는 것을 보고 여러모로 원한이 많았다.[3] 우페이푸는 차오쿤의 총통 옹립과 무리한 남방 원정으로 피해가 막심했고 이 때문의 그의 파벌인 직계 안에서도 그를 경원하는 눈빛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1924년 10월 2차 직봉전쟁이 터졌을 때 우페이푸는 펑위샹을 직예군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장쭤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펑위샹은 그 말을 듣는 척, 휘하의 11사단을 거느리고 짐짓 러허 성을 공격하는 체 하다가 10월 20일 총부리를 돌려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국민군이라 칭하며 우페이푸에게서 독립해버렸고 1사단장 후징이(胡景翼)와 15혼성여단장 쑨예(孙岳)가 동조했다. 펑위샹은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해버렸고 우페이푸가 내세운 허수아비 총통 차오쿤(曹錕)을 사로잡아 그에게 우페이푸의 파면 명령과 하야 결정을 강요로 받아냈다. 베이징을 점령한 펑위샹은 내친 김에 부하 로쭝린(鹿鍾麟)을 보내 핍궁사건을 일으켜 자금성 안의 청나라 황족들도 모조리 끌어내 추방해버렸다.

1. 청나라 황제는 오늘부터 황제 존호를 쓸 수 없으며 오직 법률적으로 중화민국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뿐이다.
2. 상기 조건을 받아들이면 국민정부는 해마다 청나라 황실에 10만 원의 가용을 보조해 주고, 또 2백만 원을 내주어 만주족 빈민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북경빈민공장을 창설하게 한다.
3. 청나라 황실은 오늘 안으로 고궁에서 나가야 한다. 이후의 거주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4. 청나라 황실의 사유재산 외에 모든 공유재산은 국민정부의 소유로 한다.

갑작스러운 추방 소식에 당황한 푸이는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했으나 로쭝린은 서두르지 않으면 대포맛을 볼 것이라고 위협했고 결국 푸이는 통곡하는 황족들을 거느리고 3살 때부터 살아온 자금성을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돤치루이와 장쭤린이 비난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쫓겨난 푸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떠났다.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장쭤린은 즉각 뒤통수를 날리는데 펑위샹 휘하 2개 여단을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은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펑위샹의 부하들은 장쭤린을 암살해버리자고 제안하지만 펑위샹은 그랬다간 남은 봉천군벌들이 분노하여 공격해올 것인데 펑위샹의 세력으론 봉천군을 이겨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펑위샹은 한달만에 베이징에서 쫓겨나고 11월 24일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총리로 내세웠다. 펑위샹은 직봉전쟁의 전리품으로 척박한 샨시와 쑤이위안만을 차지했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장쭤린을 친일분자라고 싫어했던 펑위샹은 장쭤린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다. 펑위샹은 1925년 11월 궈쑹링(郭松齡)의 반란을 지원하고 그 패잔병들을 흡수하며 권토중래를 노렸고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펑위샹의 확장에 불쾌해하며 옛날의 적인 우페이푸와 손을 잡았고 내친 김에 산시의 옌시산도 끌어들였다. 결국 1926년 5월 직봉풍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2 장제스의 북벌

파일:Attachment/uploadfile/warofpresident.jpg
장제스, 옌시산과 함께 찍은 사진.

직봉풍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26년 4월, 펑위샹은 장쭤린을 이기려면 국민당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과 합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해 5월에 스탈린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펑위샹은 모스크바에서 3개월이나 머물면서 중국 유학생들과 류보젠을 비롯한 공산당원들과 만났고 소련인들과도 회동했다. 펑위샹이 소련에 있을 동안 펑위샹의 군대는 5월 18일, 옌시산을 공격했고 이에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펑위샹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맞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됨으로 우페이푸는 박살이 나지만 펑위샹의 군세는 우페이푸와 장쭝창의 연합 공세에 패배하여 쑤이위안과 만리장성 일대의 영토를 잃고 간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민당에 가입하여 민족주의 혁명에 동참할 것을 마음먹은 펑위샹은 패전을 수습하기 위해 1926년 8월 15일 류보젠과 소련 고문 유마노프 등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귀국하였고 9월 17일 우위안 서약을 통해 국민당에 합세할 것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 덩샤오핑도 배석했단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시 덩샤오핑은 소련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잘못된 설명이다. 덩샤오핑은 1926년 말에 펑위샹의 공산당원 파견 요구에 따라 선발대로 결정되어 1927년 울란바토르를 거쳐 3월에 시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펑위샹 휘하에서 정치부 교관으로 근무했다.

