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합(飯盒). 야외용 식기/조리기구를 가리키는 말로, 영어로는 mess tin이라고 하며 셋트화 된 제품을 mess kit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반합은 일본어 飯盒(はんごう)에서 온 단어다. 그래서 나이드신 분들이나 해병대에서는 일본어 발음의 영향으로 함구라고도 부른다.
사실 한국에서 반합이라고 하면 식기가 아니라 독특한 군용 냄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버렸기에, 메스킷과 반합을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원을 따지면 반합의 영어 대응은 메스킷이 맞다.
왜 이런 인식이 생겼는고 하니, 메스킷은 크게 미국식과 그 이외의 나라식으로 나뉘기 때문.
2 미국식
미국식 메스킷은 개인용 휴대 식판+스포크 등의 식기 개념이다. 보급의 미국 답게, 1차대전 이전부터 미국은 야전에서도 개인 취사를 거의 상정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소부대 단위로 야전 주방을 설치해서 거기서 조리한 음식을 병사들이 각자 식판 가지고 와서 밥 타먹는 형태(A레이션, B레이션)가 기본이었고, 2차대전과 베트남전을 통해 C-레이션 타입의 미리 조리된 야전 전투식량이 널리 퍼지면서 더더욱 야전 조리 개념이 멀어졌다. 때문에 미국식 메스킷은 4각형이나 타원형의 소형 식판과 스포크, 식판 뚜껑 겸 접시를 겸할 수 있는 스킬렛(후라이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불 위에 올려서 물을 끓일 필요가 있을 때는 수통과 세트인 수통컵을 사용한다. 즉 미국식은 냄비의 기능은 메스킷에 직접 요구하지는 않고, 주로 수통컵이 냄비 역할을 대신한다. 때문에 미국식 메스킷은 우리가 아는 냄비형(유럽식) 반합에 비해 용량이 작은 접시형에 가깝다.
미국식 메스킷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의 영향(과 공짜 보급)을 크게 받은 나라(필리핀 등) 뿐이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미국식이 마이너.
3 유럽식
그 이외의 거의 모든 나라, 유럽과 일본 제국 등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반합 - 좀 이상하고 납짝하게 생긴 군용 냄비를 사용했다. 유럽 군대는 중세시절부터 병사들 각자가 조리하는 것이 전통에 가까웠고 미국처럼 야전에 소대 단위로 주방 차려줄만큼 돈지랄 하지 못했다고 왜 말을못해 그 풍조를 반영해 개인용 반합은 자체로 냄비이자 밥그릇 겸 빵자루이며, 야전에서 모닥불/에스빗 스토브 위에 바로 올려서 조리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대부분 속뚜껑이 있는데 여기에 반찬을 담는다. 뚜껑 자체도 프라이팬이나 그릇으로 쓸 수 있는 구조. 이 냄비에 스푼/포크 등이 붙어서 개인 식기 세트가 된다.
현재 널리 퍼진 형태의 원조는 1908년 즈음 현재 형태나 그에 가까운 것을 제식화한 독일과 영국이다. 군장 배낭 바깥에 매달기 좋으면서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단면이 D형이나 C형의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인 경우가 많다. 0 형의 타원형이나, 사각형 메스틴도 있다. 평범하게 보통 냄비 같은 O형을 쓰는 나라도 있긴 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군장을 보면 장교-사병 물문 반합과 빵 주머니, 수통은 반드시 매달고 있다.(때로 +방독면 통도 달고 다녔다)
일제는 한국에서 반합으로 아는 그 묘하게 굽은 콩팥 형태(C형)의 것을 사용했다. 일본군은 작전 중에는 소단위 부대를 위해 야전 식당을 운영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병사들이 개별적으로 보급받은 쌀을 조리할 필요가 있었고, 이 일본군식 반합은 속뚜껑과 밀폐형 바깥뚜껑 덕분에 밥 짓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물론 요령이 없으면 설익은 3층밥이 만들어지지만.) 반합 자체가 쌀자루 역할을 하기도 적합했다. 일본군 관련 기록에서는 해지기 몇 시간 전부터 불 피워 밥 지어 두는 냄새가 솔솔 퍼졌다고 한다. 물론 고체연료 지급같은 건 없었고 '그' 황군에서 고참들이 직접 자기 먹을 밥을 지었을 리도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무 집이건 들어가 집주인 걷어차고 문짝 뜯어다 밥짓고, 밥이 설익었다고 고참에게 걷아채이는 거지 뭐...
