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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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崇謙 ( 882? ~ 927)

1 소개

고려 초기의 장수이자 개국공신. 그리고 평산 신씨의 시조.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었다.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태어났지만 활동터전은 강원도 춘천시. 그 때문에 유랑민 출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신숭겸과 최지몽, 박영규 등 왕건에게 전남 지역 출신 측근이 있고 크게 대우 받았다는 점에서 훈요십조에 대한 기존의 해석이 지적받고 있기도 하다.

궁예 시절에 무장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궁예가 슬슬 막장테크를 타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손을 잡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를 건국한 개국 1등 공신이다. 그 뒤에 태조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받고 숭겸(崇謙)이란 이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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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솜씨가 뛰어났는지 왕건이 신숭겸에게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바로 화살을 쏴서 그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신숭겸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는 유래이다. 신숭겸이 기러기를 쏜 이 지역이 바로 평산.

2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다

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김락과 더불어서 가장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다. 한 고조 유방의 심복이었던 기신의 고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쫓았으며 결국 신숭겸은 참수되었다. 하지만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결국 시체는 찾았지만 머리를 찾을 수 없어서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서 같이 매장했다고 한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세 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노리고 도굴할까봐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하게 할려고 봉분도 세개 만들었다고 전한다. 시신도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근거로 찾아냈다고 전해진다.

3 후일담

또한 이것이 도굴당할 것을 염려하여 가짜 묘 3개를 같이 지었으며 후에 김락과 함께 그들을 기리는 도이장가가 지어져 충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조선왕조에서도 충절의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왕조에서도 신숭겸의 후손은 혜택을 입었다. 신숭겸의 평산 신씨는 조선의 무반 명문가 중 하나였으며, 신사임당임진왜란 때 활약한 신립도 평산 신씨다. 구한말 의병장이던 신돌석도 평산 신씨.

대구 지묘동에 사당이 있고, 파군재 삼거리에 크고 아름다운 동상이 있다. 그리고 역시 대구 파군재 삼거리 근처에 표충단이 있으며[1]묘는 춘천에 있다. 참고로 춘천의 신숭겸 묘에 가면 정말로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도굴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과 그냥 부인을 함께 안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늘날 신숭겸이 묻힌 곳은 원래 왕건 자신이 묻힐 곳으로 봐 둔 명당 자리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을 위해 양보한 것이라고 한다.그만큼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신숭겸의 위왕대사는 기신의 고사에서 착안한 것인데, 별 다른 녹훈을 못 받아서 유방을 까는 빌미가 되기까지 하는 기신과 달리 신숭겸은 두 왕조에 걸쳐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받을 수 있는 모든 대접을 다 받고 있다는 것. 중국산은 새드앤딩이지만 국산은 해피엔딩, 야 신난다!

신숭겸의 묘는 총 열 개인데, 도굴을 두려워하여 구월산과 팔공산에 각 세 개의 가묘를 지었고, 두 개의 도굴방지용 가묘를 포함한 세 묘가 있는 춘천에는 신숭겸의 몸이 묻혀 있고,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는 신숭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정말이지 관우와 비슷한 셈이다.[2] 태안사에 몇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신숭겸의 애마가 신숭겸의 목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3일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며(...적토마?), 목과 말을 묻고 장군단이라 하여 매년 3월 16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호환이 일어나는 등 사찰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뒷날 고려의 예종은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인 '도이장가'를 지어 두 사람을 추모하기도 했다.

4 대중 매체에서

태조 왕건에서는 관우와 같은 이미지로 나왔다. 배우는 김형일.[3] 긴 수염에 애용하는 무기도 언월도다.[4][5] 박술희와 함께 여행하다가 그들을 눈여겨 본 왕건에게 대접받고 의형제가 된다. 이건 영락없이 유관장의 포지션인데 다만 여기에 유금필이 끼어들어 4형제가 되었다.