한편 펑위샹을 터는데 열중하던 우페이푸는 소련 교관들이 조련한 장제스의 정예부대들의 공격에 당해내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페이푸는 9월에 자신의 수도인 우한 3진을 장제스에게 내줘야 했고 우페이푸의 동맹인 쑨촨팡도 장시에서 쫓겨났다. 우페이푸는 허난으로 도주했고 쑨촨팡도 상하이 등을 내주고 달아났다. 그런데 펑위샹이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인지 얼마 안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 공산당과 국민당이 쪼개지면서 펑위샹은 선택을 해야 했고 그는 우한과 난징 사이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일단 펑위샹도 동진을 시작, 시안에서 출병하여 뤄양을 함락시키고 6월에 국민당군과 합류했다. 일단 펑위샹은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연합, 우한 군대와 장쭤린의 봉천군이 싸우는 동안 손쉽게 정저우를 함락시켰고 1927년 6월 3일 정저우에서 왕징웨이와 회담했다. 펑위샹은 정저우까지 전용 열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에 일반 병사들의 군복을 입고 군용 트럭 뒷칸에 타고 빵을 씹으며 나타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펑위샹은 허난 성의 지배권을 비롯, 1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지배권과 전쟁 지휘권, 또한 장쭤린의 영토에 대한 명목상 통치권[4]과 금전적 지원도 받아냈다. 장제스의 공세에 밀려 바람 앞에 등불이 된 왕징웨이는 펑위샹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펑위샹은 왕징웨이 앞에서 장제스를 "늑대의 심장에 개의 폐를 가진 냉혹한 놈"이라고 욕하며 왕징웨이를 잠시 안심시켰고 공산당은 이를 국공합작 통일전선의 승리라고 선전했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조건을 붙이고 있었다. 다름아닌 소련 고문들을 귀국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우한 정부에서 축출하라는 요구였다. 왕징웨이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요구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6월 20일 쉬저우에서 펑위샹은 장제스와 악수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자기 휘하의 공산당원들도 모조리 해고해버리기로 결정, 덩샤오핑 이하 공산당원들을 불러 은화를 몇푼씩 나눠주고 시안에서 추방했다. 펑위샹은 즉각 자기 통치 지역에서 반장 포스터들을 모두 떼어냈고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매달 200만 위안의 지원금과 허난 성의 통치권을 주었다. 펑위샹과 동맹을 굳건히 한 장제스는 공산당 사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본 옌시산도 장제스에게 붙었다.

