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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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玄慶 ?~936

고려의 개국공신.

경주 배씨(慶州 裵氏)[1] 의 중시조이다.

경주출신으로 출생년도는 미상이다. 어릴적 이름은 백옥삼으로 이게 제대로 된 이름도 아니고 성도 없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출신이 미천할 가능성이 높다.

궁예가 봉기했을 무렵에는 일개 잡졸에 불과하였으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자랑하며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리고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당시 군부의 실세들이던 홍유, 신숭겸, 복지겸과 모의하여 왕건에게 다음과 같이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삼한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草寇)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 지도 스물네 해 남짓 지났으나,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의 악정(惡政)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예로부터 암주(暗主)를 폐하고 명왕(明王)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청컨대 시중께서는 은나라 탕왕(湯王)과 주나라 무왕(武王)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

고려 건국 후 배현경은 태조 왕건에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입니다. 철원 도성 백성들의 주상에 대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왕권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해 천도가 필요합니다.”

왕건은 배현경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배현경을 새 도읍을 건설하는 총 책임자인 개주도찰사에 임명했고, 이듬해 919년(태조2) 1월에 도읍지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이후 배현경은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이후에 승진하여 최고의 등위인 정1품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이후 전장에서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할 때는 장군으로, 중앙정부에서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할 때는 각료로 활동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왕건의 옆에서 보좌할 때는 잘못된 점이 있으면 항상 계급장떼고 맞짱뜰 기세로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직언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배현경을 왕건 역시 신뢰하였뗐때매고 배현경의 직언이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다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기었다. 특히 왕건이 인사문제에 대해서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들었다. 유명한 사례로 청주 출신인 현률에게 정2풍 순군낭중을 재수하려 하자 "그 색히한테 야전지휘권 쥐어주면 동향 출신 사람들과 작당해서 반란 일으킬 가능성[2]이 높아서 절대 안됨"이라 반발하자 급을 낮춰 야전지휘권이 없는 병부낭중직으로 고쳐 재수하였다.

말년에는 정1품 대광 벼슬을 재수 받았으나 아쉽게도 고려의 통일을 하자마자 936년에 숨을 거두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배현경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왕건이 친히 배현경을 찾아가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란 말을 하였고, 왕건이 손을 놓고 문을 나서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는 어가(御駕)를 멈추고 관비(官費)로 장사를 치를 것을 명한 후에 환궁하였다.

사후에 무열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의 4대 개국공신 자격으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조 왕건에선 사극전문배우인 신동훈씨가 선 굵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극 초반부 홍유와 함께 김순식의 휘하 장수로 등장하였고 역사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로 홍유, 복지겸, 신숭겸과 함께 혁명을 이끈 4기장이 되었다. 작중에서 유금필을 탄핵할 때에 홍유, 왕식렴과 더불어 가장 앞장선다기 보다는 묻어간[3] 장수들 중 한 명이지만 이후에는 별 트러블 없이 조정에 충성하게 된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전쟁 중심 서술이 되다 보니 조정에서 직언하는 면모는 많이 생략된 편.

나이가 들었어도 야전에서 뼈를 묻으려는 전형적인 무인캐릭터로 그려지며,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홍유와 같이 다니며 거의 모든 전투에서 왕건을 따라 참여했다. 다만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공산 전투에서는 위기에 처한 왕건을 구원하고자 뒤늦게 달려왔으며, 왕건의 명에 따라 신숭겸, 김락 등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최응 사후 병부령을 제수받았을 때 고사했지만 왕건의 명으로 겸임하게 되었으며, 역사와 달리 일리천, 황산 전투에도 다른 장수들과 참여해서 통일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다.
  1. 신라 6부 촌장 중 하나인 베지터배지타(裵祗沱) 이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어 고려 건국공신인 배현경을 중시조로 삼아서 세계를 잇고 있다. 모든 관향이 배현경의 후손을 자처하고 족보도 통합해서 간행하고 있어 실질적인 모든 배씨의 시조다.
  2. 왕건이 즉위한 이후 청주 지역 호족들은 왕건에게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
  3. 사실 홍유, 왕식렴이 주도하고 배현경이 듣다가 '아...뭐 그렇지요......'하고 묻어간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