4 한국군에서
이 일본식 반합이 한국군과 중국군에 그대로 전해져서 현재도 이 타입의 물건을 사용한다. 다른 장비는 미국 영향을 심대하게 받았지만, 식기 만큼은 쌀 문화권이라서 일본의 반합이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 시점의 한국군은 설령 훈련을 나가더라도 식사는 후방 취사반에서 추진해오기 때문에 훈련이라도 나가지 않는 이상 직접 반합에 밥 짓는 일은 드물지만, 군대가 다 그렇듯 사용의 가능성이 있다+늘 써오던 타성 때문에 굳이 바꿀 이유는 없어 보인다.
설거지의 부담을 덜기 위해 비닐을 씌워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련 중엔 마실 물도 귀하기 십상이고, 수세미 같은 걸 들고 다니지도 않기 때문에 비닐 안 쓰면 난리가 난다. 게다가 군용품이란 게 다 그렇지만(...) 녹이 슬었다던가 언제 묻었는지도 모를 찌꺼기가 눌러붙었다던가 그런 비주얼이 많기 때문에 비닐 안 쓰면 위생에도 대략 좋지 않다.
단순 배식 추진이 아니라 실제로 불 위에 올리고 조리하는 상황이 생기는 경우 자연스레 겉이 타고 그을리게 되는데, 웃기게도 페인트칠이나 락카칠을 해버린다. 반합의 경우 사용감이 생기는 게 당연한 것인데 검열때를 대비해서 이딴 짓을 하는 것. 원래 반합 겉면은 내열 페인트이거나 내열 피막을 입히기 때문에 일반 페인트를 쓰면 안 된다. 다만 과거에는 군납 반합도 페인트의 질이 처참해서 불에 올리면 페인트 타는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에 매한가지였긴 하다.
5 민간용
과거에는 전쟁 이후 유출되거나 주한 미군 잉여 장비로 시중에 나온 군용 장비가 민간용 캠핑 장비로 물려지는 일이 많았기에, 반합 역시 민간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민간 캠핑 시장이 성장하고, 크고 작은 냄비 여러개를 겹치는 형태의 민간용 코펠이 70년대 초 등장하면서 곧 퇴출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사실 반합 뿐만 아니라 민간용 야영 장비 전반이 군용보다 훨씬 발전해서, 과거와는 반대로 민간용 야영 장비가 군용에 영향을 주는 역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군용 반합은 모닥불 위에 조리하는 것을 상정했기에 저 납작한 형태로도 문제 없지만, 민간 캠핑에서는 제어된 화력을 내는 가스/기름 스토브를 주로 사용하므로, 휴대성을 위해 세로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군용 반합의 불편한 모양새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다만 군용 반합의 세로로 길쭉한 형태는, 여러개의 반합을 가로막대에 꿰어서 한 번에 모닥불에 올리기는 오히려 편한 형태이기도 하다. 군대 환경에서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다만 메스틴(mess tin, 일본에서도 발음 그대로 メスティン)으로 부르는 사각형의 납작한 물건은 1인 분량의 캠핑 밥 짓기 좋아서 일본 캠퍼들 사이에서 스테디셀러로 꽤 애용되고 있다. 이 형태도 원래는 영국군 메스틴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트랜지아 등에서 민수용으로 나와서 군용 냄새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