한편 상하이 쿠데타 이후 일련의 유혈 행위에 대해 장제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장제스와 그 맹우들은 훌쩍 사퇴를 해버렸고 장제스가 사라진 이후 군사력과 재정력이 모두 증발한 국민당은 장쭤린, 쑨촨팡, 장쭝창 등이 결성한 안국군의 공세에 밀려 위기에 처했고 다시 장제스를 불러올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1928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재추대되었고 카이펑에서 펑위샹, 옌시산과 회담을 가졌는데 이때 장제스와 펑위샹은 의형제를 맺었다. 나이가 많은 펑위샹이 당연히 형이었다. 여러 군벌들의 합류로 1928년 4월 7일 장제스가 2차 북벌을 선포했을때 1차 북벌때 10만에 불과했던 국민당의 군세는 100만으로 불어 있었다. 당연히 장제스의 좌우엔 펑위샹과 옌시산이 있었다. 산둥의 장쭝창은 무참히 깨져서 베이징으로 달아났고 우페이푸는 쓰촨으로 달아났으며 쑨촨팡은 다롄으로 튀었다. 장쭤린은 대원수가 되어 결전을 각오했으나 장제스의 군대를 막을 순 없었고 결국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만주를 삼킬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장쭤린이 탄 기차를 황고툰에서 폭파시켜 장쭤린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복종할 것을 천명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물론 세간의 설명과 달리 장쉐량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반일감정에 불타는 인물이 아니라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만주와 일본의 관계 자체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펑위샹은 베이징을 점령할 뻔 했으나 펑위샹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엔시산에게 베이징 입성을 명하면서 베이징에 돌아올 기회는 잃고 만다. 이후 펑위샹은 동북역치 과정에서 장쭤린에 대한 원한 때문에 봉천군벌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장쉐량이 국민당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2.3 중원대전과 몰락

P201003181546207753146121.jpg
1928년의 펑위샹.

장제스의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 천하는 국민당의 손에 들어왔다. 장제스가 국무회의 주석, 후한민이 입법원장, 옌시산이 내정부장, 펑위샹은 군정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장제스가 철권통치로 다스리는 일사분란한 정당이 아니었고 어제의 동지였던 여러 실력자들은 전리품을 놓고 침을 흘리며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제스는 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방세력들의 힘을 줄이고 경제개발을 위해 군축을 실시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시된 정치분회 폐지와 편견회의의 실시에서 결국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의 군벌들과 왕징웨이, 쑨커 등의 국민당 내부 반장 세력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928년 7월 11일의 편견회의에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4인은 200만에 달하는 국민당군을 80만으로 감축하는데 합의하였으나 구체적인 감축안을 두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반이 되는 군대를 줄인다는 계획에 군벌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결국 누적된 불만은 1929년 2월 리쭝런의 반란을 시작으로 불이 번졌고 1929년 4월 펑위샹도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잽싸게 펑위샹 휘하의 한푸쥐 등을 매수하여 펑위샹의 군세를 붕괴시켰다. 이에 펑위샹은 잠시 샨시로 후퇴했고 이때의 반란은 옌시산의 중재로 끝났다. 하지만 펑위샹은 그리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장제스에게 진압당하지만 10월에 펑위샹은 쑹저위안 등을 통솔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탕성즈를 파견하여 재차 진압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1930년 3월 옌시산이 리쭝런, 장파쿠이, 바이충시를 비롯한 군벌들에 우페이푸나 쑨촨팡의 잔당들, 반장의 기치를 든 왕징웨이, 쑨커까지 끌어들인 초대형 반란인 중원대전에 동참함으로 또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최대의 위기에 빠진 장제스였지만 장제스는 약법 문제를 처리하면서 산둥에서 엔시산의 병력을 섬멸함으로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상황을 파악한 장쉐량이 옌시산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장제스에게 가담함으로 중원대전도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리쭝런, 옌시산 등이 기반을 사수한 것과 달리 펑위샹은 기반을 모두 날려먹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펑위샹은 산둥에 칩거했고 그의 옛 부하들은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했다.