싸움도 잘하는 장수로 나온다. 웬만한 일기토에서 진 적이 거의 없다. 공산 전투에서 애술을 이기지 못해 박술희보다도 약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신숭겸이 무거운 페널티를 안고 있었다는 걸 전혀 고려 안 한 것이다. 신숭겸은 무려 4일간 잠을 못 잔 상태였으며 애술이 잠을 못 잔 기간은 길어야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전투 자체가 애술이 신숭겸과 싸울 목적이 주가 아니었음을 고려해도 쓸데없이 길게 끌다간 다른 장수[6]들이 협공으로 애술에게 맞아 죽는 상황이 나온다. 안 그래도 주변 장수들과 병사들도 죄다 전멸한 상태이고. 사실 이런 페널티를 안고 이 정도 싸운 걸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유금필보다도 센 장수인데도 상황이 못 받쳐줘서 죽은 케이스. 게다가 박술희 vs. 애술의 경우를 봐도 애술이 밀리자 다른 두 장수가 함께 덤벼들었다. 무엇보다도 초기 백제 장수들 중에 싸움으로는 수달과 추허조에 이어 넘버3으로 평가되는 방희 장군을 베었고, 유금필과 첫 대면 때 거의 동등하게 나갔다. 따라서 애초부터 애술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후 견훤이 눈을 부릅 뜬 그의 목을 보자 식겁하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삼국지연의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보는 장면의 패러디인 것 같지만 아니다. 조조가 관우의 목을 보고 놀라는 것은 관우의 목이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오랫동안 아꼈던 사람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견훤이 신숭겸의 목을 보고 놀란 것은 틀림없이 '왕건 아우' 의 목일 거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전혀 엉뚱한 사람의 목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서로 전혀 다른 상황이다. 적국의 왕이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목을 베어오는 것이고 예상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사람의 수급이 도착하여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견훤은 왕건에 대해 딱히 증오심은 없었고 오히려 적국의 왕이었지만 궁예의 수하 시절부터 탐내던 인재였다. 오히려 왕건과는 애증의 관계였던 것이다. 견훤과 왕건의 특별한 관계와 목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조가 관우의 목을 놀라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천년의 신화(왕건 미션)에서는 언월도는 수달에게 주고 쌍도끼를 투척하는 식으로 공격한다.

여담으로 4기장(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의형제들 중 유일하게 극중에서 처음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능산이라는 초명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것으로 나온다.

희대의 명대사로는 형님폐하가 있다.[7]
  1. 이전에는 대구에 묘가 있다고 적혀 있었으나 사실 이것은 신숭겸이 전사했다는 곳에 만든 가묘이다. 조선시대에 신숭겸의 후예인 신흠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2. 중국 허창에는 관우의 목이, 당양에는 관우의 몸이 묻혀 있다.
  3. 훗날 드라마 징비록에서 신숭겸의 후손인 신립 역할도 맡게 된다.
  4. 가끔 평범한 검을 쓸 때도 있다. 후백제 진영의 맹장인 방장군을 벨 때에도 검을 썼다.
  5. 작중에선 이 점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인 줄 알고 베었던 목이 사실 신숭겸의 목이었음을 견훤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목이 라는 걸 알게 된 견훤이 목을 베어 온 애술에게 제대로 확인을 했냐고 닦달하자 최승우가 '원래 고려 왕은 언월도를 안 쓰는데 그 날은 웬일로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이 자는 분명 왕건의 아우 신숭겸이다.'라고 말했다.
  6. 김언, 전이갑, 전의갑 등등
  7. 이 괴상한 단어는 비단 신숭겸만 말하는건 아니다. 유금필과 박술희도 이런 단어를 종종 말하고, 견훤의 친동생인 능애도 가끔씩 이 단어를 말한다. 왕건도 궁예의 밑에서 형님 아우할때 둘이 있을땐 형님폐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연원을 따지자면 이환경 작가의 이전 작품인 용의 눈물에서 이지란이 종종 이성계에게 형님전하라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정작 이화는 안 그러던데 의동생만도 못한 이복동생