2.4 중일전쟁과 최후

1935년 펑위샹은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그러던 중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펑위샹은 일선에 복귀, 3전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화북에 설치된 6전구 사령관도 겸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너무도 강력했고 3전구와 6전구 모두 개발살났다. 화북을 날린 펑위샹의 6전구는 폐지되었다. 펑위샹은 이에 책임지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군, 화북과 동부 해안가의 주요 대도시를 모조리 점령했다. 일본에 대해 가장 강경하던 펑위샹도 이 상황에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한탄했다. 다행히도 중국은 이후 무려 8년을 버텼지만 펑위샹은 다신 실권을 쥐지 못했다. 장제스에게 단단히 찍힌 그는 요직을 맡지 못하고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중일전쟁 내내 그럴듯한 일을 맡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1946년 미국을 여행하며 장제스와 장제스를 지원하는 트루먼 행정부를 비판하고 <내가 아는 장제스>란 책을 장제스를 비방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장제스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돌리며 반장 활동을 하여 장제스에게 단단히 찍히고 말았다. 이후 1948년 그는 소련 국적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오던 중, 흑해 오데사 항구에서 선박화재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죽은 이후 중국 공산당은 펑위샹을 이로운 군벌이라고 규정, 1949년 9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주관하여 그의 1주기 추도식을 열었으며 1953년 태산에서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뤄주었고 그의 아내 리테취안(李德全)은 중화인민공화국 위생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3 여담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불상을 파괴하거나 절을 공격하는 훼불 행위를 자주 저질러 악명을 얻었으며 우페이푸는 이를 두고 그를 빨갱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8년엔 소림사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병사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줬던 일화도 매우 유명하다.

1927년 7월 장제스와 회동하였을 때 장제스는 농민처럼 너무도 초라하게 입고 나온 펑위샹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축을 운반하는 유개 화차에 걸터앉은 펑위샹에게 "펑 최고사령관은 어디 계시나?"라고 묻자 펑위샹이 웃으면서 "내가 펑위샹이오."라고 대답했고 펑위샹을 만나러 왔던 장제스, 리쭝런을 비롯한 국민당 소속 장령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한다. 하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와의 회담에서 그랬듯이 쉬저우로 이동하는 내내 급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여행을 하다가 장제스와 만나기 직전 급히 변장한 것이었다.

그나마 올곧고 개혁적인 성향이긴 했어도 펑위샹 역시 군벌인지라 배신과 야합을 밥먹듯 했고 배반 장군이란 별명도 있었다.

펑위샹의 딸은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 유학을 했는데 그녀가 잠시 사겼던 남자가 바로 장징궈였다.

덩샤오핑이 잠시 펑위샹의 정치부 교관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이후 펑위샹은 공산당과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지만 공산당원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덩샤오핑은 펑위샹이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의 목을 쳤듯이 자신들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우릴 공손히 돌려보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군벌들 중에서 이례적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존경하여 미국 방문 시에 그의 집을 찾아 미망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다.

총 2번 결혼하여 3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았다. 훗날 중공에서 우대받은 리테취안은 두번째 아내다.

4 매체에서

4111001080_87966f638e_o.jpg
영화 건국대업에 등장한 펑위샹. 패왕별희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천카이거가 분했다.

파일:말대황제펑위샹.jpg
진도명이 푸이로 나왔던 말대황제에 나온 펑위샹.

그 외에 중국 공산당 선전영화 건당위업에 잠깐 등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장제스와 국민당의 백색 테러와 대비되어 아주 긍정적으로 다뤄진다. 미국으로 떠나기전 조국의 앞날이 어둡다며 등불을 들고 다닌다. 그가 배위에서 사망하자 (낯뜨거울 정도로 미화되어 나오는) 마오쩌둥은 물론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이던 저우언라이조차 화를 참지 못하며 부하들을 질책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군벌들 중에선 자신이 믿는 종교가 별명으로 붙는 사람들이 펑위샹 말고도 있었는데 회교도 장군이라 불렸던 바이충시(백숭희)나 불교도 장군이라 불렸던 탕성즈(당생지), 유교 장군이라 불렸던 우페이푸(오패부) 등이 있다.
  2. 14살 설도 있다. 그외에 중간에 바오딩 무비학당을 졸업했다는 정보도 있다.
  3. 이 포드전은 은근슬쩍 다시 펑위샹에게 붙으려 했으나 펑위샹은 그를 총살해버리고 이를 추궁하는 우페이푸에게 난군에게 맞아 죽은 모양이다 라고 둘러댔다.
  4. 즉 우한 정부와 펑위샹이 힘을 합쳐 장쭤린을 몰아내면 그 영토를 펑위샹이 지배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